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맛과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떠나는 인문학 기행/전성훈
10월 인문학 기행은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전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한시대에는 원지국(圓池國),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으로 부르다가 서기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16년부터 전주로 불렀다고 한다. 전주로 떠난다.
천고마비의 계절처럼 아침 하늘은 맑고 높았다. 날씨가 조금 서늘하니 옷을 따듯하게 껴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전주를 소개해주는 여성 해설사의 낮은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인간 세상과는 달리 더없이 한가로웠다.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 논바닥에 늘어놓은 곳도 보이고, 볏짐을 모아 둥글게 말아서 싸 놓은 하얀 비닐포장도 보였다. 그런가하면 아직도 벼를 베지 않은 논도 있었다.
넓은 정안휴게소 주차장이 수많은 자동차로 빼꼭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려고 무리지어 등산을 가는 사람들, 단풍놀이 가는 행락객들이 넘치고 넘쳤다.
그동안 몇 차례 전주에 다녀왔다. 오래전 성당 친구와 부활절을 맞이한 기념으로 성지 순례에 나섰다.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전주 전동성당을 찾았다. 부활절이 지난 평일이라서 성당 안에는 신자들이 없었다. 조용히 성당 의자에 기대어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 내 신앙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 10대 동정부부 성인을 기리는 ‘치명자산’을 오르며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2014년 봄에는 아내와 여동생과 통영, 거제도, 부산을 거처 하동, 순천, 남원을 구경하고 전주 한옥마을을 찾았다. 유명하다는 ‘왱이 콩나물국밥’집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평소보다 상당히 늦은 아침이라 배고픈 참에 눈 깜빡할 사이에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아이들이 유럽배낭 여행을 떠난 그 해 여름, 아내와 둘이서 오붓하게 남해안에서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전주비빔밥을 먹으려고 전주에 들리기도 했다.
여행지나 관광지 또는 유적지에 대한 인상이나 추억은 개인마다 다르다. 개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느낌이 엇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전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전주에 대한 느낌이 사람마다 어떻게 서로 다를까? 어떤 이들은 전주의 아름다운 고옥인 한옥마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전주를 대표하는 먹거리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전주한정식에 막걸리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주이씨 후손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천주교 신자라면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인 전동성당과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 동정순교자 부부를 기리는 ‘치명자산’을 생각할 수 도 있다.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물씬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고장 전주, 어머니의 정갈한 손맛을 느끼며 옛 정취에 푹 빠져들게 하는 고향 같은 전주, 전주는 다정한 이름이자 친숙한 고장이다.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 관광버스는 오전 10시 20분경 전주 풍남문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현지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오후 3시까지 걸으며 전주 한옥마을을 탐방하였다. 탐방순서는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쪽 출입문 풍남문(豐南門)에서 시작하였다. 풍남문에는 특이하게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 전주를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풍패(豊沛)에 비유한 것이다. 두 번째로 천주교 전동성당을 찾았다. 때마침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한복체험을 한다면서 퓨전한복을 입고 한껏 폼 내며 성당 앞에서 요란하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입을 크게 벌리라고 예전처럼 ‘김치’나 ‘치즈’하지 않고 ‘멸치아가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재미있는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조선 시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이들 순교자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보두네 신부가 땅을 매입하고 건립에 착수하여 1914년 완공한 것이 전동성당이다. 세 번째로 전동성당 옆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을 찾았다. 태조의 영정을 보면서 연기자 중에서 누가 이성계의 역할을 하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을까 생각해보았다. 어진의 전체적인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닮은 사람은 배우 송모씨 같았다. 오전 탐방을 마치고 기다리던 전주비빔밥 집으로 향했다. 제법 커다란 3층 건물의 음식점이었다.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지 종업원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비빔밥을 한 숟갈 떠 입안에 넣고 조금씩 씹어보니 맛이 시원찮았다. 진주비빔밥에 비하여 훨씬 못하였다. 기대를 저버린 음식점에 속은 듯 하여 씁쓸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이야기가 맞았다. 단체 손님을 많이 받는 곳이나 맛집으로 소문난 집은 대개 제대로 된 음식 맛을 맛볼 수 없었다. 고객보다는 돈벌이에 신경을 쓰는 장사꾼을 누군들 뭐라고 탓할 수 있을까?
길거리 가로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간다. 햇볕이 내려 쪼이는 나른한 오후 한옥마을 이곳저곳은 많은 여행객으로 시끌벅적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만나려 생가터, 최명희 문학관, 묘소를 찾았다. 최명희는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초중고대학을 전주에서 마치고 전주에서 죽었다. 전주를 벗어난 적이 없는 토박이 전주사람인 것 같았다. 전북대학교를 졸업한 그녀에게 전북대학교 측에서 학교수목원에 묘소를 제공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동향 사람을 발굴하고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외지사람을 불러들여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주는 일은 바람직하다. 탁월한 글 솜씨로 수많은 토속 어휘를 찾아내 작품 속에 녹여내어 뭇사람들에게 고향의 향수를 진하게 느끼게 했던 최명희, 50줄에 들어서 일찍 세상을 저버린 그녀는 이제 전설이 되어간다. 최명희 신화가 움트는 곳을 벗어나 전주향교를 찾았다. 전주향교 가는 길에는 몇 그루의 모과나무가 있고, 높은 가지에 까치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감나무도 꽤 많다. 향교에는 수백 년 된 은행나무 몇 그루가 늠름한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다. 남쪽 지방이라 그런지 은행나무는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 새빨간 열매가 가지마다 달려있는 커다란 산수유나무가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서리가 내리고 가을이 깊어져야 산수유열매의 그윽한 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전주이씨의 조상을 기리는 오목대, 이목대를 거쳐서 선비들이 교교한 달빛을 바라보며 시조를 읊었다는 한벽당(寒碧堂)을 찾았다. 오목대(梧木臺)는 1380년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 ‘이안사’가 살았던 이 곳에 들려 승전을 자축한 곳이다.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는 당시 전주 부사와 여자 문제로 불화를 빚어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함흥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이 훗날 이성계가 함경도 함흥을 본거지로 동북면 병마절도사가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문학 기행을 다니면 역사적 사건을 자주 접한다.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조상들의 지난 역사는 후세에게 타산지석의 거울이다. 권력을 두고 지배층간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모습은 오늘날 정치판에서도 판박이처럼 똑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사회에서 권력 투쟁이야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과거 인물들의 숱한 권력싸움의 폐해를 거울삼아 오늘을 사는 귀중한 인생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을 배우는 것은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의 하나다. 약방의 감초처럼 지역마다 다른 특색과 별미를 맛보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함께하는 이와 적절한 때를 만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바라보며 눈과 마음이 호사하는 덤까지 얻을 수 있다. 인문학 기행은 물론 혼자든 여럿이든 여행 그 자체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201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