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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꿈
-- 켄네쓰 왑닉 박사 --
* 설명 *
분홍 사각형 :
분열된 마음의 상태.
("그른 마음",
"바른 마음", 이 둘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결정권자")
파란 원 :
마음의
"결정권자"로서의
위치
녹색 사각형 :
에고의 꿈
= 은밀한 꿈
= 첫번째 꿈
빨강 사각형 :
세상의 꿈
= 두번째 꿈
* * * * *
꿈에는 두 수준이,
즉
“그른 마음의 꿈”과
“세상의 꿈”이 있습니다.
이제 곧 제가
인용할 구절에서는
이 두 개의
꿈이 언급됩니다.
“은밀한 꿈”,
“첫 번째 꿈”,
“그른 마음의 꿈”은
에고의 꿈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꿈을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세상의 꿈의
목적과 본성을
참으로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볼 때,
이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꿈의 목적이
우리를
마음없음의 상태로
유지시키고,
이 꿈을 계속
숨기는 것이라는 점을
정말로 이해한다면,
그럼 우리는,
왜 우리가 몸으로서
이토록 미치고
괴팍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특히 초기에
이 수업을 어느 정도
공부하고 나서,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반대로
행동하곤 합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는,
우리가
신의 한 아들로서,
세상을 만든 것과
똑같은 이유이고,
또 우리가
계속해서 단죄하고,
피해의식을
되풀이하고
피해자의 경험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읽을 문단은
텍스트 27장 마지막
즈음에 있습니다.
원서 574쪽,
11번째 문단의 중간이고요,
4번 문장부터 읽겠습니다.
“실재와
꿈들 사이의
간격은,
네가
은밀히 꾸는 꿈과
세상의 꿈 사이에
놓여 있지 않다.
그 두 꿈은
하나이다.”
(T-27.VII.11:4-5)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과 꿈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꿈”이란
몸을 가리키고,
“은밀한 꿈”이란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 둘은
똑같습니다.
왜 그것들이
하나이냐고요?
왜냐하면
“생각들은
자신들의 근원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W-pI.132.5:3)
마음과 몸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습니다.
그 간격은,
실재와 꿈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간격입니다.
실재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이 수직선이
바로 그 간격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고 미친 생각”이지요.
여기가 바로
문제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작고 미친 생각이
사실이라 주장하는
에고에게 귀를 기울였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자,
우리는
어떤 세상 속에서
자신이
몸으로 태어나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른 마음의
은밀한 꿈과
세상의 꿈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습니다.
그 둘은
똑같은 하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꿈”,
[세상의 꿈이란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꿈은
네가 내다 버리고는,
마치 그것이,
자체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보았던, 네 꿈의
일부일 뿐이다.”
(T-27.VII.11:6)
“세상의 꿈”이란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신체적,
심리적 몸으로서 겪는
경험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세상의 꿈”은
우리가 “내다버린”
은밀한 꿈의 투사물
입니다.
“내다버린다”는 것은
곧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라
부르는
개별적인 꿈과
이 우주라는 꿈,
둘 다
은밀한 꿈의
투사물입니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세상의 꿈은
네가 내다 버리고는
마치 그것이
자체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보았던
네 꿈의
일부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 세상을
지어내고 나면,
우리는 은밀한 꿈을
밖으로 투사시키고,
그러고는,
그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우리는 삶이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의 꿈속에서
시작하고 마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세상 자체의 시작이자
끝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의 꿈은,
은밀한 꿈에서
시작됩니다.
또 세상의
꿈의 끝 역시,
은밀한 꿈에
놓여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결정권자의 마음,
즉
꿈꾸는 마음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실 속임수입니다.
위장술입니다.
그것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서 감추려는
거대한 연막입니다.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이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세상의
목적이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과, 거기에
있는 문제들과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들에
그토록
매달리는 목적이란,
우리를
마음 없음의 상태에
영원히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목적이
모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십시오.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목적은
무엇이지?
내 질병의
목적은 무엇이지?
내 문제의
목적은 무엇이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이지?”
