질 문 : 스님이 법문하신 거나 인터뷰 하신 자료를 보면 스님께서 늘 선(禪)이 중심이고, 스님 일생에서 근본이 되어 왔다고 말씀을 하셨더군요. 그래서 송구합니다만, 화두는 어느 분에게 받으셨는지요 ?
우룡스님 : 은사인 고봉스님에게 “시심마(是甚?)= 이뭣꼬”를 받았어요.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화두 공부가 큰 진척이 없었어요. 그것은 화두가 고리가 맺혀야 되는데 안 맺혀서 늘 갈팡질팡 했지요. 그리고 주력하고 염불하다 체험한 것이 자꾸 생각나서 화두 공부가 진척이 없었어요.
젊은 시절 선방 이야기
질 문 : 그래도 선방을 많이 다니셨던데요 ? 그 얘기를 좀 해주시죠.
우룡스님 :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선방 다닌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강원 다닌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꾸준히 노력하는 그것뿐입니다. 그 길만이 최고에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지속적으로 놓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면 뭔가 소식이 옵니다. 안하면 체험할 수 없지요.
저는 통도사 극락암, 수덕사 정혜사, 동화사 금당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쌍계사 서방장 선방 등등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 선방 이야기야 며칠을 해도 끝이 없겠지만, 역시 금봉노스님이 수덕사 조실로 계실 때 생각이 나네요.
만공 노스님 열반 후에 수덕사에 산내파하고 산외파가 조실 문제 때문에 조금 갈등이 있었어요. 산외파에 대표자로는 고봉노스님이고, 산내파 쪽으로 봐서는 열반하신 벽초노스님 둥으로 해서 이쪽 계통이셨고, 그 파도가 일단 가라앉기 전에 금봉스님이 조실 자리에 계셨는데 주로 산문 밖에서 포교당하셨던 산외파에서는 긍정을 안 했지요.
그래서 수덕사 선방의 방함록 기록을 못할 때고 있었어요.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금봉 노스님이 조실로 계시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아서 잠깐 자리를 피해야 할 사건이 벌어졌거든요.
노스님이 벽초 노스님에게 “벽초! 이사를 가야 되겠는데 타고 가야 될 말이 없네.” 그러니까 벽초 노스님은 “말은 여기 있습니다마는, 타실 수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했어요.
벽초 노스님이 성이 마씨거든요. 옛날 어른들은 당장 쫓겨 가게 된 마당에도 그런 여유로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셨는데 요새는 그런 여유가 없어진거 같아요….
질 문: 금봉스님이 그러시다가 해인사 조실로 가셨군요.
우룡스님: 그러시다가 해인사 조실로 겸해서 내려오셔서 한참 계시다가 열반하셨지요. 그 다음에 덕숭산 조실로 대를 이은 것이 전강노스님이셨지요. 금봉 노스님 열반 후에 그러니까 법맥 계통으로 보면 전부 만공스님 밑에 사형사제간 촌수인데 덕숭산 조실 체계를 치면 만공스님 후에 금봉스님, 금봉스님 후에 전강스님, 전강스님 후에 벽초 노스님으로 해서 원담 노스님으로 덕숭산 조실 법계를 보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질 문: 전등사 조실이셨던 서운스님 어록에 보니까 금봉스님 법을 굉장히 높이 보셨더라고요. “근대에 금봉스님만한 도인도 드물다” 하실 만큼….
우룡스님: 도인이고 도를 그렇게 좋아하시고 범어사에 그 스님을 평하기를 도를 좋아하시는 호도인(好道人)이다. 금봉스님이 만공노스님의 법제자가 될 때의 인연이 묘해요. ‘내가 늘 젊은 스님들께 이야기하면서도 옛 어른들은 말 한마디를 하셔도 이렇게 무섭게 따졌다.’ 그런 일화를 해주거든요. 요새 젊은이들처럼 마구잡이로 하는 게 아니라 옛날 노인들은 이렇게 말 한마디를 하는데도 이렇게 무서웠고 밑에 사람들 경책에도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무서웠습니다.
금봉 노스님이 본래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아니거든요. 문경 대승사에서 출가 하셔서 공부를 하시고 공부를 마친 다음에도 만공스님 법제자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계시다가 중간에 덕숭산에 가서 공부하시면서 재미있는 계기가 있었어요.
