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桐華寺
동화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동화사사적비(桐華寺事蹟碑)'의 기록에 의한 것으로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할 때,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을 피웠다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고쳐 불렀다하는 설이다.
다른 설(說)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영심대사(永深大師)에게 전해졌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心地)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첨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는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불간자(佛簡子)는 미륵보살의 수계(受戒)를 의미하는 징표이다. 진표율사가 받은 간자(簡子)는 미륵보살의 손가락 뼈라고 하여 불골간자(佛骨簡子)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극달(極達)의 창건에 대해 극달(極達)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公認)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法相宗)의 성격을 띤 ' 유가사 (瑜伽寺) '라는 사명(寺名)이 붙여졌을 까닭이 없다는 이유에 근거하여 832년에 심지대사(心地大師)가 중창한 시기를 사실상 창건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心地王師의 창건설화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심지(心地)는 15세에 출가하여 중악(中岳 ..팔공산)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때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永深)이 그의 스승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심지(心地)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길상사로 향했다. 그러나 길상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법회가 시작되어 당(堂)에 올라 참례(懺禮)를 할 수 없게 되자 심지(心地)는 마당에 엎드려 참회하고 예배드렸다.
그러던 법회 7일째 되는 날, 큰 눈이 내렸는데, 심지(心地)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심지'를 당(堂)으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핑계로 이를 사양하고 마당에 물러앉아 법당을 향해 간곡히 예배하여 이마와 팔뚝에서는 피가 흘렀으며, 지장보살이 매일같이 찾아와 위로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다시 팔공산으로 돌아가던 심지스님은 옷섶 사이에 두 개의 간자(簡子)가 끼여 있음을 발견하고 속리산으로 되돌아가 영심(永深)대사에게 돌려 주었다. 영심대사(永深大師)는 괴이 여기며 간자(簡子)가 보관되어 있는 함(函)을 살펴보니 함(函)에 있어야 할 간자(簡子)가 보이지 않았다. 영심대사는 간자를 찾아들고 겹겹이 싸서 다시 잘 감추었다. 그런데 심지스님이 다시 팔공산으로 돌아가는데, 간자(簡子)가 또 옷섶에 간자가 끼여 있었다. 다시 영심(永深)에게 돌아가 돌려주게 되었다. 그러자 영심대사는 '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그 뜻을 받들라 ' 하며 간자(簡子)를 주었다.
심지(心地)는 간자를 소중히 머리에 이고 팔공산으로 돌아오니 산신(山神)이 선자(仙子) 두 명을 데리고 영접하였다. 스님은 그들에게 계(戒)를 주고 말하기를, ' 이제 땅을 가려 간자를 모시려 하노라. 이는 나 혼자 정할 일이 아니니,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고 하였다. 산신(山神)과 함께 산에 오른 심지스님은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자 간자는 참당(懺堂) 곧 지금의 금당암(金堂庵) 뒤 우물에 떨어졌고, 샘 주위에는 오동나무꽃이 눈 속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심지스님은 그 곳에 절을 짓고, 겨울철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였다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뒤 심지스님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팔공산에 여러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진표(眞表) - 영심(永深) - 심지(心地)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법상종(法相宗)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한다.
동화사 동편 입구(구, 진입로) 동화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 '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一柱門), 동화사는 그 터가 봉황(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일주문의 이름을 봉황문(鳳凰門)이라고 부른다. 봉황문은 양쪽에 두 개의 큰 기둥과 작은 기둥으로 균형을 잡아 다포(多包)형식과 팔작지붕, 겹처마 건축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자동차가 다니는 큰크리트길이 오른쪽으로 나있어 어색하기만 하다. 봉황문 바로 앞에 보이는 마애불(磨崖佛)이 더욱 외로워 보이고 있다.
동화사의 창건
'동화사사적비'에 의하면, 493년에 극달존숙(極達尊宿)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斯)라고 부르다가, 832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할 때 가져온 간자(簡子)를 던져 그 떨어진 곳에 불당(佛堂)을 이룩하니 지금의 참당(懺堂) 뒤 작은 우물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오동(梧桐)나무꽃이 천우(天雨)와 어울려 아름다움에 동화사(桐華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933년에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삼창(三創)을 하였는데, 영조선사는 당나라 설봉의존선사(雪峰義存禪師)의 법을 이어받아 중국에서도 이름을 떨친 분으로 이때부터 동화사가 선불교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90년에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사창(四創)하였으며, 고려 말 1298년에는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오창(五創)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동화사를 영남승군(嶺南僧軍)의 본부로 삼았는때, 이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이 되어 팔공산성(八公山城)을 쌓고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종료된 1606년에 '사명대사'에 의하여 육창(六創)이 이루어졌다.
한편 동화사에서 선원(禪院)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중창한 고려 초기의 영조선사(靈照禪師),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 고려 말기의 홍진국사(弘眞國師), 조선 중기의 사명대사(泗溟大師) 등이 모두 선사(禪師)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볼 때 고려 초기나 중기에는 이미 수선도량으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대웅전 오른편에 일곽을 이루고 있는 금당선원(金堂禪院)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석우(石右), 효봉(曉峰), 성철(性徹) 등 해방 이후 불교정화의 주체가 되었던 스님들이 용맹정진하였던 의미있는 선원이다.
