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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반달곰의 지혜
남천교 청연류(南川橋 晴烟樓)의 모습입니다.남천교 저쪽 건너편은 동서학동이고 그 반대편은 한옥마을 교동(校洞)입니다. 그 사이로 전주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곡선모양의 아치형다리가 운치를 자아냅니다.
전주천변의 억새풀은 가을에 보는게 장관인데 흰눈이 내린 전주천 둔치의 억새풀도 볼만합니다.
이곳은 관광객들로부터 갈수록 인기를 많이 얻고있는 오목대(梧木臺)누각입니다.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중의 한곳이 되었습니다.
오목대(梧木臺)는 역사적으로 사연이 많은 관광명소로 간단히 소개를 해드리자면
1380년(고려우왕 6년) 남원 운봉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왜구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물리쳐 황산대첩(荒山大捷)을 승리로 이끈후에 전주에 있는 오목대(梧木臺)에서 잔치를 열어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마치 쓰러져 가는 고려왕조를 비웃는 듯했었고 , 또 자기의 웅대한 포부를 말하는 하였다고 하는군요. 이를 듣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의 종사관이었던 정몽주(鄭夢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고덕산 자락의 남고산(南固山 273m)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 과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주 산천조(全州 山川條)"에서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만경대 암각서(萬景臺 巖刻書) 에 새겨진 정몽주의 우국시(鄭夢周 憂國詩)
"천길 바위머리 돌길을 돌고 돌아 , 나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靑山)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夫餘國)은 누른잎이 어지러이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도다
구월(九月) 소슬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이 깊은데 백년(百年)기상 호탕함이 서생(書生)을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지고 뜬 구름 덧없이 뒤섞이는데 하염없이 고개들어 송도만 바라보네."
정몽주의 우국시는 몇번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나라의 흥망성쇄,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것 같습니다.
학인당(學人堂)마당에 있는 눈사람가족을 정면으로 한컷 찰영해 봤습니다. 오른쪽은 아빠 ,엄마 눈사람이고 , 왼쪽은 큰애와 작은애를 표현한 눈사람같습니다. 눈사람 얼굴에 검정테이프로 이목구비를 표현하면 얼굴 윤곽이 더욱 명확해져 더욱 재미있을것 같다는 생각은 자꾸드는데, 조그만 아기 눈사람은 다시봐도 귀엽고 예쁘네요.
학인당(學人堂) 앞마당은 상당히 넓고 연못도있고, 우물도 있고 매년 10월초쯤에 전주소리문화축제때는 근대식 한옥건물 안밖에서 다양한 한국전통공연을 엽니다.
가야금, 판소리, 시조창, 대금,소금연주...등등 다양한 공연을 합니다.
전주한옥마을내 교동(校洞)지역의 한옥군락의 모습이며 가운데 남천교 청연루(南川橋 晴烟樓 )가 보이며 오른쪽에 멀찍이 설산(雪山)의 풍경으로 아름다운 완산칠봉(完山七峰 완산공원)이 보입니다. 오른쪽부분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듬성듬성 보이기는 하는데, 전주한옥마을 변천사를 보면 1977년 박정희에 의해 전주 풍남동 ,교동의 한옥군락은 " 한옥보존지구"로 묶이게 되어 재산권행사를 할수 없게 되었으나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반에 지역경제활성화명분으로 전주시가 개발 규제를 풀어서 한옥들이 헐렸고 그자리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풍남동,교동의 한옥군락이 도심속에 있는 데다가 전주 최대 번화가 거리인 고사동 객사거리와 시내버스로 1-2정거장밖에 안될정도로 가까워서 개발유혹을 억제하기는 어려
웠을것입니다. 그당시에는 도심속에 있는 풍남동 ,교동의 한옥군락 지리적 위치때문에 개발로 인한 존폐위기를 겪기도 했기만 , 2009년도 부터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주한옥마을이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된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주시가 전주한옥마을 옆에 전주에서 제일 높은 36층짜리 초고층 아파트를 여러채를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전주한옥마을의 전체미관이 훼손될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전주시가 전주한옥마을 옆에 초고층 아파트 36층짜리 여러채를 왜 지으려는지 워낙 비상식적이라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조만간에 한옥마을 옆에 초고층 아파트 36층짜리 지어놓고 "전통과 현대(첨단)의 조화"가 있는 도시 전주라고 미화 할것 같습니다.
