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지들끼리 뭐라고 쏼랑대며 걷는 외국인 젊은이들이 많았다. 말투로 보아 일본, 중국은 아닌데, 쓰리랑카, 파키스탄의 사투리이면 더욱 국적을 알리가 없다.
나도 저런 젊은 시절이 있었을까? 그때 부산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여 얼굴을
못봐서 아쉬웠다나. 뭘 그런걸 가지고...살다보면, 특히 코로나 상황에선 다반사가 아닌가.
젊은 시절 우리들의 일상 잡무는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엔 음악다방이 생겨났고, 주변엔 자갈치, 충무동, 용두산공원이라는 추억을 만들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 친구를 전화를 받고보니 문득 지난 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인던가...
오후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에 남부민동 친구집으로 모이라나. 친구집이라 해보았자 산복도로 위 산자락 낡은 집에 넉넉히 장정 두명 누으면 발뻗을 듯한 달셋방이다.
방주인 친구는 지난 해 봄 다니던 학교를 때려쳤고, 방이란 시집간 누나가 시골 친정에 왔을때 몰래 누나의 반지를 훔쳐 가출해서 장만한 보금자리다.
친구는 봉래동 시장에서 월남방망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월남방망이? 그때가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그곳의 사탕을 본따 만든 과자인 듯하다. 남들은 100원에 두개로 파는데, 세개를 준다기에 원가를 따져보니 적자였다. 제돈을 들인게 아니다 보니 원가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는 몇달전부터 영도에 사는 여중생을 사귄다며 자랑을 하였고, 용기 부족한 청춘 우리들은 마냥 부럽기만 했다.
한달쯤 뒤, 어느날 친구는 밤에 손님이 올거라며 대낮부터 야단법석을 떨었다. 여자친구가 친구들을 데려온단다. 뭐라? 그럼 우린 어쩌라고?
호기심이 발동하니 집에 간다고 하기는 아쉽고, 짝도 맞았것다. 그 작은 방에 여학생 친구 둘, 그러니까 방주인과 나, 그리고 남포동 친구 등 6명이 밤을 새워야 했다.
앉아 있기에도 비좁은 방, 이성간 뒤섞인 틈새, 다리도 포갠 상태에서 설레는 가슴에 설마 잠이나 잤을라고...꼼지락 거리기만 해도 오해를 받기 싶상이었다.
저녁에 친구의 집에 도착해서 이야기를 들으니, 여중생과 다투었는데, 괘씸해서 앙갚음을 해주어야 하겠단다.
우리는 남포동으로 나왔다. 남포동 친구는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이어집에서 일했다. 소위 빵구집이다. 당시는 그곳이 부산의 번화가였고, 사람과 차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일거리가 많았다. 사장님도 사람이 좋아 자식같은 우리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셨다. 우리는 그 사장님을 두고 술을 많이 하셔서 '남포동 초빼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주변에서도 그런 호칭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곳에 또 다른 한명이 와있었는데, 초교선배이고 사회생활에 본격적으로 발디딘 형이었다. 가볍게 한잔하며 남부민동 친구의 여학생과 다툰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영도로 간다기에 재미삼아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남부민동 친구, 선배, 나를 포함한 세명은 택시를 타고 신선동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알고보니 여학생이 산다는 골목은 당시 누나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남부민동 친구는 여학생 집근처로 가고, 남은 둘은 구멍가게에 앉았다.
그런데 조금 뒤 남포동으로 가려고 골목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앞에 느그들 거기 좀 있어봐라!"
음침한 골목 분위기에 뒤를 돌아보니 서너명의 장정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젠 죽었구나!
우리가 불려간 곳은 영선국민학교 건물 뒤편, 왜 경비 아저씨는 우리를 보면서도 자리를 피하시는지 그게 야속했다.
우리 3명을 어두운 곳에다 따로 세웠다. 자신들은 그때 부산에서 마지막 남은 주먹들이라 소개했다. 그곳 주먹들의 우두머리가 그 여학생의 오빠였다.
아이쿠! 제대로 걸렸구나!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지?
서너차례 지난 선거때 누군가가 폼잡아 보이던 엎퍼컷이 들어왔다. 언제든 매맞는건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에게 변호인이 나타났다. 언제왔는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문제의 여학생이 오빠에게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의리의 세계엔 예외가 없는 법이다.
까고 튀어? 나는 아나로그 세대에서는 반에서 뒷좌석 앉는 키에 달리기는 제법 날쎄었다.
큰형이 입던 대학교련복에다 군화까지 중무장으로 하였것다. 도장물도 먹었으니 한두대 선수치고, 36계 줄행랑하면 승산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어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그 주먹들에게 용서를 구할 이유도 없었다. 얌전히 몇차례 더 맞고 풀려났다. 변호인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덜 맞은것 같았다.
몹쓸꼴된 우리들은 씁쓸하게 골목을 내려왔다. 선배는 영도의 오야봉을 안다며 복수를 해야겠다며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 밤에 공사다망한 사람이 집에 얌전히 있을 턱이 없었다.
풀이 죽은 셋은 택시를 탔고, 대략 우리들의 상태를 눈치로 읽는 듯 택시 기사님도 우리와 함께 노래를 함께해 주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뭐더라? '울려고 내가왔나' 이었든가?
다시 남포동의 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술잔을 기우리는 우리들의 넉두리를 잠재웠다.
"계집애 그냥 안둘거다."
"아! 영도 형님만 계셨어도..."
나는 혹시나 일이 커져 소문이 나서 누님이 아실까 걱정이 되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 영도로 건너갔다. 길을 건너는데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저 친구 어젯밤 개지?"
어휴 쪽팔려. 쌕을 메고 어디론가 향하는 그들의 눈길을 피해 나는 황급히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후 '미워도 다시한번'인지, 아니면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라는 듯, 친구는 그 여학생과 화해를 하고 다시 사귄다는 뉴스를 듣고 가슴이 휑했다.
그런 여학생 또래들은 왜 나같이 착한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걸까?
오늘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그때의 남포동 친구였고, 나머지는 소식 끊어진지 오래다. 어디에 살고있든 건강과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