동화사의 가람배치
팔공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동화사는 가람 중심건물 배치의 특성상 대웅전 일곽의 중심영역과 금당암(金堂庵)으로 불리는 극락전(極樂殿)과 금당선원 일곽 그리고 대불(大佛)을 중심으로 한 통일약사대불과 통일대전 일곽으로 크게 3사역(寺域)으로 구분된다. 가장 최근에 조성된 곳은 통일대전(統一大殿) 일곽이다. 옛날에는 대웅전 영역과 금당선원 영역이 동편과 서편으로 동화사의 주된 영역이었는데, 창건 당시에는 당간지주의 위치와 금당(金堂)이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금당선원(金堂禪院) 영역이 사찰의 중심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영역별로 살펴보면, 먼저 대웅전 일곽의 중심영역은 조선시대 영조(英祖. 1732년) 대에 세워진 건물들로 연경전, 천태각, 봉서루, 심검당, 영산전이 있고, 근년에 조성된 화엄당, 법화당 등의 법당이 있다. 봉서루 밑을 지나 계단에 오르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있는데, 봉서루와 대웅전은 같은 축에 배열되고, 그 좌우에 화엄당과 법화당이 마주하여 장방형의 중정(中庭)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가람배치는 팔공산에 자리 잡은 파계사(把溪寺), 은해사(銀海寺) 등에서도 나타난다.
다음으로 동화사 창건기의 가람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금당암(金堂庵) 영역은 당간지주와 극락전의 동서 삼층석탑과 극락전의 기단이 창건기 통일신라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 같은 축으로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이 위치하고, 뒤쪽으로 수마제전(須摩提殿)과 금당선원이 배치되었다. 마지막으로 통일대불 일곽은 석조대불 앞쪽 좌우로 동탑과 서탑을 배치하고, 그 앞으로 통일대전을 조성하고 아래쪽으로 108계단을 설치하였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동화사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내로 들어가는 오른쪽 축대 위에 서 있는데, 그쪽 좁은 길은 금당암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 위치상으로 보면 절 입구 오르막 길에서도 우뚝 높은 축대 위에 서 있어서 불교의식이 있음을 널리 알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예배의 대상물이라는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라고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2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3.1m의 규모로 두 개의 화강암 석주(石柱)가 0.66m의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로 마주보고 있다. 서로 마주보는 지주(支柱)의 안쪽에는 아무런 새김장식이 없으며 바깥면에는 양쪽 주연(周緣)의 모서리를 죽이고 중심에 세로로 능선(稜線)을 조각하였다. 양 지주의 중간즘 되는 곳에는 내면(內面)을 제외한 3면에 1m쯤 되는 길이가 전면적으로 음각되어 있다.
앞뒷면은 역시 모를 죽였을 뿐 아무런 새김장식이 없고 꼭대기는 위로는 뾰족하고 앞뒤로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었다. 지주(支柱)의 중심부는 안쪽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에 1m 정도를 살짝 음각(陰刻)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수법이다. 현재 높은 토단(土壇) 위에 있으나 당간을 받치던 기대(基臺)는 없어졌고, 대석(臺石)도 대부분 없어졌다.
지주(支柱)의 위와 아래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의 것은 네모꼴이고 지면(地面) 가까이에는 둥근모양으로 되어 있다. 지금 댓돌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둔중함이 엿보이고 있어 제작시기는 신라 말기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사의 창건 시기가 832년 왕사(王師) 심지(心地)에 의한 것임을 참작하면 이 당간지주의 조성연대도 이때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 소장, 동화사 유물들
약왕보살좌상 藥王菩薩坐像
석조 16 나한상 石造 16 羅漢像
의식구 儀式具
불, 법, 승 보패 佛, 法, 僧 寶牌
삼보(三寶)란 불교도의 세 가지 근본 귀의처인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한다. 불교를 달리 불,법,승의 삼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삼보(三寶)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불교도는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시작되며 최후까지 삼보에 귀의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에게는 불가결한 요건이며,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삼보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삼보의 성립은 석가모니불의 성도(成道)로부터 시작된다. 석가모니는 35세가 되던 해 12월 8일의 이른 새벽에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정(絶對寂靜)인 열반의 세계를 실현한 것이며, 정각(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자 즉, 불(佛)이 되었다는 자기혁신의 일대 전환으로써 불보(佛寶)가 성립되었다.
전패 殿牌
조선시대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에는 대개 삼존(三尊)이 봉안되며, 또 그 앞에는 거의 어김없이 수미단(須彌壇)이 설치된다. 이 수미단에는 종종 광배(光背) 모양의 나무에 '주상전하만세 (主上殿下萬歲)' 또는 '왕비전하수재년 (王妃殿下壽齋年)' 그리고 '세자저하수천추 (世子低下壽千秋)'라고 글씨를 적은 명패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가운데 왕비와 세자의 경우 수재년(壽齎年)과 수천추(壽千秋)는 바뀌어져 사용된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전패(殿牌)는 글씨 내용에서 보믓 존래 왕실 최고 어른의 수명장수를 축원한 것이다. 축원문 글씨는 주칠(朱漆) 바탕에 금니(金尼)로 쓰는데 이는 지고(至高)한 신분을 나타나게 한 격식이다. 축원문 주위에 용, 구름, 여의두문 등이 장식되었는데, 운문(雲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은 용과 결합된 부속문양이다. 이들은 한 나무가 아닌 여러 나무를 얇게 깎아 상호 부착 중첩시키면서 전체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업경 業鏡
지옥에 온 망자(亡者)는 염라대왕 앞에서 생전에 지은 업보(業報)에 따라 여러 등급의 지옥에 보내진다. 업경(業鏡)은 염라대왕이 생전의 업보(業報)를 확인시켜주는 거울이다. 불교에서 지옥의 염라대왕(閻羅大王)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죄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불교에서 지옥(地獄)은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곳이며, 육도(六道) 중 가장 고통이 심한 곳으로, 즉 가장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다.
사람이 죽어 지옥에 이르면 염라대왕은 업경(業鏡) 앞에 죄인을 세우고 생전에 지은 죄를 모두 털어놓도록 한다. 업경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며, 염라대왕은 그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에 적는다. 죄인의 공술이 끝났을 때 더 이상 업경에 죄가 비추어지지 않으면 심문이 끝난다. 심문이 끝나면 두루마리를 저울에 달아 죄의 경중(輕重)을 판가름하고, 그에 따라 가야 할 지옥(地獄)이 정해진다.