금봉스님, 벽초스님 그때 박고봉스님 이런 쟁쟁한 전부 조실감인 분들이 같이 계셨어요. 용성스님, 만공스님 앞에 인가 받으시고 쟁쟁한 조실감인데 만공스님이 계시니까 수덕사 선방에 오셨지요. 하지만 하늘을 뚫고 땅을 깨뜨리는 기운이 있어서 기운 감당을 못하시는 거지요. 그러니까 오전 시간에 선방에 앉아 계시다가 점심공양을 하시고 나면 오후에 절 밑 주막집에 내려가서 전부가 술독을 밑바닥까지 비우시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떨 때는 밖에서 저녁을 드시고 들어가고 어떨 때는 조금 일찍 들어가면 절에서 저녁을 드시고 그게 일상생활이 되는 거지요. 밤하고 오전시간에 법당에 잠깐 앉아 계시다가 오후 시간에 완전히 비어버리는 거예요.
하루는 전부 선방을 비우고 내려갔다가 저녁을 밖에서 드시고 들어갔는데 선방 복판에 만공 노스님이 앉아 계셨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앞도 뒤도 모르고 떠들썩하게 들어갔다가 먼저 들어간 사람은 노장님한테 들켰으니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밖에 “영감 왔다. 영감 왔다. 조심해라.” 그랬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들어가던 사람은 발만 디뎠다가 노스님한테 안 들켰으니까 도망와 버리고 밖으로 나와서 “영감 와서 앉았다.”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런데 금봉스님이 들어간 거예요. 금봉스님이 들어가서 만공스님한테
“어! 만공! 너 왜 거기에 와서 앉았노? 그 자리는 조실 자리야 ! 너는 조씰이야.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어” 그리고는 앉아 계신 만공스님 두 귀를 당긴 거예요. 앉았다가 귀를 당기니까 아프니까 노스님이 비명을 지르면서 네발로 기고 술을 한 잔 잡수셨으니까 숨이 갑갑하니까 조금 쉰다고 주춤하면 노스님이
“이 사람아 술 취했나 놓게 귀 떨어지네 놓게” 금봉스님이 당기면 “아야야 !” 비명을 지르면서 네 발로 따라가는 거지요.
금봉스님이 주춤하면 “이 사람아 놓게 귀 떨어지네 ! 이 사람아 술 취했나 놓게” 수덕사 선원 큰방을 세 바퀴를 돈 겁니다. 그래가지고 마지막에 선방 정면 큰문을 어간문이라고 하지요. 그 문에서 노장님 엉덩이를 발로 차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만공스님이 방에서 뜰로 툇마루로 떨어졌다가 밑에 마당까지 떨어진 거예요. 만공스님 그 무렵에 조실스님의 통이 얼마나 큰가요. 만공 노스님이 한마디 말도 안하고는 그대로 금선대에 내려가신 거예요. 근래 같으면 조실스님도 고함 바리바리 지르실 것이고 어디에서 못된 놈이 버르장머리 하며 호통할 것이고, 조실스님 상좌라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 전부다 만공스님의 상좌, 손자상좌, 조카상좌도 있으면서도 법문 거량이니까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대로 지켜봤고, 노장님 그렇게 당하면서 선방을 세 바퀴 돌 동안에 진심(嗔心) 하나 안내고 고함 한번 안 지르시고 그대로 따르시고 뒤에서 차버리니까 노장이 떨어졌다가 내려가 버린 거예요.
그 다음날 난리가 벌어진 거예요. 아침 공양 후에 “주현이 내려오라” 이렇게 된 거지요. 그때는 금봉스님이 아니고 주현스님이라 불렀어요. 노장님이 부르시니까 어떻게 해요. 장삼 걸치고 내려가서
“부르셨습니까? 공양 드셨습니까?” “그래, 밥 먹었나?” “네.” 딱 앉혀놓고 “어제 일을 기억을 하느냐? 기억을 못 하느냐?” 뭐라고 그래요.
기억 못한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인간의 자격이 없으니까 공부할 자격이 없다고 돼버립니다. 인간의 양심이 없는 놈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되거든요. 공부는 인간이 하는 것이지 인간 자격이 없는 놈은 공부할 자격이 없으니까 너는 가라로 끝나버립니다.
“어제 일을 기억을 하느냐? 못 하느냐?” “기억합니다.”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이(理)로 그랬느냐? 사(事)로 그랬느냐?” 여기에 “이로 그랬습니다”, 하면 앞뒤를 모르는 놈이니까 꾸지람만 듣고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말만 듣지 두들겨 맞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금봉스님 답이 "사로 그랬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사상으로 그랬다고 “어른에게 그런 버릇을 할 수 있느냐?” “잘못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줄 아느냐?” “압니다.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른에게 그따위 버르장머리를 했으니까 벌을 받아야 될 것 아니냐 ?”, “벌받겠습니다” “엉덩이 까라”
그래서 엎드려서 만공스님이 기운 세고 언제나 단소를 염주처럼 들고 다니셨는데 엉덩이를 치는데 한 차례에 엉덩이 피부가 30cm 찢어졌어요.