그 목적이란
바로 우리를
마음없음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없음의
상태라면,
내가,
마음이 없는
몸이라 한다면,
여기에 있는
(=도표의 파란원)
내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부분은
비어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가 비어 있다면,
나는, 내 마음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 세상의 꿈은],
“너의 은밀한 꿈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너는
이를 지각하고
있지 않다...”
(T-27.VII.11:7)
그래서 이 워크샵의 제목이
“무의식적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합니다.
<집단적인>
꿈으로서의 우주와,
각자의 <개인적인>
삶이라는 꿈도
포함하고 있는
세상의 꿈은, 마음의 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에고가 되겠다는
마음의 결심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네가 보고 있되,
사실이라 의심치 않는
그 부분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것,
[즉 은밀한 꿈] 이다.”
(T-27.VII.11:7)
이것이 얼마나
정교한 계획인지
아시겠죠?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이가 다, 이 계획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기적수업 학생들도
이 세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책이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에 있는 내용에 관해
논쟁을 벌이죠.
똑똑하냐구요?
아니요
똑똑하지 않습니다.
기적수업이란 책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럼 그들은
무엇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신보다
똑똑하다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줄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을 몸이라
여기거든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은밀한 꿈에 의해서
야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잊어버렸기에,
현재는
이를 자각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정신
분석학자의 목적은,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되게 만드는 것
입니다.
사실상
예수도 수업에서,
이 수업의 목적은
네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되게 만들어,
우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또 우리는,
우리가
마음 자체라는 것을
아는 것에 대해
자신이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적수업을 항상
우리 몸에 관한 이야기로
잘못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몸이
진짜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의 실재성을
의심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말씀드렸다시피,
몸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예수나
성령이나 하느님이
우리의
몸에 연루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또
내가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계획을,
한 몸으로서
다른 몸들을
치유하는
위대한 계획을,
예수가
세우게 할 수도
있겠죠.
물론
이 계획에서는
내가 핵심
이어야 합니다.
모든 이가
자신의의 무대에서
그런 것처럼 말이죠.
기적수업이란
몸을 이용해서,
그들을 치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이 모든 것이
세상 속에서
상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마음속에서
상연되는 것임을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적수업을 공부하고
적용해나감에 있어서,
수업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멀어지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 수업이
몸과 마음과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잘못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세상 꿈의 목적>은
<은밀한 꿈>을 감추는
것이고,
<은밀한 꿈의 목적>은
<꿈꾸는 자의 정체성>을
계속 숨기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에고의
은밀한 꿈을 선택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파란원은 이미
비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에고는, 세상을
지어냈습니다.
그리고 에고는
세상을 지어내기 전에,
죄와 죄책감과
두려움과 하느님의
처벌이라는
완전히
미친 이야기를
지어냈는데,
이 이야기의 목적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마음을 떠나고,
또 계속해서
마음을 떠나도록
선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에
끝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선택하고 있습니다.
헬렌이 기적수업을
받아 적는 동안,
빌 테트포드가 지금은
텍스트 4장에 실려 있는
질문을,
헬렌을 통해서 예수에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분리가 일어났습니까?”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지금 이 순간도, 너는
분리를 선택하고 있는데,
왜 굳이 너는
오래 전에 일어난
그 일의 이유를
묻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겠지만,
예수의 그 말은,
다시는 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너는 분리를 선택하고
있으면서,
왜 오래 전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의 이유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가?
이것이
우리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그럼 내가 왜 지금
분리를 선택하냐구요?
나는
“내”가 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개별적인 자아>가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 마음의 결정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나는
세상과 몸과
거기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지어냈습니다.
이것들은 내 주의를
외부로 고정시켜서
내부로 들어가지
않게 해주거든요.
“너는 잠에 빠져
세상의 꿈의 원인이
진짜라고 은밀히
꿈꾸고 있었는데,
어찌 네가 그것을,
[즉 세상의 꿈의 실재성을]
의심할 수 있었겠느냐?”
(T-27.VII.11:8)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에고의
그릇된 마음의 꿈을
계속해서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은밀한 꿈>은, 계속해서
<세상>을 일으키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
꿈을 꾸고 있는데,
이 꿈의 원인은,
억압된 마음을 따라서
무의식적인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단,
12번째 문단에서는
이 두 개의 꿈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세상의 꿈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너에게서
분리된 형제,
오랜 원수,
밤에 너를
몰래 쫓아다니며
너의
죽음을 꾀하되,
그 죽음이
천천히 진행되도록
꾸미는 살인자.