독성도 獨聖圖
독성(獨聖)은 스승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를 일컫는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나반존자(那畔尊子)라고 한다. 본래 부처의 제자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뒤 부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 후 남인도 천태산에 들어가 말세(末世)가 되면 중생의 복덕(福德)을 위해 세상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崔南善)은 민간에 전해지던 단군신앙(檀君信仰)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세의 이익을 주는 성인(聖人)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나, 다른 나라에는 그 유례가 없다. 나반존자를 모신전각 즉, 독성각 역시 우리나라에만 있다. 후불탱화로는 독성탱을 모시며, 배경은 천태산(天台山)으로 나무와 숲이 무성하고, 나반존자가 석장(石杖)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자가 차(茶)를 달이는 모습의 탱화도 있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좌우 협시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장보살도 地藏菩薩圖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으로 조선의 민중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날로 늘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해 주는 지장보살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협시(脇侍)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배치되어 있다.
동수미륵당 명 기와 桐藪彌勒堂 銘 기와
대구광역시 용수동 와요지 발굴조사에서 모두 9점이 출토되었다. ' 동수미륵당 (桐藪彌勒堂) '이라는 명문(銘文)은 암수기와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으며 중앙에 도장을 찍어 나타내었다. '동수(桐藪)'는 동화사(桐華寺)의 다른 이름으로 동화사 미륵당에서 사용되던 기와가 용수동 와요에서 구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번 佛幡
번(幡)은 예로부터 경계를 알리는 순수한 깃발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장례의식의 도구로서, 혹은 불교의 장엄구(莊嚴具)로서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어져 왔다. 특히 불교의 장엄구로서 사용될 때에는 전각 안의 불단 앞으로 내려트려지거나, 야외에서 법회가 진행될 때 장대(幢)에 매달아 마당 한 가운데 세워져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실제로 불교의식에서 하늘 높이 휘날리는 수많은 번(幡)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불법의 신성함을 확인하며 불교의 이상향을 한걸음 다가가게 된다.
인악대사비 仁岳大師碑
인악대사비(仁岳大師碑)는 해탈교 앞 금당선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인악당(仁岳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허름한 비각(碑閣) 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석으로 인악대사(仁岳大師)의 전기(傳記)를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碑文)은 1808년 당시 경상감사로 있던 김희순(金羲淳)이 짓고 글씨도 썼는데, 왕희지풍의 필체로 서법이 매우 유려하다.
인악대사 仁岳大師
귀부(龜趺)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鳳凰)으로 조각하고 있는 점은 다른 비석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러한 형태는 널리 알려진 대로 동화사의 지세(地勢)가 봉황(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봉황포란형. 鳳凰包卵形)라고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보조국사 진영 普照國師 眞影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은 고려시대 중기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내세워 불교계를 개혁시키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하였으며, 조계 혜능(曺溪 慧能)의 선지(禪旨)를 우리나라에 전승시킨 공적으로 우리나라 선종사(禪宗史)에서 나옹 혜근(懶翁 惠勤)과 함께 높이 숭앙되는 선사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송광사(松廣寺)의 비문에 의하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문)을 발표하였다. '동화사사적비'에는 보조국사 지눌을 동화사의 중창주(重創主)로 기록하고 있다.
보물 제16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조국사 진영(眞影)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素色)의 장삼과 양끝을 둥근 고리와 금강저(金剛杵) 형태의 빗장으로 멘 색조 가사(袈裟)를 입고, 등받이가 높은 법좌(法座)에 앉아 오른손에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왼손을 단전에 둔 채 선정(禪定)에 든 모습이다. 가사를 고정하고 있는 금강저는 인간의 번뇌를 부수는 보리심(菩提心)의 상징이다.
화면 왼편에는 보조국사가 입적한 이후 조정으로부터 받은 시호 ' 원력수생해동불일보조국사 (願力受生海東佛日普照國師) '가 기록되어 있다. 이 진영은 얼굴의 세부 표현과 인물 형태의 묘사가 뛰어나며, 필선(筆線)이 거침없고 능숙하다. 법좌는 안쪽에 귀갑문(龜甲紋)을,측면에는 모란문을 장식한 나전칠기 의자이다.
특히 모란무늬의 묘사가 정교하다. 인불과 법좌는 속도감이 있는 필선(筆線)으로 그려졌고, 질감과 명암은 수묵의 농담(濃淡)으로 표현되었으며, 가사(袈裟)와 발받침 등에는 부분적으로 진채(眞彩)가 채색되었다. 필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윤곽선 밑에 음영(陰影)을 주지 않은 점, 얼굴과 법좌의 세부를 치밀하게 묘사한 점은 동화사의 사명대사 진영과 양식적으로 공통된다.
사명대사 (泗溟大師)와 동화사
아래 사진은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1544~1610)의 영정이다. 이 진영(眞影)은 동화사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사명대사는 이곳 동화사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 가경원년병진 (嘉慶元年丙辰) '이라는 연호가 있어, 사명당이 1610년(광해군 2)에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기는 세로 145.2cm 가로 106cm의 크기로 재질은 비단에 채색하였다. 보물 제1505호로 지정되어 있다.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右向)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는 모습의 영정이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승병대장(僧兵大將)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나고 있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진영(眞影)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이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袈裟)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까지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사명대장 진영은 우리나라 진영(眞影)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내에 전해오는 10여 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필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존하는 영정 중 비교적 이른시기의 작품으로 당시대 초상화 연구에 가치있는 작품이다.