“올라가거라 ! 다시는 그따위 버릇을 하지 말아라.”
그래서 올라와서 금봉노스님이 한 40일을 화장실을 못갔어요. 화장실만 가면 터져 버리니까 약을 발라서 조금 아물면 화장실만 가면 터지니까 그러니까 곁에 계셨던 어른들이 전부 말도 한마디 한 줄 모르는 어리석은 놈이라고, 때린다고 “이로 그랬습니다.” 소리를 했으면 생각이 잘못 들었다고 꾸지람만 듣지 두들겨 맞지는 않는다, “사로 그랬습니다” 했으니까 사상으로 얻어 터졌다 이거예요.
그렇게들 말하는데 금봉스님은 “나는 너희들처럼 사기 치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게 결국은 금봉 노스님이 만공 노스님에게 입실제자로 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어서 금봉스님이 만공스님의 법제자가 된 겁니다. 만공 노스님의 말씀이 그 제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 이치적으로 이에 입각해서 그런 짓을 했느냐 사상에 입각해서 그 짓을 했느냐 이 꾸지람이 무섭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큰방을 자기 밑에 공부하는 제자가 그런 짓을 해도 소리 한마디도 안 지르시고 화 안 내시고 세 바퀴 방을 돌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대로 순응했다는 것은 근래 선지식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통이지요. 그러니까 옛 어른들이 납자들을 다스릴 때 얼마나 신경을 써서 다스렸고 납자들에게 말 한마디를 해도 얼마나 무섭게 생각을 하셨는가가 표가 나는 거지요. 근래에는 찾아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름답기도 하고 흐뭇하고 무서운 대담이지요. 두 분의 일이 …
질 문: 대단히 교훈적인 이야기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스님! 금봉스님 이외에도 선지식으로 모셨던 분이 또 계십니까?
우룡스님: 금봉 노스님이 수덕사 조실로 계셨을 무렵에 송광사, 해인사에 8·15 해방 후에 한국의 승풍을 다시 고친다고 총무원 사업으로 해인사에 모범 총림이라는 것을 했지요. 그때 총무원에서 선방 조실로 추천해서 모신 분이 효봉스님입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효봉 노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계셨고 법주사 쪽으로는 그때 문중이 결정 안 되었지만 전강 노스님께서 그 무렵 만행하신다고 밖에 나와서 계셨지요 아마….
저는 주로 통도사 경봉 노스님을 가까이에 모셨지요. 우리 스님인 고봉스님은 납자들을 자기 앞에서 눈에 불꽃이 튈만큼 무섭게 꾸지람을 하셨고 안 되면 몽둥이까지 치셨지요. 경봉 노스님은 평소에 그런 적이 없어요. 조용한 말씀으로 다루어 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우리 스님 같은 불꽃이 튀는 그런 교육에 익어진 우리로서는 경봉스님 회상에서는 그만 맥이 풀어진 그런 상태가 되어서 큰 진전은 없었다고 생각이 돼요.
질 문: 그때 통도사 극락선원에는 몇 분이나 정진하셨는지요 ? 또 여러분이 같이 정진하다 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듯한데 좀 들려주시죠.
우룡스님 : 극락암 선원은 결제철이 되면 거사님, 보살님들이 오시곤 했어요. 주로 비구들이 많았지만 거사님, 보살님도 계시고 해서 한 30~40명은 늘 계셨지요. 아마 어느 동안거 때에 종정을 지내신 혜암스님께서 입승하실 무렵인데 한 철을 용맹정진하자는 의견과 가행정진하자는 입장이 갈려 대중공사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입승이셨던 혜암스님께서 당신 체험으로 “장좌불와가 효력이 있다. 잘 것 없이 죽으라고 밤낮으로 용맹정진 하는 쪽으로 하자” 그런 의견을 내셨고, 지금 파계사에서 병이 드신 철웅스님 하고 몇 분은 “하루 종일 멍청하게 졸고 있는 것보다는 두 시간 또렷하게 자고 나머지 시간이라도 깨끗하게 앉아있는 가행정진이 낫다”라 주장을 하면서 그해 겨울에 조금 갈등이 있었지요. 그때 근일스님도 혜암스님과 마찬가지로 용맹정진으로 가자 그런 편이죠. 오래 가진 않았지만, 살림 중에 조금 이상한 충돌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 공부를 잘하자는 얘기였죠<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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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