교동(校洞)지역 은행로에 자리한 한옥가게인데 흰눈 내린모습은 모두 예뻐보입니다.
전주 풍남문(豊南門)의 모습인데,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東學農民革命軍)이 전주 완산동 완산칠봉(完山七峰)과 용머리고개에서 전주관군(全州官軍)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승리한후에 전주부성 4대문중에 한곳인 풍남문(豊南門)을 통해 들어와서 집강소도 설치하고 전주로 입성했다고합니다. 현재는 풍남문(豊南門)만 남아 있고 나머지 전주성곽(全州城郭)은 일제시대때 철거되었고 풍남문만 남았습니다. 풍남문(豊南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풍남문(豊南門)은 고려말 1389년에 축조되었는데,지금의 풍남문으로 불린 건 채 250년이 안된다고 하는군요.
지난 1768년, 당시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화재로 불탄 성문을 중건하며 새로 붙인 이름이 풍남문(豊南門)이랍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을 강조하기 위해 한나라 고조의 고향인 풍현(豊縣)과 패읍(沛邑)을 빗댄 이름이라는데.조선시대 고지도 등을 보면, 풍남문의 본래 이름은 전주 남문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전주 객사(客舍)는 풍남문(豊南門과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지난 1606년 명나라 대신 주지번(朱之蕃)이 전주객사에 들렀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글씨를 써서 걸어두었답니다.
풍패(豊沛)는 중국의 풍현(豊縣)과 패읍(沛邑)을 빗댄것이며 역시 한 고조의 고향을 뜻하며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데,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본향을 높여 부르기 위해 중국의 한고조 유방(劉邦)의 고향인 풍패((豊沛)에 빗대었다고 하는데, 전주한옥마을을 이루는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에서 풍남동(豊南洞) 역시 풍남문(豊南門)의 풍남(豊南)의 한자가 동일합니다.
분명한것은 전주는 중국의 풍패((豊沛)와 관련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사진은 전주한옥마을 풍남동(豊南洞)지역의 한옥군락 설경입니다. 시야가 확트이는게 너무 아름답습니다.
저멀리 왼쪽의 전주 완산칠봉(完山七峰 완산공원)의 산등성이와 가운데 다가공원(多街公園) 오른쪽의 화산공원이 보입니다. 전주한옥마을은 태조로(太祖路)가 한옥마을의 중심을 관통하는 메인 도로인데,
태조로를 중심으로 리베라 호텔이 있는 전주시내쪽 방향은 풍남동(豊南洞) 한옥군락이고 그 반대방향은 교동(校洞)한옥군락으로 오목대(梧木臺) 누각과 전주향교, 학인당(學忍堂), 전주천, 남천교 청연루(南川橋 晴烟樓 ) 등이 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풍남동과 교동지역의 한옥군락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곳은 전주한옥마을 교동에 있는 학인당(學忍堂)인데 정문안쪽의 모습입니다. 눈내린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학인당(學忍堂)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님이 묵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백범김구(白凡 金九)선생님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옥의 팔작지붕위에 쌓인 눈이 모습이 운치가 있고 멋있습니다. 윗쪽 가운데 규모가 큰 기와지붕건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東學農民革命記念館)"입니다.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입니다.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했다고 합니다. 비잔틴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의외로 인기가 많은 성당입니다. 전동성당이 타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상당히 뜨거운 인기명소로 떠오른것에 전주시민들조차 많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이 100여년전에 세워진뒤로 이렇게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기때문입니다.
전주한옥마을 교동에 있는 한옥으로된 가정집의 모습입니다. 마당에 눈이 많이 내린 모습이 고요하고 보기좋습니다. 바둑이 한마리 키우기에 참 좋은 앞마당입니다.
전주한옥마을 교동(校洞)지역의 한옥들이 운치가 있습니다. 이곳은 남천교 청연루(南川橋 晴烟樓)가는 입구에서 본 풍경입니다. 남천교(南川橋)는 한옥마을 교동과 동서학동을 연결해주는 아치형의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저 마당위에 잣나무와 능소화(凌霄花) 덩쿨 나무가 서로 껴안듯이 붙어 있어서 " 사랑나무"라고 부른답니다. 오른쪽 한옥가게를 " 사랑나무집"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저 사랑나무 앞에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답니다.