사명대사와 동화사
조선 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동화사를 영남승군(嶺南僧軍)의 본부로 삼았는데, 이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이 되어 팔공산성(八公山城)을쌓고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종료된 1606년, 사명대사에 의하여 동화사의 육창(六創)이 이루어졌다. 동화사에는 사명대사의 유품(遺品 ..위 사진)이 전해오고 잇다.
도학동 부도 道鶴洞 浮屠
이 부도는 동화사에서 약 1km 떨어진 도학동(道鶴洞) 내학(內鶴)마을에 있던 것을 동화사로 옮긴 것으로, 현재 대웅전에서 금당암 가는 길목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는 172cm로 제작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며, 현재 보물 제60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서,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석을 마련하고 탑신과 옥개석을 쌓아올린 형식이다. 방형의 지대석은 기단 윗면에 낮은 각형(角形)과 높직한 원호(圓弧)의 굄 그리고 또 한 번 맞은 각형으로 조출(彫出)한 굄대를 마련하였다. 그 위 측면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 4구씩을 조각하였다. 측면 위에는 평평한 갑석형(甲石形)을 이루었고, 그 위에는 아무런 굄돌도 없이 하대석을 받고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과 중대석이 같은 돌로 되어 있고, 상대(上臺)는 별개의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은 8각으로서 3단형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8각의 중대는 낮은 편으로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도 없다. 상대석은 앙련대를 이루고 있는데, 아랫면에는 8각으로 된 2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하였다. 연화문은 단엽으로 8각 측면의 각 변과 각 모서리에 각각 1편씩 모두 16판을 돌렸다.
8각으로 된 탑신석은 각 면 좌우에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상단(上端)에 이르러 특별한 주두형(柱頭形)은 표현되지 않았으나, 좌우의 우주(隅柱) 사이에 인방형(引枋形)이 표시되고, 이 인방(引枋) 중간에 첨차형이 모각되어 있어 목조가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다. 탑신 윗면에는 지름 49cm, 깊이 13cm의 큼직한 원공(圓孔)이 있는데, 이곳이 부도 주인공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곳이다. 옥개석은 광대한데, 아랫면에는 1단의 각형 받침이 조출되었고, 그 바깥면은 처녀 끝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처마가 펼쳐져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평박하고 꼭대기에서 8각 전각(轉角)에 이르기까지의 각 우동은 아주 굵다. 그리고 이 우동이 전각(轉角)에 이르면서 반전(反轉)되듯이 한층 굵게 표시되었는데, 여덟 모퉁이의 전각부가 모두 파손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각 전각(轉角)에 귀꽃무늬의 조식이 있었던 것 같다. 옥개석 위에는 8각으로 된 2단의 각형 굄을 각출하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받게 하였다. 이 부도는 안상(眼象)이나 연화문 등 각 부의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서루 鳳棲樓
동화사 주불전 정면에 있는 누각(樓閣)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하층 가운데 3칸은 개방된 공간이며, 좌우 툇간은 판매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봉서루로 오르는 계단 한 가운데에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암반이 놓여 있고, 그 안에 둥근모양의 돌이 있는데, 암반은 봉황의 꼬리에 해당하고 둥근 돌은 '알'이라고 한다. 즉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봉황을 상징하는 누각임을 알 수 있고, 오동나무꽃이라는 절 이름과도 상통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누하주(樓下柱)는 방형(方形)의 석주로 대신하고 기둥머리에 귀틀을 짜서 상층 바닥을 만들었다. 누상주(樓上柱)는 원형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는 익공을 결구하였다. 주간에는 화반을 1구씩 두었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함께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내부 천장은 가운데 부분만 우물반자로 막고 좌우는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구조는 7량가로 짜 올렸다. 일부 대들보는 울퉁불퉁 휜그대로 자연재를 걸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으로 만들고 기와골 끝은 막새를 사용하였으며 용마루 좌우에는 용두(龍頭)로 장식하였다.
봉서루(鳳棲樓)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하여 ' 영남치영아문 (嶺南緇營牙門)'이라고 쓰여져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즉 ' 영남의 승려들이 모인 관아 '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僧兵)을 지휘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봉황알
봉황(鳳凰)의 정기가 서려져 있다는 의미의 봉서루(鳳棲樓) 앞 바위 위에 올려놓은 3개의 작은 돌을 '봉황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 동화사터가 풍수지리상 '봉소포란형 (鳳巢抱卵形 ..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의 지세(地勢)이며, 신라 흥덕왕 7년(832)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절을 중창할 때 오동나무 꽃이 한겨울에 상서롭게 피웠다고 하여 동화사(桐華寺)로 불리운 것과 관련이 있다. 봉황(鳳凰)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며 오동나무에 깃들고, 먹는 것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절터 주변에 오동나무가, 대웅전 뒷편에 대나무가 많은 것은 스님들의 훌륭한 환경 비보책(裨補策)의 하나이면서 봉황과 관련이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대웅전 大雄殿
보물 제 15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極達)이 세운 유가사(瑜伽寺)인데, 832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하면서 동화사(桐華寺)라고 개칭한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동화사의 중심불전인 대웅전도 몇 차례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시대인 1732년(영조 8)에 세운 것으로추정하고 있다.
