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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는 <용비어천가>에 관한 김종직 비밀 코드가 있다.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4월 5일의 “의정부우찬성 권제, 우참찬[원본에는 우찬참?[右贊厽+人?]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렸다. 전에 이르기를”이라는 기사는 “안평대군 이용・성균관주부 성삼문・상서녹사 임원준 등이 <용비시>를 지어 올렸다. 전에 이르기를”이라야 맞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단종 1년(1453)에 진사, 세조 5년(1459)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이듬해에 사가독서 하였으며, 세조 8년(1462)에 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세조 10년(1464) 7월 23일에는 감찰이었고, 이어서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성종 7년(1476)에 선산부사였다. 성종 14년(1483)에는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8년(1462) 6월 10일에 행승문원박사 겸 예문봉교로 임명된 김종직은 세조 10년(1464) 7월 감찰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을 하였을까? 예문봉교는 전임사관이다. 권남・최항・양성지 등이 상고하기 전에 이루어진 《세종실록》 수정 작업을 예문봉교 김종직도 전임사관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좌의정(左議政) 권남(權擥), 중추원사(中樞院使) 최항(崔恒),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에게 실록(實錄)을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攷]하게 하였다.
《세조실록》세조 9년(1463) 3월 29일
권남・최항・양성지의 직위를 보아 이들은 이날 하위직의 사관들이 수정한《세종실록》을 다시 살펴본 것이다.
전임사관 김종직은 세종 27년(1445) 4월 5일 ‘의정부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 참판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렸다’는 기사에 《용비어천가》 저자 세 사람은 날조임을 알리는 6개의 비밀코드를 심어 놓았다.
세종 27년(1445) 4월 5일 《세종실록》에 있어야 할 “안평대군 이용, 성균관주부 성삼문, 상서녹사 임원준 등이 <용비시>를 지어 올렸다. 전에 이르기를”이라는 기사가 어떻게 하여 “의정부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이《용비어천가》 10권을 올렸다. 전에 이르기를”이라는 기사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보자.
단종 1년(1453)에 계유정난이 있었고 이때 안평대군은 사사되었다. 세조 2년(1456)에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성삼문도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리고 세조 3년 (1457)에는 단종도 유명을 달리했다. 이처럼 큰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안평대군과 성삼문이 《용비어천가》 저자라는 것은 세조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세조는 그의 후손이 계속 왕이 될 조선에서 《용비어천가》를 통째로 없애든지 아니면 《용비어천가》 저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용비어천가》로 조선왕조의 안정을 기하자는 세종의 뜻을 잘 알고 있던 세조는 후자를 선택했다.
《용비어천가》 저자의 수정 시기는 적어도 단종이 죽은 다음 해인 세조 4년(1458) 이후로 보아야한다. 《용비어천가》 저자의 수정 시기에 대하여 가장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증입언문》이란 책이다.
증입언문(增入諺文)이란 책
《증입언문》은 《실록》 전체에서 세조 2년(1456) 4월 9일 한 번만 있다. 《증입언문》은 지금까지 훈민정음이나 한글 관련 책에서는 본 적이 없는 말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없다. 세종 때 훈민정음 관련 업무는 예조 소관이었다. 다음은 세조 2년(1456)에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뢴 기록이다.
본조(本曹)는 의정부(議政府),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와 더불어 다소 연소한 문신(文臣)과 의관 자제를 선정하여 원액(元額)에 충당하고 한음(漢音)과 자양(字樣)을 익히려 하니, 청컨대 《증입언문(增入諺文)》・《홍무정운(洪武正韻)》을 으뜸으로 삼아 배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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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세조 2년(1456) 4월 9일
한자로 풀이해 보면 《증입언문》은 더 보태어 넣은 언문이란 뜻일 게다. 이 말은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 창제와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 반포 때 28자인 우리글 자모에 추가한 자모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실록》에서 훈민정음 창제 후 우리글과 관련된 일은 ① 세종 26년(1444) 2월 16일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한 일, ② 세종 27년(1445) 4월 5일 <용비시>를 올린 일, ③ 세종 28년(1446)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한 일, ④ 세종 29년(1447) 10월 16일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 준 일, ⑤ 세종 29년(1447) 9월 29일 《동국정운》을 완성한 일, ⑥ 세종 30년(1448) 3월 28일 상주사 김구를 불러《사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 ⑦ 정음청에서 《소학》을 찍는 일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훈민정음 예의에 있는 28자 및 병서 6자 외에 우리말이나 한자음 표기에 필요한 언문 자모가 자연스럽게 추가된 것이 《증입언문》이 아닐까?