이곳은 전주한옥마을 교동(校洞)지역의 한옥군락의 설경(雪景)모습입니다. 저멀리 왼쪽의 남천교(南川橋)와 수묵화(水墨畵)처럼 희미하게 설산이 장관을 이루는데, 전주 완산칠봉(完山七峰)은 완산공원(完山公園)이라고 합니다.
전주완산칠봉(完山七峰)은 구한말때 전봉준장군(全琫準將軍)이 이끄는 동학농민혁명군(東學農民革命軍)과 전주관군(全州官軍)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역사유적지이며 동학농민혁명군이 승리한후에 전주 4대문중에 하나인 풍남문(豊南門)을 통해 전주부성(全州府城)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눈내린 지붕의 모습이 아주 예쁜데, 한옥옆에 옆에 길은 빙판길이라 걸을때 넘어지지않도록 주의해야 할것같습니다.
교동(校洞)에 있는 전주동헌(全州東軒)의 고풍스런 한옥의 설경(雪景)입니다. 전주동헌(全州東軒)에서 맨 왠쪽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전통문화연수원 한옥이 펼쳐집니다.전주동헌(全州東軒)과 전통문화연수원 옆에 전주향교(全州鄕敎)가 있으며 그맞은 편에 전주 완판본 문화관(全州完板本 文化館)이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교동(校洞)지역의 한옥의 모습입니다. 어두워지는 초저녁의 눈내린 한옥들의 모습은 제법 운치가 있고 스산한듯하며 기묘(奇妙)한 느낌을 주는듯합니다.
전주한옥마을 교동(校洞)지역에 유일하게 조성된 초가집입니다. 초가(草家)지붕위로 많은 눈이 내렸는데, 눈내린 기와지붕이 있는 한옥과는 달리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앞에 돌담과 초가집이 잘어울리는 것같습니다.
오른쪽 팻말에 " 전주한옥마을 둘레길(숨길)"이라고 씌어있는데, 북쪽방향으로는 오목대(梧木臺) 누각 산언덕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동쪽방향으로는 전주향교(全州鄕敎)와 한벽당(寒碧堂) 가는 방향으로 이어져있습니다.
전주남천교 청연루(南川橋 晴烟樓 )누각의 모습입니다. 눈내린 청연루(晴烟樓) 누각의 하얗게 된 지붕과 해가져서 찾아오는 어두움에 초록색 신호등이 대비(對比)를 이뤄 밝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교동지역의 한옥군락 모습인데 저멀리 완산칠봉((完山七峰 완산공원)의 구도심속 산자락과 그 앞으로 성심여중,성심여고 학교건물이 보입니다. 학교 건물의 옥상을 기와지붕으로 했으면 더욱 운치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왼쪽의 황금빛 가로등이 주변의 흰눈과 잘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뒤에 보이는 산언덕으로 올라가는 공원이 있는데 , 그 산언덕은 아주 아주 오래전에 조그만 달동네가 있어서 낡은집들이 다닥다닥 산위까지 있었는데 , 전주시에서 도시환경미관정비로 그 달동네는 철거(撤去)되었고 현재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가 저 산언덕위에서 찰영되기도 했습니다.
한옥들이 운치있고 멋스러운데, 오른쪽에 맨위에 고덕산 (高德山)자락인 후백제(後百濟)의 산성(山城)으로 유명한 남고산성(南固山城)의 성벽(城壁)이 보입니다.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전남 나주(羅州)에서 서울과 가까운 전북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고덕산(高德山)자락에 길이 5.5km의 산성(山城)을 쌓아놓았습니다. 산성의 둘레길이 5.5km는 전주역에서 전주한옥마을까지 공간적 길이도 5.5km이므로 상당히 규모가 큰 후백제(後百濟)시대 산성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에서도 산위의 성벽(城壁)이 보일정도로 한옥마을에서 비교적 가까운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 풍남동(豊南洞)지역의 한옥군락의 모습입니다. 한폭의 수목화(水墨花)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의 영혼(靈魂)을 모시며 제사를 지내는 궁전급 규모의 사당인 경기전(慶基展)입니다. 앞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있는데, 홍살문이 붉은 색이고 끝이 창처럼 뽀족한 이유는 잡귀(雜鬼)나 악귀(惡鬼)같은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위함 풍수(風水)적인 무기(武器)라고합니다. 홍살문(紅箭門) 가운데 삼지창(三枝槍)과 태극문양(太極紋樣)을 넣은게 돋보입니다.공자를 모시는 전주향교 앞에도 홍살문이 있습니다. 흰눈과 홍살문의 붉은 색채가 기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차갑게 느껴지는 흰색과 뜨겁게 느껴지는 붉은색의 조합은 거의 상극(相剋)인데 태조 이성계의 영혼을 모시는 신전(神展)분위기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묘가 있는 전주 건지산(乾芝山)에 있는 조경단(肇慶壇)에도 홍살문(紅箭門)이 있습니다.