너는
이에 대해 꿈을
꾸고 있다.”
(T-27.VII.12:1)
사실 이것은,
모든 이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밤에
당신을 몰래 쫓아다니며
당신의 죽음을 꾀하되
그 죽음이 천천히
진행되도록 꾸미는
살인자란
궁극적으로
누구겠습니까?
그 살인자란
결국 신을 가리킵니다.
에고 버전의 신이지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결국에는 다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40년, 50년, 70년,
80년, 10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만,
결국에는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은밀한 꿈”에 대해
읽어보겠습니다.
여전히
12번째 문단이고요,
2번 문장입니다.
“그러나
이 꿈 아래에는
또 다른
꿈이 있으니,
이 꿈속에서는
네가 살인자가 된다.
네 형제와
세상의 은밀한 원수,
하이에나,
파괴자가 된다.”
(T-27.VII.12:2)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천국을
파괴한 자는
바로 나입니다.
신이,
나 대신 당신들을
벌하게 하기 위해,
내 삶의 모든 이를
파괴시키고 하는 자는
바로 나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이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꿈”을 가리키며)
이것만 압니다.
우리는
세상의 꿈만
압니다.
이 꿈에서는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행합니다.
하지만
깊이 묻혀 있는
은밀한 꿈속에서는
내가 살인자요,
하이에나입니다.
은밀한 꿈이
이렇게 묻혀 있으니
나는 이를
알지 못하고,
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이것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는
바로 “여기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란
은밀한 꿈을
가리킵니다.
실제로는,
은밀한 꿈을
선택한
결정권자의
결정을 뜻합니다.
“너의 사소한 꿈들과
너의 실재 사이의 공간,
바로 여기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
(T-27.VII.12:3)
우리가 에고에
귀를 기울였을 때,
“작고 미친
생각”을 나타내는
(도표의
"갈색 수직선"을
가리키며)
이 수직선이
실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은, 나의
꿈꾸는 마음(mind)과
천국에 있는
내 참된 마음(Mind)
사이의 간격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사소한 꿈들과
당신의
실재 사이의 공간,
바로 여기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이 작은 간격을
보지조차 못한다.
환상들과
두려움의 탄생지,
공포와
해묵은 증오의 시간,
재난의 순간,
이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비실재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비실재가
해제될 곳도 바로
여기이다.”
(T-27.VII.12:4-6)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바로 여기서
해제될 것입니다.
(“결정권자”의
위치를 가리키며)
바로
이곳입니다.
잠에 빠져 분리와
죄와 죄책감과 두려움의
꿈을 꾸기로 한
마음의 결정,
세상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비실재는
해제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에게
세상 속으로 와서
이곳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청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당신의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당신의 마음 안에
있다면,
당신도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마음 안에
있다면,
당신이 바로
결정권자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며,
이 말인즉슨,
당신이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당신의
괴로움의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세상이 아니라
몸이나 허리케인이나
원자폭탄이나 성폭행이나
학대나 살인이나
교통체증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에
비실재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제될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적수업은 매우
단순한 수업입니다.
이 수업은
모든 것을 똑같이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얼마나
복잡하게 지어냈습니까.
이 세상은
기가 막힐 정도로
복잡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육신을 유지하는 일도
기가 막히게 복잡합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요.
지금 우리는
신체적인 차원만 조금
거론했을 뿐입니다.
심리적 차원과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 속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까지 고려할 때,
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이 복잡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도 하나,
해결책도 하나입니다.
나는
에고를 선택했고,
이제 나는
성령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와 해답의
단순함을
다루려하기 보다,
모든 것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곤 합니다.
기독교의 신학도
얼마나 복잡합니까.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고통을 받다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구부리고
왜곡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쉽습니까?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내 유일한 문제란,
뭔가가 일어났고
지금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분석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꿈”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는
그 무엇도 분석하지
마십시오.
“좋은
기적수업 학생”이
되어서
당신의 에고를
분석하지 마십시오.
에고는
이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이로 인해
번창합니다.