《용비어천가》에는 훈민정음 예의에서 볼 수 없는 중모음과 중자음이 있다. 그것은 《용비어천가》제2장[ㅟ][ㆎ]・제4장[ㅳ][ㅭ]・제5장[ㅐ]・제7장(ㅸ)・제15장[ㅮ]・제20장[ㅼ]・제23장[ㅴ][ㅔ]・제24장[ㅳ]・제25장[ㅯ]・제30장[ㆎ]・제35장[ㄽ]・제39장[ㅰ]・제52장[ㅖ]・제56장[ㅬ]・제68장[ㅚ]・제69장[ㅟ]・제72장[ㄼ]・제82장[ㅺ]・제83장[ㅢ]・제91장[ㅨ]・제116장[ㅶ] 조규태,《용비어천가》, 한국문화사, 2007, 22~220쪽. 등이다.
훈민정음 반포 후 추가된 《증입언문》이 있었다면 현존하는 《용비어천가》는 《증입언문》을 사용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증입언문》이 세조 2년(1456)에 완성된 것이고 세종 29년(1447) 10월 16일 군신에게 내려 주었다는 《용비어천가》에 언문이 있었다면 현존하는 《용비어천가》의 언문과 같지 않을 것이다. 조규태가 《용비어천가》초간 후쇄본과 제1차・제2차・제3차 중간본을 비교한 표를 보면 간행 시기에 따라 《용비어천가》에 있는 우리글 표기가 조금씩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조규태,《용비어천가》, 한국문화사, 2007, 17쪽.
세조 2년(1456) 6월 2일 성균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고 4일째 되는 6월 6일 세조는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하였으며, 소장하던 책을 예문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사육신의 사형집행은 세조 2년(1456) 6월 8일에 하였다. 왜 세조는 성삼문 등을 죽이기 전에 집현전을 파하고 소장하던 책부터 예문관으로 옮겼을까?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세종 29년(1447) 10월 16일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다. 이날 《용비어천가》5백 50본을 신하들의 개인 소장용으로 주었다는 말일까?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준 16일은 조회가 있는 아일이다. 그러니까 이날 군신에게 내려준 《용비어천가》는 신하들이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다시 보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시에는 종이가 너무나 귀했다. 종이가 얼마나 귀했는지 세조 7년(1461)의 기사를 보자.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종이를 만드는 자가 국가의 긴요한 문서(文書)와 서책(書冊)을 많이 훔쳐서 도로 새 종이를 만드니, 이 때문에 종이의 품질이 거칠어서 오래 전할 수가 없는데(…),
《세조실록》 세조 7년(1461) 9월 1일
이렇게 귀한 종이로 만든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 준 것은 군신 개인용으로 준 것이 아니라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용으로 하여 비각에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만 사용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세조는 재위 6년(1460) 3월 14일 전국의 서책을 거두고 판본도 살펴보도록 승정원에 명하였다. 이때부터 안평대군・성삼문・임원준 세 사람의 이름이 있는《용비어천가》는 조선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예문관(藝文館)의 서책(書冊)은 반드시 문신(文臣)들이 열람(閱覽)하기 때문에 혹은 파손되기도 하고 혹은 유실되기도 하니, 정원(政院)에서 속히 일을 맡길 만한 자를 골라서 국(局)을 설치하고, 온 나라의 여러 책을 거두어 모아서 먼저 총목(摠目)을 기록하여, 1건(件)은 견고히 간수하되, 탈간(脫簡)과 낙자(落字)를 상고하여 수보(修補)하고, 또 판본(板本)이 있는 곳도 상고하도록 하라.”