대웅전은 8단의 반원형(半圓形) 돌계단이 있는 5단의 높직한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다포식(多包式)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공하지 않은 아름드리 자연목(自然木)을 그대로 사용한 기둥이 멋스럽다.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 내오출목으로 바깥의 제공 쇠서 끝이 날카로운 곡선을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살미첨차는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는데, 그 끝에는 뾰족한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전면 문짝의 화려한 꽃살무늬 장식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를 주불(主佛)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봉안하고, 그 위에 극락세계의 장엄(莊嚴)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불상을 봉안한 벽면에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걸려 있고, 동쪽 벽면에는 신중탱과 지장탱, 서쪽 벽면에는 삼장탱의 탱화가 있다.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龍)과 여섯 마리의 봉황(鳳凰)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
3단의 불단에 모셔진 석가삼존불은 상호(相好)나 양식이 서로 같고, 다만 법의(法衣)의 착의법과 수인(手印) 그리고 크기가 약간 다르다. 크기는 중앙 석가모니불이 약간 더 크다. 삼존불의 얼굴은 원만한 형태로 가늘고 긴 눈, 오똑한 코와 작은 입이 표현되어 있으며,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낮고 평평한 육계와 중앙계주, 정상계주가 갖추어져 있다. 법의는 중앙 석가모니불이 왼쪽 어깨에 걸쳐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는 변형식 우견편단(右肩偏斷)으로 걸치고, 좌우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다. 수인(手印)은 중앙 석가불이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좌우 협시불(脇侍佛)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을 대칭적으로 결하고 있다.
약사여래 복장유물 ... 보물 제1607호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가운데 본존불 오른쪽에 있는 약사여래불에 복장(腹藏)된 전적 7종이 보물 제1607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 대웅전의 삼존불은 1725년 대웅전이 중창된 후 1727년에 조성되었고, 조성과 동시에 복장불사(腹藏佛事)가 이루어졌는데,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에서 12종, 아미타불에서 6종, 약사여래불에서 32종의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되었다.
약사여래 복장 전적(腹藏典籍) 중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제4~7은 1417년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 박씨 등이 먼저 돌아간 부모의 천도(遷道)를 위하여 인출한 4부 중의 1부이다. 권4 앞에 실린 변상도의 자단에는 정씨가 죽은 남편왕씨의 초생정토(超生淨土)를 기원하기 위하여 화공을 사서 변상도를 그리고 이를 판각 유통시킨다는 지기(識記)가 있어서 이 변상도의 조성경위를 알려주고 있다. 조선초기 민간의 불교신앙에 대한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삼장도 三藏圖
왕준(王峻)스님이 1728년 대웅전의 삼존불상과 함께 서쪽 벽면에 삼장탱(三藏幀)을 모셨다. 중앙에 천장보살, 대범천왕, 제석천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이 불화는 제작연대가 분명하고 18세기 불화로서의 품위를 잘 유지하고 있어 우리나라 불화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주련 柱聯
대웅전 꽃창살
극락의 문, 사찰의 꽃살문은 아름다움과 장엄(莊嚴)의 극치를 이룬다. 문살이 발달한 동양에서 우리의 꽃살문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중국의 문살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誇張)과 장식성(莊飾性)이 풍부하다. 그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고 우선 놀라게 되지만, 곧 식상하고 만다. 일본의 문살은 격자의 간결한 의장(意匠)에 세련된 선미(禪味)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문살이 예리하고 엄격하여 신경질적인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꽃살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緊張感)을 갖게 한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꽃살문은 오래 접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또 담담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아름다움이 문살 속에 숨어 있다. 우리의 꽃살문은 중국과 일본의 문살처럼 긴장이 필요가 없다. 편안한 가운데 아름다움의 쾌감이 주는 아주 독특한 장식 미술품이다.
문은 이쪽과 저쪽 공간을 연결해 준다. 이쪽과 저쪽은 벽(壁)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 연결 통로가 바로 문이다. 사찰의 저쪽은 신성한 부처가 살고 있는 극락세계이다. 저쪽은 고통을 안고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의 세계이다. 중생이 '이승'의 티끌을 털고 부처님이 사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는 지극히 환희가 넘치는 곳이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장엄(莊嚴)으로 장식되어야 한다. 최상의 장엄(莊嚴)은 언제나 그 소재가 꽃이 된다.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했을 때 자비로운 미소도 연꽃을 매개로 하였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법화경이나 화엄종의 명칭에도 꽃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다. 불교의 꽃은 법(法)이요, 진리(眞理)이며, 극락(極樂)이다.
그 꽃 (즉, 法)과 문이 결합된 사찰의 꽃살문에서 유교(儒敎) 사회이었던 조선사회 비주류(非主流)의 소박하고 순수한 심성이 묻어난다. 조선시대 사찰의 꽃살문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독특한 한국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의 불교가 귀족적(貴族的)이었다면, 사찰의 꽃살문의 기교도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는 건국 이후 수백년 동안 천대(賤待) 받고, 소외된 채 대중 속으로 들어간 민중불교이다. 대중들의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정서를 꽃살문을 통해 담아 내었다. 거기에는 긴장이나 격의가 없다. 포근함과 다정다감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사용된 선(線) 역시 우리의 야산(野山)의 과장없는 능선, 시골의 돌담길, 논두렁, 밭두렁의 선(線)과 꽃을 담고 있다. 때문에 화려하기 보다는 너무나 소박한 우리의 모습이다.
꽃살문은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 건축물에 주로 사용되어 단순히 장식적(裝飾的)인 무늬가 아니라 신성(神聖)함과 종교적 공간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단위무늬가 연속적으로 사용되어진 사방연속무늬에 따른 비례미(比例美)와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균형미(均衡美) 때문일 것이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산신각 山神閣
조사당 祖師堂
마애불좌상 磨崖佛坐像
마애불좌상은 봉황문이 있는 동화사의 동편 입구 옛 주차장의 동쪽 암벽의 높은 곳에 서향(西向)으로 양각(陽刻)되어 있다. 불상 머리 위로는 바위가 튀어 나와 상(像)을 보호하고 있는 형세인데, 불상의 크기는 불상의 높이 1.06m, 대좌높이 39cm, 광배높이 1.5m의 크기이다. 보물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머리와 상체는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광배와 대좌는 얕은 부조(浮彫)로 표현하여 불상의 입체감을 더한 이 마애불좌상은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부드럽다. 풍만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고, 머리는 나발(螺髮)로 낮고 둥근 육계가 표현되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을 말한다. 이 광명이 무량세계를 비춘다)가 뚜렷하게 표현되었는데, 삼도(三道) 역시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신체는 건장하고 어깨는 반듯하며, 법의(法衣)는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는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 사이로 비스듬한 내의와 띠매듭이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형식과 상통한다.