당신이
언짢아질 때,
이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 할
단 한 가지란,
당신이
그른 교사를
선택했고,
환상에다
힘을 부여했다는
것뿐입니다.
어찌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행하든, 나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생각들은 위험한가?”
“몸에게는 그렇습니다!”
(T-21.VIII.1:1-2)
하지만 나는
내 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은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수준에,
닿아 있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 몸에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것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또
내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의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당신에게 주지 않는 한,
당신은
이 평화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이 과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깨어나길
원하지 않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나길
원치 않는 진짜 이유는,
천국에는,
“내”가 없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에고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이유란,
우리가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은밀한 꿈”을
가리키며)
여기로
곧장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신이 당신을
결박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을 들여다 보는
두려움”이라는
텍스트의
초기 섹션에서,
에고는 당신에게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혹 그렇게 하면, 너는
죄를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신은, 너를
눈멀게 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T-21.IV.2:3)
신이 당신을
파괴하리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죠.
다시 말하지만,
어찌
이보다 명확할 수
있겠습니까?
수업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네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말라.
그러면
이 은밀한 꿈이,
너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맙소사. 깜빡했네.”
말하고는
(“세상의 꿈”을
가리키며)
곧장 여기로
돌아옵니다.
당신이
바른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시작할 때마다,
이 수업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마다,
당신에 대한
성령의 평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마다,
(“결정권자”의
위치를 가리키며)
당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점점 더
바른 마음을 가질
때마다,
어떤
작은 목소리가
“조심하랬지, 내가
너한테 경고했잖아.”
라고 말을
시작하곤 합니다.
“성령이라는 인물은
믿어서는 안 돼.
물론 신이,
분리 이후에 성령을
창조하긴 했지.
그런데 신이 왜
성령을 창조했는지
알기나 해?
사랑이니 평화니 기쁨이니
영원한 지복이니 행복이니
등과 같은 감언이설로
너를 꼬드겨서
붙잡게 하려는 거야.
성령의 말을
한 마디도 믿어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성령은 너를 붙잡아서
천국에 데려갈 거야.
천국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마.
너는
신의 가슴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너는,
망각 속으로
소멸되는 거야.”
(“그른 마음”을
가리키며)
이 말을 듣고는,
우리는 곧장
우리의 친구에게
돌아옵니다.
막상
이 친구에게 왔지만,
에고는
친구가 아니기에,
(“세상의 꿈”을
가리키며)
우리는 다시
세상과 몸으로
돌아갑니다.
분명 우리 모두는
기적수업을 읽었고,
이것이
온전한 음성이라는
것을 믿는데,
왜 우리는
여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에 대해
궁금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수업의 내용도 알고
그 내용도 믿고 있는데,
왜 이를
살아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의 꿈을,
다루는 것이
더 낫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악마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악마가
더 낫다는 것이죠.
그래도 이것만큼은
다룰 줄 알거든요.
물론 나는 여기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위험한 물살을
어떻게 요리 조리
피해나가야 하는지는
최소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 근처에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수업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목적은,
이것을 날마다
당신의 개인적 삶에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언짢아지고
싶은 충동이 들 때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
여기란 없다.
여기란
없다는 것을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언짢은 것이
결코 아니다.’ 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언짢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도로에서
운전하는 방식 때문에,
식당
종업원의 태도 때문에,
내 아내나 남편이나
연인이나 친구나 자녀가
나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또는 내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대통령이 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나는
내가 언짢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모을 수 있고요.
하지만
이는 거짓말입니다.
우리
여행의 이 단계에서,
당장
우리는 이 거짓말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이 거짓말을, 믿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이며,
이는
분명 가능합니다.
투사해내는
자신을 지켜보더라도,
<투사물>까지,
믿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노발대발하는 자신을
지켜볼 수 있고,
그 분노를 지지해줄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신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서
이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고는,
다음과 같이
깨닫는 것도 가능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을 필요가 없어.
이것은 이미 해봤어.
나는 이 각본을 알아.
나는 이것을
신물이 나게 해봤다고.”
이것이
에고의 통치를 끝내는
과정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에고의 통치는
우리가
에고를 선택할 때만,
가능합니다.
ㅡ 출처 : 기적수업ㆍ한국모임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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