경기전(慶基展)은 역사드라마" 용의 눈물" 찰영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한옥의 나무간판과 한글글씨가 한옥과 아주잘어울립니다. 플라스틱간판이나 네온싸인 간판보다는 자연재질의 간판이 더욱 한옥과 잘어울리고 보기가 좋습니다. 왼쪽의 뒷산은 오목대(梧木臺)로 올라가는 누각입니다.
한옥마을 교동(校洞)지역의 한옥군락의 모습들이 저 뒤에 보이는 눈덥힌 승암산(僧岩山)과 어울려 운치있는 풍경을 자아냅니다. 저 치명자산(致命者山) 이라고 불리우는 승암산(僧岩山) 기슭에도 4개의 달동네가 있습니다. 오목대 (梧木臺)누각에서 기린대로 위 육교를 건너가면 , 자만(滋滿)벽화마을, 그 옆에는 옥류마을 , 옥류마을에서 군경묘지(軍警墓地
), 견훤(甄萱)왕궁터쪽으로 가면 낙수정(樂水停)마을이 있고 , 자연생태체험관과 천주교순례지인 치명자산(致命者山) 성당가는 산기슭에는 승암(僧岩)마을이 있습니다. 요즘 전주한옥마을이 주목을받으면서 주변에 있는 4개의 달동네도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옥마을 교동(校洞)에 있는 학인당(學人堂)의 마당모습인데, 여러개의 눈사람들이 인상적입니다. 큰 눈사람도 있지만 가운데 아이를 표현한 작은 눈사람이 있는데, 행복하고 단란한 눈사람가족을 표현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운데 조그마한 아이 눈사람은 귀엽기까지합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학인당(學人堂) 넓은 앞마당에 진돗개 3마리가 살았었는데, 진돗개 3마리가 어디로 갔는지 요즘 안보이는 군요.
한옥마을 교동(校洞)에 있는 거주용 2층 한옥인데, 한번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곳은 은행로와 향교길, 학인당(學人堂)길 남천교 청연루가는 4거리의 교차점입니다. 기와지붕에 흰눈은 그 어떤 건물이라도 멋이 있습니다.
한옥마을 교동(校洞)의 학인당(學忍堂)의 정문앞에서 본 모습입니다. 길앞에는 빙판이 되어서 미끄러우므로 걸을때는 많이 주의해야 할것 같습니다.
‘白樂中之閭(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전형적인 고가풍의 건축물입니다,
학인당(學忍堂) 안쪽의 다른 각도에서본 눈사람의 모습입니다. 눈사람을 만들어놔서 근대한옥의 운치가 더욱 멋있는 것 같습니다. 눈사람의 눈을 검정 테이프로 붙인것이 아닌 눈튀어나온 맹꽁이나 망둥어 처럼 눈을 뭉쳐서 붙인것 같은데, 진짜 귀여울 정도입니다.
학인당(學忍堂)이 궁중 건축양식이 민간 주택에 도입된 전형적인 예라 할정도로 유서가 깊은 곳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태조로 4거리에 있는 물레방아 모습인데, 겨울에는 물이 얼기때문에 물레방아는 한동안 돌아가지 않고 휴면(休眠)에 들어간듯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춥게 느껴지지만 한옥가게의 황금빛 등이 비추는 모습이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풍남동(豊南洞)의 한옥군락은 마치 한옥마을 풍경을 붓으로 그린듯한 수묵화(水墨畵)를 보는 듯한데 , 오른쪽에 걸어다니는 사람들 또한 수묵화의 일부가 된듯보입니다. 오른쪽에 걷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름이 한지(韓紙)길입니다. 한지(韓紙)를 제작하는 전주전통한지원으로 가는 길이라해서 지어진것 같습니다.