《세조실록》세조 6년(1460) 3월 14일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간경도감은 세조 때 불경의 국역과 판각을 관장하던 관립기관이다. 세조 7년(1461) 6월 16일 설치하여, 성종 2년(1471) 12월 5일 혁파까지 10여 년간 존속하였다. 세조는 대군 때부터 불교를 좋아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엔 왕위찬탈 때 죽인 수 백 명에 이르는 분들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더욱 불교에 심취했을 것이다. 간경도감에는 도제조・제조・사・부사・판관 등의 관료가 있었다. 그들은 간경도감을 관장하고 실제 판각 작업은 절의 중들이 담당하였다. 간경도감에서 세조 9년(1463) 9월 2일에 《법화경》을 간행하였다.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관료들이 중들을 시켜 2년 동안 한 일이 고작 《법화경》만 간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관립으로 관료들이 동원된 것은 《법화경》보다 먼저 《용비어천가》 목판본을 간행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용비시>의 저자를 안평대군・성삼문・임원준에서 권제・정인지・안지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세조 8년(1462)에 서적을 다 실어 와서 문학을 아는 종친 등으로 하여금 고열하게 하니, 잘못된 것이 많았다는 것은 《용비어천가》에 있는 6선조의 기록일 것이다.
처음에 예문관(藝文館)에서 문신(文臣)과 성중관(成衆官) 등을 모아서, 행상호군(行上護軍) 양성지(梁誠之)를 제조(提調)로 삼아 서적(書籍)을 간행(刊行)하게 하였었다. 이때 이르러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명하여 예문관에 가서 그 서적(書籍)을 다 실어 와서 문학(文學)을 아는 종친(宗親) 등으로 하여금 고열(考閱)하게 하니, 잘못된 것이 많았다.
《세조실록》 세조 8년(1462) 1월 28일
이렇게 양성지가 주축이 되어 지은이가 수정된 《용비어천가》를 간경도감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을 것이다. ‘문학을 아는 종친 등으로 하여금 고열하게 하였다’는 것은 안평대군이 지은 선조들의 역사도 일부 수정한 것은 아닐까? 수정 전 《용비어천가》는 활자본으로 언문청에서 경오자로 간행하였으리라.
김종직은 세조 8년(1462) 6월 10일에 행승문원박사 겸 예문봉교로 발령받았다. 그는 세조 10년(1464) 7월 23일에는 감찰이다. 그러므로 《용비어천가》의 수정과 수정한 《용비어천가》의 간행은 세조 7년(1461)에서 세조 8년(1462) 사이에 이루어졌고, 수정된 《용비어천가》와 일치하게 하는 《세종실록》의 수정은 세조 8년(1462)에서 세조 9년(1463)사이에 하였다. 수정된 《세종실록》을 상고하는 날 세조는 어떻게 하였을까?
좌의정(左議政) 권남(權擥)・중추원사(中樞院使) 최항(崔恒)・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에게 실록(實錄)을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攷]하게 하였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명하여, 가서 주악(酒樂)과 절화(節花)를 내려 주게 하고, 어찰(御札)로 말하기를, “원훈(元勳)에게 주악(酒樂)과 절화(節花)를 내려 줌은 경(卿)들에게 서적을 종일토록 상고하게 하려 함이요, 나는 한자[一字]라도 상고하지 못하게 함이다.” 하고,(…)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3월 29일
《세종실록》을 수정하는 일에 참여한 예문봉교 김종직은 <용비시>의 작가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가 날조되었음을 알리는 비밀코드를 심어놓았다. 《세종실록》의 세종 27년(1445) 4월 5일 3번째 기사에는 예문봉교 김종직의 6개의 비밀코드가 있다.
贊厽+人⦁厽+人⦁爪⦁烏⦁客⦁卿
다음은 세종 27년(1445) 4월 5일의 제목 ‘권제・정인지・안지 등이《용비어천가》 10권을 올리다’에서 《세종실록》 원문을 발췌한 것이다.
○ 議政府右贊成權踶 ①(右贊參)〔右參贊〕 ②(厽+人)[參]鄭麟趾 (…) 周詠緜 ③(爪)〔瓜〕 (…) 商歌玄 ④(烏)〔鳥〕(…) 雖未極其於 ⑤(客)〔容〕 (…) 用之 ⑥(卿)〔鄕〕用之國, 至永世而難忘. 所撰歌詩摠一百二十五章, 謹繕寫裝潢, 隨箋以聞.命刊板以行.