광배(光背)는 두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구분하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화염문(火焰紋)을 둘렀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앉은 자세는 오른쪽 다리를 대좌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는 유희좌(遊戱座)를 취하고 있다. 대좌(臺座)는 팔각의 중대석 위에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이 맞붙은 화려한 연화대좌(蓮花臺座)인데, 중대석에는 각 면마다 큼직한 안상(眼象)을 새겼으며, 그 아래로는 비운(飛雲)을 묘사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 묘사하였다.
안상(眼象)은 원래 인도(印度)에서 코끼리의 눈을 상징하였다. 코끼리는 힌두교에서 부(富)와 행운을 가져오는 '가네샤'라는 신으로 여겼으므로 안상(眼象)의 조각 역시 존귀한 존재가 그 곳에 있다는 표시요, 장식인 셈이다. 전반적을 섬세하고 화려한 이 마애불은 동화사의 중창주(重創主)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 양식상으로도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로암 毘盧庵
비로암(毘盧庵)은 동화사 옹호문(擁護門)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화사사적기'에는 비로전(毘盧殿)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1591년 서일(瑞一)화주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로암 석탑과 비로자나불 등 남아 있는 유물들로 볼 때 이보다 훨씬 이전이며, 동화사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전 사역은 동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서면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삼층석탑이 있고, 서쪽에는 요사가 있다. 대적광전의 뒤편에는 앞면 2칸, 옆면 1칸의 산신각(山神閣)이 위치하고 있다.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은 보물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삼층석탑은 보물 제 2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71m의 규모이다. 이 석탑은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주전(主殿)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에 있는 석탑으로 나직한 토단(土壇) 위에 2층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형 석탑이다.
석탑의 구조를 보면 방형(方形)의 하층기단은 4개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은 한개의 돌에 지대석과 기단중석 및 탱주(撑柱 ..받침기둥)과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각축(刻出)하였다. 갑석(甲石)은 네모로 된 4개의 판석을 붙여서 덮었으며, 윗면은 중앙의 굄돌 아래위에 굴곡을 만들어 마치 별개의 판석을 끼운 듯한 형태롤 표현하였다. 상층기단부는 중석을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각출(刻出)하였다.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덮고 윗면은 하층기단과 같은 형식으로 굄을 심한 굴곡으로 각조(刻造)하고 탑신(塔身)을 받게 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屋蓋)와 옥신(屋身)을 별개석으로 조성하였다. 옥신(屋身)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를 각출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의 체감(遞減)을 나타내었다. 옥개는 상면 중앙에 굄을 각출하고 추녀는 전각(轉角)까지 직선을 이루게 하였으며, 하면은 4단의 받침을 새기고 옥리(屋裏)에 가는 홈을 파서 돌렸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 머리장식 받침), 복발(覆鉢 .. 엎어 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보주(寶珠 .. 연꽃 봉우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탑의 규모는 작으나, 각 부의 비례(比例)가 신라석탑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초층 탑신 아래와 하층 기단의 갑석에 별개의 돌을 삽입하듯이 조각한 수법은 특이한 양식으로서 신라 하대(下代)에 나타나는 석탑양식이다.
민애대왕 석탑사리호 敏哀大王 石塔舍利壺
위 석탑은 1966년 사리구(舍利具)를 도난당하였으나 다행히 중요 유물만은 수습되었고, 사리석호(舍利石壺)에 명문(銘文)이 있어서 이 삼층석탑이 863년(신라 경문왕 3)에 민애왕(敏哀王)의 원당(願堂)에 건립된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1967년 도굴(盜掘)로 상층기단 일부와 탑신부에 이상이 있어서 해체복원 공사가 있었다.
삼층석탑을 도굴 당한 흔적이 있어 1967년에 이 석탑을 해체 보수하였는데, 초층의 탑신 상면에 사리공(舍利孔)이 마련되어 금동합(金銅盒)을 안치하여 사리(舍利)를 넣어둔 듯하나, 남아 있는 것은 금동합(金銅函) 밑바닥과 목조 금박(木造金箔)의 작은 탑 3기 외에 홍색 견포(絹布)뿐이었다. 사리함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사리구멍(舍利孔)과의 틈새에 송진(松津)을 부은 형식은 새로운 장치 방법으로 주목을 끌었다.
보물 제7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8.3cm, 입지름 8cm, 밑지름 8.5cm의 크기이다. 사리기 표면에 863년(신라 경문왕 3), 경문왕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넣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함께 나온 사각형(四角形)의 금동외함(金銅外函)은 네 조각으로 나누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67년 이 석탑을 헐어 다시 세울 때 송진(松津)이 붙은 금동외함의 밑판과 도금한 목소탑(木小塔) 3기 등의 나머지를 조사하여 사리장치가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납석(蠟石)의 사리호(舍利壺)는 입이 넓고 운두가 매우 낮으며 어깨가 부르고 밑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서 작고 아담하다. 크게 네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붙여 놓았으며, 몸통 일부와 뚜껑은 없어졌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法光寺) 삼층석탑에서 나온 곱돌사리호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사리기(舍利器)의 겉은 반질반질하게 흑칠(黑漆)을 하고, 어깨부분에는 꽃구름무늬(雲花紋)와 반달꼴의 촘촘한 빗금꽃무늬(密集線半圓花文)를 두 칸에다 나누어 새겨 돌렸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字) 38행(行)의 단정한 해서(楷書)를 새겨넣었으며, 아래쪽 테두리는 연꽃무늬를 둘러 새기고 그 사이사이에 씨방(蓮房)을 나타내는 세로금을 그어 연화좌를 만들었다.