은행로 앞에 있는 한방문화(韓方文化)센터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등(燈)이 환하게 켜진 가게는 사과나무집 인형가게인데, 태조로 4거리 모퉁이에서 한방문화센터 옆으로 이전했는데, 지금 현재 모습이 더보기좋은 것같습니다.
학인당(學人堂) 마당에 있는 연못의 모습이며 그 안에는 예쁜 금붕어들이 살고 있고 그 옆에 깊은 우물이 있습니다.
전주 남천교 청연루(南川橋 晴烟樓 ) 누각의 모습입니다. 밑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곡선의 아치형 대리석 다리위에는 누각이 있어서 여름에는 솔찬히 시원합니다.
고덕산(高德山 603m)과 승암산(僧岩山 306m) 사이로 흐르는 전주천이 바람길 역활을 해서 전주천 상류에 자리한 전주한옥마을은 여름에도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덕택에 다른 시내지역보다 시원한 편입니다.
줄지어 있는 교동(校洞)지역의 한옥들이 제법 운치있고 예쁜데 , 주변에 자가용들만 없으면 더욱 멋진 풍경이 될것 같습니다. 눈내린 길이 낮에는 녹는듯하다가 해가 지면서 얼기때문에 평평한 길이지만 걸을때는 항시 주의해야합니다.
600년이상의 나이를 가진 전주한옥마을의 터줏대감이라고 할수있는 봉황(鳳凰)의 모양처럼 생긴 은행나무인데, 은행잎이 만발한 여름에 보면 마치 거대한 봉황을 보는 듯합니다. 저은행나무 앞에 가운데에 증손자은행나무도 자라고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1392년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세워진후로 지금까지의 600년 기나긴 역사를 다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될 봉황은행나무입니다.위 은행나무를 보면 왼쪽의 큰가지가 봉황(鳳凰)의 머리이며 가운데는 날개와 발이며 맨 오른쪽에 큰가지는 봉황(鳳凰)의 꼬리에 해당합니다.
은행나무는 정말 단단하면서도 벌레도 먹지않고 태풍이 불어도 잘 부러지지않고 불로장생하는 나무입니다. 전주시내에 은행나무가로수가 많은데, 2012년 여름에 태풍볼라벤이 불었을때 거리의 다른 나무들은 부러지고 뽑히고 그랬는데, 은행나무들은 잔가지조차 부러지지않고 대부분 멀쩡했다고합니다.
흰눈이 기와지붕에 적당히 내린 한옥들도 그나름대로 멋이 있습니다.
은행로 길위에 굽이 굽이 물이 흐르던 쌈지천 물길에는 더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흰눈만 쌓여 있습니다. 산언덕에 자리한 오목대(梧木臺) 가는 계단 올라가는 길외에는 전주한옥마을의 길은 평평해서 다니기에는 불편한 점은 없으나 눈이 많이 내린날은 미끄러울수 있으므로 걸을때 주의해햐 할것입니다.
한옥가게들은 흰눈까지 뿌려져서인지 건물자체가 예술작품을 보는 것같습니다.
이곳은 전주천변가에 있는 교동(校洞)쪽 한옥인데 눈내린 기와지붕과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을보니 귀여운 진돗개가 나와서 손님을 반겨줄것 같습니다 아기자기한 마당이 있는 한옥이 예버 보입니다.
이 한옥가게의 간판도 나무재질로 해서 한옥과 잘 어울리게 해놓은것이 보기가 좋습니다. 한옥은 정말 자연친화적입니다.
이곳은 전주한옥마을 태조로(太祖路) 4거리입니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며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곳입니다. 복(福)자가 쓰인 상가용 한옥 건물뒤에 리베라호텔 빌딩이 보입니다.
서울 북촌한옥마을에 윤보선 고택(古宅)이 있다면,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인당(學人堂)이 있다고 할 만큼 격식을 갖춰 지은 집입니다.