원문에서 발췌한 한자 중에 ()안에 있는 한자와 []안에 있는 한자를 비교해보자. ()의 한자는 《세종실록》의 원문에 있는 한자이고 []안에 있는 한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세종실록》을 번역하면서 앞에 있는 ()의 틀린 한자를 바르게 수정한 한자다. 그르므로 수정한 글자가 문맥상 맞는 한자이고 바로 앞에 있는 한자는 문맥상 맞지 않는 한자이다. 물론 예문봉교 김종직이 써넣은 환자는 앞에 있는 ()안 글자이고 뒤에 있는 []의 글자가 아니다. 그는 왜 이처럼 틀린 한자를 《세종실록》에 남겼을까? 그 의미를 추리해보자.
6개의 틀린 한자를 ‘비밀코드’라고 이름 지었다. ‘비밀코드’를 해독하기 전에 먼저 권제・정인지・안지의 나이를 알아보자. 권제는 1387년생이지만 세종 27년(1445) 4월 16일에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인지는 1396년생이요 안지는 1377년생이다. 따라서 이때가 만약 세조 9년(1463)이라면 정인지의 나이는 68세요 안지는 87세다. 두 사람은 노안이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을 나이다. 40대에 노안이 오는 경우도 있다. 붓으로 쓴 글자라 좀 크다고 해도 한자는 획수가 많고 사람마다 글씨체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의 해당 기사의 초안을 그들이 보았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아니면 예문봉교 김종직은 전임 사관이니까 바른 것과 틀린 것 2가지의 초안을 준비하여 마지막에 바꿀 수도 있었을 터이다. 《세종실록》은 처음에 1부를 만들고, 이를 인쇄하여 춘추관, 성주, 충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김종직의 첫 번째 비밀코드는 우참찬 정인지를 우찬참 정인지로 한 것이다. 이렇게 글자가 바뀐 것처럼 <용비시> 저자 세 사람이 바뀌었으며, 이렇게 바뀌게 한 사람은 세조의 명령을 받은 정인지라는 암호일 것이다.
두 번째 비밀코드는 삼(參)을 厽+人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세 사람이라는 의미로 권제・정인지・안지를 뜻하는 기호일 것이다. 모(厶)는 아무(=某)라는 뜻도 있다. 厽+人은 지금은 한자사전에 없는 글자다.
세 번째 비밀코드의 조(爪)는 손톱이다. 사서오경을 공부하여 문과에 합격한 김종직이다. 김종직이 손톱을 뜻하는 조(爪)와 참외를 뜻하는 과(瓜)를 구별도 못 하는 인물일까? 그렇지 않다. 면과(緜瓜)는 시경 대아(大雅)편 제1문왕지습(文王之什)의 면(緜:길게 뻗음)에 있는 시구 면면과질(緜緜瓜瓞)에 있다.金學主 譯著, 《新完譯 詩經》, 明文堂, 2007, 532쪽. 과질은 종손과 지손 등 자손의 번성을 비유한 말이며, 면면과질장은 주나라가 처음에는 매우 작았으나,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커진 것을 노래한 것이다.《성종실록》성종 13년(1482) 8월 11일 3번째 기사의 주[註 12550].
네 번째 비밀코드는 까마귀 오(烏)자다. 시경 상송(商頌)에 있는 제비[현조(玄鳥)]의 새 조(鳥)를 까마귀 오(烏)로 표기했다. 오(烏)는 ‘검다’라는 뜻도 있다. 지금도 정직하지 않고 속이 엉큼하고 흉측하거나 정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을 ‘속이 검다’라고 표현한다. 중국도 ‘흑(黑)’은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심흑(心黑)한 사람’은 마음속이 시커멓기 때문에 매우 비양심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다섯 번째 비밀코드는 나그네 객(客)자다. 얼굴 용(容)자를 나그네 객(客)으로 둔갑시켰다. 한자사전에서 ‘객(客)’을 찾으면 ‘주장(主張)이 아닌, 개적은’이라는 뜻도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비밀코드는 경(卿)자다. 향(鄕)자를 경(卿)이라 했다. 卿은 임금이 2품 이상의 신하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다. 이른바《용비어천가》를 올릴 적에 직급이 제일 낮은 안지가 종2품 공조참판이다. 따라서 세 사람 모두 2품 이상의 경(卿)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이처럼 여섯 가지의 오류를 남긴 것은 실력이 없는 사관의 행위가 아니다. 보통 사관보다 실력이 월등하면서도 죽음까지 각오한 올곧은 사관의 거룩한 행위다. 틀리게 기록한 爪⦁烏⦁客⦁卿 네 글자는 瓜⦁鳥⦁容⦁鄕 네 글자보다 하나같이 일획이 모자란다.