명문(銘文)은 이관(伊觀)이 지은 것으로, 탑을 세운 경위와 공덕(功德), 민애대왕(閔哀大王)의 행적 그리고 발원문과 연대, 발원자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이 사리호(舍利壺)는 1층 탑신의 네모난 사리공(舍利孔) 안에 들어 있던 네모난 금동외함(金銅外函) 속에 놓여 있었는데, 사리호 바깥쪽의 서북 모서리에는 도금한 목소탑(木小塔) 3기가 같이 있었다. 금동외함의 안쪽 4면은 3존(三尊)으로 된 사방불(四方佛)을 새겼음이 주목되며, 목소탑의 공양(供養)은 9세기 신라 사리장치의 유행을 따는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금동외함 金銅外函
함께 발견된 사방불(四方佛) 금동사리함은 현재 4장의 판으로 분리된 상태이다. 측면에 각각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연결시켜보면 네모난 사리함(舍利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난(盜難)당한 뒤 수습되어 결합방식이나 각 불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4면은 각각 삼존불(三尊佛)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의 주존은 보관(寶冠)을 쓰고 지권인(指圈印)을 한 비로자나불, 약함(藥函)을 들고 있는 약사불(藥師佛),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과 합장을 하고 있는 부처님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사리함 가운데 외면(外面)에 사방삼존불(四方三尊佛)이 새겨진 것은 비로암 사리함이 유일하다.
대적광전 大寂光殿
다듬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널찍한 초석(礎石)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초석(礎石)은 원형주좌를 다듬고 고막이석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기단 갑석(甲石)은 모서리에 45도 방향으로 도드라지게 새긴 선(線)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초석과 기단(基壇)은 현존 건물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것을 재사용(再使用)한 듯 하다. 더불어 대적광전 계단 소맷돌도 그 형태로 볼 때 조성연대를 올려 볼 수 있어 초석과 기단, 소맷돌 모주 전대(前代)에 만든 것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단 왼쪽에 같은 형태의 소맷돌 1기가 더 남아 있어 원래 건물에는 계단을 더 두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石造 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화사 비로암 대적광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조연화대좌 위에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이 독존(獨尊)으로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전체높이 293.6cm 그리고 신체높이 128cm의 크기이다. 이 불상은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납석제(蠟石製) 사리항아리에 이와 관련된 명문(銘文)이 남아 있어, 삼층석탑과 함께 신라 경문왕 3년인 863년에 민애왕(閔哀王)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와 사촌지간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살 상투)는 퇴화하였고, 후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장엄구(莊嚴具)가 앞면 중앙에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지만, 눈, 코, 입 등이 매우 작아졌고, 여기에 미소마저 없어 감정이 없는 딱딱한 얼굴로 변하고, 무딘 귀에 삼도(三道)는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어깨는 현저하게 좁아졌고, 가슴과 등은 납작하여 하체도 역시 둔한 모습이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법의(法衣)는 평행밀집(平行密集) 옷무늬이지만, 하체의 'U'자형 옷무늬가 특이하며 배의 띠매듭이 새로 나타난 장식적인 것이다.
광배(光背)는 크게 구부러진 주형거신광(舟形巨身光)으로 두광(頭光)에는 연화무늬를 가운데 두고, 그 둘레에 보상화(寶相華)가 조각되어 있으며 신광(身光)에도 이 무늬가 그려져 있다. 대좌는 팔각으로 상대(上臺)에는 복판연화(複瓣蓮花)무늬가 번잡하게 장식되었고, 밑에는 3단의 각형(角形) 받침이 있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중대(中臺)도 팔각으로 사자(獅子), 하엽(荷葉), 보상화가 힘있는 각법(刻法)을 구사하여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따로 8각의 받침돌이 끼워져 있다. 하대(下臺)는 넓게 퍼졌으나 소박한 복판연화무늬의 복련(覆蓮 ..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을 조각하였고 그 아래에는 8각의 지대석이 있다. 지금은 호분(胡粉)으로 도장되어 있지만 불상의 면목은 잃지 않았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은 호분(胡紛)이 두텁게 발려 있어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대체로 둥글고 부드러운 선을 그리 있으며, 부드러운 곡선의 눈섭과 바로 뜬 눈, 작은 코와 입이 갖추어져 있어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낮고 평평한 육계와 계주가 갖춰져 있으며, 백호(白毫)는 눈썹 사이에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화불 化佛
시기에 따라 출현하는 가짜 부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이 기적(신변 ..身變)을 보여 출현하게 하였다는 같은 형의 많은 부처가 그것이고, 어느 것이고 소형(小形)의 여래형(如來形)으로 표현된다. 관음보살은 보관(寶冠)에 아미타의 화불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며,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오지보관(五智寶冠)도 다섯 화불을 갖추고,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경우는 42대수(大手) 중에 화불을 가지는 것이 있으며, 그 외에 광배(光背)에 소화불(小化佛)을 두는 경우도 있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배(舟形巨身光背)로 불상에 비하여 넓고 큰 편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굵은 선으로 구분한 다음 그 안에 보상문(寶相紋), 당초문(唐草紋), 연화문(蓮花紋) 등을 가득 장식하고, 두광과 신광의 선(線)을 따라 8구의 화불(化佛)을 새기고, 광배의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광배의 양식은 9세기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이 광배(光背)는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뛰어난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유행하였던 팔각삼단대좌(八角三段臺座)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중대(中臺)에는 구름 사이에서 7마리의 사자(獅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을 묘사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상의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동화사 비로암의 비로자나불좌상은 8세기 신라불상에서 보이던 긴장과 탄력이 느껴지는 생동감(生動感)이 사라지면서 불신(佛身)이 움츠러들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형식화되고 있으며, 이와는 상반되게 광배와 대좌에서는 오히려 이전의 양식보다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이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금당암 金堂庵