학인당(學人堂)은 100년이 지난 대형 한옥으로 건축 당시에는 2000평의 대지에, 건평만 99칸의 집으로 지은 집인데,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과 오대산 (五臺山)등지의 우리 목재를 이용하여 2년 8개월 끝에 완공을 했다는 학인당(學人堂)은 당시 돈으로 백미 4000석(8000가마)을 들여 지었다는 학인당의 규모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정도입니다.
훗날 6.25 한국전쟁이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안채와 행랑채를 매각했다고합니다. 1970년대에는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거액을 제시하여 두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몇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백남혁부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전동한옥마을에서 서양건축물로는 유일하게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전동성당(殿洞聖堂)입니다. 3개의 타원형 종탑(鐘塔)에 각면마다 쌓인 타원형의 눈이 더해져 더욱 아름답고 멋있습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의 역사는 100년이상되며 천주교 순례지중에 한곳입니다.
세월을 머금은 전동성당 외벽의 빨간벽돌과 흰눈이 극명(克明)한 대비(對比)를 이루어서인지 더욱 장엄하고 웅장해보입니다. 요즘 전동성당은 유럽의 몇백년된 성당보다 더욱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 성당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전동성당 앞에서 인증샷하는 관광객들은 타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인데, 전동성당이 의외로 관광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이런 모습을 그 옆을 지나가다가 보는 전주토박이들은 자주 많이 놀라기도 하는 모습입니다. 예전부터 늘상보던 전동성당이 이렇게 관광명소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말이죠.
전동성당(殿洞聖堂)의 내부의 모습인데 빨간 벽돌과 흰색의 천장의 대비(對比)와 대리석 기둥장식부터 울긋불긋한 스테인 글라스에 이르기까지 솔찬히 화려합니다.
한옥마을 교동지(校洞)역의 은행로에도 눈이 많이 쌓였습니다. 오른쪽 쌈지천에 물은 흐르지 않고 눈이 가득쌓였습니다.
듬직해 보이는 잣나무와 호리호리한 몸매의 능소화(凌霄花) 덩쿨 나무가 서로 껴안듯이 붙어 있어서 " 사랑나무"라고 부른답니다. 두개의 나무 가지가 하나로 붙어있는 연리지(連理枝)보다 더욱 찐해 보입니다. 그리고 가게이름이 " 사랑나무집"이라는 로멘틱한 이름이 생겼습니다.. 저 사랑나무 앞에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답니다.
교동(校洞)지역의 유일한 초가집인데 얼핏보면 둥그런 움집처럼 보이기도하는데, 초가집나름대로 기와집과는 다른 분위기를 줍니다. 초가집뒤로 공원으로가는 산언덕이 있는데 ,길입구에 대나무들이 눈의 무게에 의해 휘어져 있습니다. 대나무는 원래 반듯하게 자라고 겨울에도 초록색을 유지하는데, 눈이 쌓여서 잠시 휘어질뿐 부러지지는 않습니다. 눈이 녹으면 다시 원래의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오른쪽 저멀리 승암산(僧岩山) 설경과 교동(校洞)지역의 한옥군락이 잘조화를 이루며 운치가 있습니다. 한옥과 자연풍경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승암산(僧岩山은 천주교순례유적지로서 치명자산이라고도 불리고 루갈다산이라고도 합니다.
해가져서 어두워지는때에 흰눈샇인 기와지붕과 창문을 통해보이는 노란둥그런 불빛 그리고 붉그스름한 색감이 묘(妙)한 대비(對比)를 이루는 한옥입니다.
초저녁에 보는 한옥의 모습 또한 기와집의 흰눈과 등불이 조화를 이뤄서 보기가 좋습니다.
기와지붕의 녹다가 만 흰눈 또한 어두워지는 저녁에도 운치가 있습니다.
교동(校洞)지역의 한옥군락의 모습인데 맨 왼쪽 멀찍이 전주천변 건너편에 동서학동의 " 국립문화유산원"이 보이고 , 왼쪽에는 전주교육대학교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전주 남천교청연루를 지나 후백제의 산성인 남고산성에 갈때는 " 국립문화유산원" 옆을 지나면 산성 벽화마을이 나오고 자동차가 다닐수 있도록 남고사(南固寺)가 있는 곳가지 넓은 길이 나있는데, 남고사까지 오면 남고산성에 다다랐다고 할수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