틀리게 기록한 厽+人⦁爪⦁烏⦁客⦁卿 다섯 글자를 합하여 풀이하면 어떻게 될까?. 직역하면 “세 사람은 손톱이 까마귀처럼 새까만 나그네로 경들이다” 이것을 의역하면 “세 사람은 비양심적인 경들로 이들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우찬성 권제・우참찬 정인지・공조참판 안지가 《용비어천가》에 있는 1장에서 125장의 <용비시>를 지은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전임 사관이었던 예문봉교 김종직은 목숨을 내놓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김종직이 목숨을 내놓고 진실을 기록한 뜻을 모르고 지나왔다.
성종 16년(1485)에 완성한 《경국대전》을 보완하여 성종 22년(1491)에 완성한 책이 《대전속록》이며, 이 《대전속록》을 다시 보완하여 중종 38년(1543)에 완성된 법전이 《대전후속록》이다. 이 책에는 전에 없던 법령이 하나 추가되었다. 서책을 인출하는 일에 참여한 관리들은 한 권에 한 자의 오자가 나오면 곤장 30대를 맞았고 다섯 자 이상이면 파면되었다. 강명관, 《조선시대의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상상, 2014, 250쪽. 비록 김종직의 기록은 《대전후속록》이 시행되기 전이지만, 《용비어천가》 전(箋)에 있는 오자(誤字)는 단순한 오자가 아니다. 그것도 한 권에 한 자가 아니라 한 전에 무려 다섯 자의 오자가 아닌가. ‘右參贊’을 ‘右贊厽+人’으로 하여 두 글자를 서로 바꾸었으니 실제로 틀린 것은 6개다. 진실로 김종직의 오자는 생명을 담보한 의도된 오자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우찬성 권제・우참찬 정인지・공조참판 안지 등 세 사람의 이름으로 수정한 《용비어천가》를 중국 사신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중국(中國) 사신(使臣)이 경과(經過)하는 곳에는 무릇 우리 조정(朝廷)에서 찬수(撰修)한 서적(書籍)과 고문(古文)의 안에 우리나라 사람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있는 것은 거두어서 갈무리해 두고, 〈그들로〉 하여금 이를 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2월 22일
다음은 <용비시>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임원준이 김종직과 함께하는 모습이 있는 기록이다. 이것을 보아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임원준은 <용비시>의 제작과정을 김종직에게 토로했을 것이다. 비밀코드를 적은 사람이 꼭 김종직이 아니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김종직이 아니라 해도 다음에 나오는 젊은 문신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김종직이 비밀코드를 심었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용비어천가》의 진실을 밝혔다고 칭찬할 것이다.
양성지와 임원준 등에게 명하여 여러 학문(學門)을 나누어, 학문에 6인을 두고 나이 어린 문신(文臣)을 여기에 배정하였는데,(…) 사학문(史學問)에 김계창(金季昌)・김종련(金宗蓮)・최숙정(崔叔精)・유휴복(柳休復)・김양전(金良㙉)・김종직(金宗直)이고, (…) .
《세조실록》 세조 10년(1464) 7월 27일
조선 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는 무오사화다.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의 사초 때문에 일어났다. 이때 성종 23년(1492) 8월 19일에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했다.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임원준의 손자 임희재도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임희재 또한 김종직의 문인이고 보면 이들의 인연은 깊고도 슬프다.
※ 그림 : 김종직 비밀코드를 표시한 세종 27년(1445) 4월 5일의 《세종실록》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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