극락전 極樂殿
동화사 금당선원은 우리나라 불교의 선맥(禪脈)을 잇는 수선도량으로 대웅전 오른쪽의 별도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금당선원(金堂禪院) 안에는 극락전과 삼층석탑 2기, 수마제전 외에 선원 몇 채가 있다. 현재 극락전은 1974년에 증, 개축하였는데, 현재 극락전 안에 걸려 있는 '금당극락전중수방명록'에 따르면 소화 12년 즉, 1937년에 중수(重修)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극락전 앞에는 배례석 1기가 남아 있는데, 상면에 만개한 연꽃 한 송이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초석과 기단 등과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아미타회상도 阿彌陀會相圖
보물 제16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화사의 화승(畵僧) 의균(義均)이 그린 불화 중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아미타극락회상도는 한 폭에 모든 존상(尊像)을 담아 표현하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 하나의 주제를 세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중앙 본존(本尊) 불화에는 아미타불이 높은 수미단 위 연화대좌에 앉아 극락을 설법하고 있다. 좌우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등 아미타 8대 보살이 에워싸고 있으며, 화면 위쪽에는 가섭불과 미륵불이 중앙 본존을 향해 있다. 좌,우측 협시(脇侍) 불화에는 제석, 범천과 함께 여러 나한(羅漢)들이 양손을 합장하고 중앙의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갑옷과 무기로 무장(武裝)하고 있는 사천왕(四天王)이 불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배치되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동화사 금당암 극락전 양 옆에는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동탑(東塔)은 높이 5.6m, 기단너비 3.6m의 크기이고, 서탑(西塔)은 높이 5.2m, 기단너비 3m로 동서 두 탑이 함께 보물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두 탑은 석재의 결구 수법이 거의 같아 함께 조성된 것으로, 석물(石物)의 내용과 비례로 보아 사찰의 창건 당시 즉,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허훈(許薰 .. 1836~1907)의 '금당탑기'에서는 ' 863년에 세웠으며, 875년에 금당으로 옮겨 세웠다 '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납석소탑 蠟石小塔
1957년 동화사 금당암 서삼층석탑을 해체보수할 때, 1층 탑신 뒷면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99개의 납석소탑(蠟石小塔)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납석소탑을 만들어 실제 탑에 봉안하는 일은 '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라는 불경에서 비롯된다. 이 경전에서는 다라니(陀羅尼)를 넣은 작은 불탑을 만들어 탑 안에 넣고 주문(呪文)을 외우면 무수히 많은 사리탑을 만드는 효과를 가져와, 중생들은 수명을 연장하고 모든 병(病)이 사라져 재앙이 소멸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동쪽 탑은 대부분 후대에 보강하여 석재의 비례와 수법이 조화를 잃고 있지만, 서탑과 거의 같은 형태로 이중기단에 상층과 하층의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새기고, 우주(隅柱)가 새겨진 탑신석(塔身石)과 4단의 받침이 있는 옥개석을 각 1매석으로 구성하였다. 옥개석의 전각부(轉角部)에는 풍탁을 달기 위한 홈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서쪽 탑은 동탑(東塔)과 동일하게 이중기단에 상층과 하층에는 중석과 갑석을 갖추고, 중석의 각 면에는 탱주를 새겼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철제 찰주의 원형만이 남아 있다. 이 서탑은 1957년 해체, 보수할 때에 1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舍利孔)에서 99개의 소탑(小塔)을 비롯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수마제전 須摩提殿
수마제전(須摩提殿)은 금당암의 극락전 뒤에 있는 당우이다. 수마제(須摩提)는 서방극락을 칭하는 별명(별명)으로 '묘의(妙意)' 또는 '호의(好意)'로 번역한다. 따라서 수마제전 또한 극락전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건물로 1702년(조선 숙종 28)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대형 금동불(金銅佛)로 알려져 있는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있다.
건물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널찍한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초석(礎石) 위에는 원형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결구한 다음 다포계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외2출목이며 주간에는 주간포 2구를 설치하였고, 맞배집인 까닭에 측면 공포는 두지 않았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쓴 겹처마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반자를 가설하였는데, 한 가운데에만 우물반자는 크게 만들고 청룡을 그려 넣었으며, 전면에는 간단한 운궁형(雲宮形) 닫집을 달아 장엄하였다.이 수마제전은 소규모 건물이지만, 조선 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아미타불좌상 阿彌陀佛坐像
수마제전 내부에는 조선시대 초기의 대형 금동불(金銅佛)로 알려져 있는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를 금으로 도금(鍍金)된 철불(鐵佛)로 보는 견해도 있다. 크기는 높이 175cm의 규모로 수마제전 내부 중앙 석조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으며, 원래의 소재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얼굴은 통통한 둥근 형태로 살짝 치켜 올린 눈썹사이에는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고,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낮고 둥근 육계와 중앙계주가 묘사되어 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허리도 길게 표현하였으며, 비교적 길게 표현된 목에는 굵은 띠 모양의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법의(法衣)는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쳤는데, 두 어깨에서 흘러내린 띠처럼 균일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가슴 아래에서 'U'자형을 이루고 결가부좌한 두 다리에서 원호(圓弧)형을 이루고 있다. 가슴에는 돌출된 유두(乳頭)가 묘사되었으며, 그 아래로 띠매듭으로 고정한 내의가 표현되었다. 두 손은 중지와 엄지를 맞댄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을 결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고, 왼손은 허리 높이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였다.
|
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