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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양파
EBS 역사복원 대기획 3부작
사비성, 사라진 미래도시 3부
◆ 지난 이야기
475년 백제는 건국 사상 최고의 위기를 맞습니다.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을 뺏기고 왕은 피살되지요. 남으로 쫓겨 내려온 것이 웅진성. 지금의 공주입니다. 주변이 험한 산새로 둘러싸인 철옹성이었죠. 왕이 살해당하는 역사를 지나 웅진성 4번째 왕 무령왕 때에 이르러서 백제는 중흥을 맞습니다. 늘어나는 인구, 좁은 땅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위업을 맞게 된 사람은 나중에 성왕으로 불리게 되는 이제 갓 스물이 된 명농이었지요. 그가 새로운 땅을 찾습니다. 왕실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 이상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땅. 넓고 황폐한 들, 성왕의 꿈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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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 사라진 미래도시 3부
1400년 전, 성왕이 꾸었던 꿈을 봅니다. 세월은 많이 지나 빛이 바랬습니다. 성왕이 미래를 찾았던 곳에서 과거를 찾는 사람들, 부여는 오랫동안 감춰왔던 제 얘기를 하기 위해 이들을 불렀습니다. 21세기 부여는 인구 10만으로 작은 군입니다. 어디에서도 천년 고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나라가 어떻게 쓰러져 갔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죠. 왕조는 사라졌지만 삶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부여의 옛 이름 사비를 구지 떠올리는 것은 이 영원한 삶을 가능케 한 기원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여로 가는 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여행입니다. 먼 옛날의 사비가 속살을 드러내고 기다립니다. 119 안전센터를 지으려다가 발굴한 유적지 뜬금없이 천 년 전과 맞닥뜨리는 이런 일이 부여에서는 종종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목관 한 점, 신발 한 쌍, 칠기 등은 백제 역사의 둘도 없는 귀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한 것은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박순발 교수 / 충남대 고고학과
"이 무렵부터 사비시대 백제층에 해당되는데 반복적으로 모래가 수평으로 퇴적되는 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평 퇴적층은 물에 의해서 범람에 의해서 형성된 층이기 때문에 사비 시대 당시에도 부여시내에는 상당히 물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물이 나온 땅 아래는 전부 흙색에 가까운 저습지 퇴적층입니다. 사비는 습지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얘기죠. 부여 그러니까 사비는 사람도 살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는 버려둔 땅이었습니다. 습지에 새로운 도읍지를 세운다. 찬성과 반대가 불 같았을 것입니다.
"폐하, 사비는 지반이 낮고 습해 수시로 물이 차오르는 땅이옵니다. 건물을 지으면 땅이 내려앉기 일쑤고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죽음의 땅이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좌평 해씨)
"또한 사비는 웅진에 비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기 어렵사옵니다. 폐하." (좌평 진씨)
"사비가 불리한 땅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요. 허나 이를 극복한다면 최고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요." (성왕)
박순발 교수
"(수도로) 사비를 왜 택했느냐 하는 것은 결국은 도시의 기능, 도성의 기능에 필요한 땅, 넓은 땅을 얻을 수 있는 곳 그 이전에 인구의 집중지가 아닌 곳."
이왕기 교수 / 목원대 건축학과
"습지가 50% 이상이 되는데 가자 그랬으면 아마 성왕도 찬성하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습지는 있지만 이걸 잘 이용하면 땅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이동주 박사 / 부여군 문화재보존센터
"역으로 생각한다면 사비 주변에는 토호세력들이라든가 귀족들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도학 교수 /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성왕이 천도할만한 지역을 탐색하다가 부산이라는 산에 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산에서 보니까 백마강이 휘감아 돌고 있는 지형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죠. 백마강의 3분의 2정도를 감싸고 있는 듯한 지형은 굉장히 유리한 점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선박이 이 도시 어느 곳이라도 정박할 수 있는 곳이고요. 게다가 아무 때나 배를 타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지역이고, 또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이 백마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해준다."
백마강이 감싸 안은 땅, 백제는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웁니다. 왕궁만 옮기는 게 아니라 아주 도시 전체를 세우는 계획을 세웁니다. 한반도 최초의 계획 신도시를 생각한 것이죠. 무엇보다 습지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저수지를 만든 건 그 해답이었죠.
이왕기 교수
"옛날 사람들은 그걸 알았던 거예요. 습지가 도시 근처에 있으면 유리하다는 걸 알았던 거죠. 요즘으로 말하면 생태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옛날 사람들은 거기서 물을 얻어 쓰고 그 다음에 비가 많이 오거나 장마가 질 때는 물을 저장할 수가 있고"
당시에 사비엔 몇 개의 대형저수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 원형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곳은 무왕이 만든 궁남지입니다. 백제 무왕이 만들었지만 원래부터 저수지 형태는 있었을 것이라는데요. 사비의 저수지는 주변 하천과 연결돼 습지대의 물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쉬었다가는 쉼터입니다. 여길 찾는 사람들은 이 저수지가 만들어진 연유를 알까요.
김영주 / 충남부여
"부여에서 연꽃이 많이 피는 곳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자주 와요."
이장진 / 충남부여
"여기에 사는 귀족들을 위한 놀이시설, 이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을까?"
김정미 / 서울 동대문구
"다른 기능이요? 글쎄요. 아무래도 왕 궁전? 잘 모르겠는데요.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사실 궁남지는 백제가 흥청망청하다가 망한 나라라는 인상을 더해줍니다.
이동주 박사
"백마강이 인접해있기 때문에 홍수에 대한 대비가 가장 1차적인 목표였을 것 같고요. 저수지나 연못을 조성함으로써 만들어진 흙은 도성을 건설하는데 유용하게 활용했을 겁니다."
사실 역사를 몰라도 이 저수지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사비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됐다는 것을 알면 이 풍경은 새삼스러워지죠. 여기에 물을 담기 위해 파낸 흙을 땅을 다지는데 쓴 것을 보면 일석이조였습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다져야죠. 달구라는 도구로 다지는데 먼저 일정한 깊이로 흙을 파내고 다시 흙을 뿌려서 단단하게 다집니다. 판축 흙에 석회와 마사를 섞거나 점토질 흙을 섞으면 나무뿌리도 침범하지 못할 만큼 단단해집니다. 그 든든한 토대 위에 사비가 들어섭니다. 한반도 최초의 계획 신도시에 서막이 이제 올랐습니다.
박순발 교수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굉장히 큰일입니다. 중국 역대 왕조를 보더라도 천도는 왕조가 바뀌고 아주 국력이 창성할 때 이루어진 사업이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제사 전체에서 사비에 신도시를 만들고 천도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도학 교수
"당시 백제 초미의 관심사는 고구려의 남진압박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국가의 생존을 도모해야한다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고 자연적인 지형지세 같은 것이 수도의 1차적인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고..."
"병사를 주겠다. 좌평 해용은 고구려 군을 물리치고 백제를 구하라." (성왕)
백제는 강대국인 고구려를 상대한 나라입니다. 그만큼 강했고 또 그만큼 약했죠.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1)은 건조합니다.
이왕기 교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이야기와 그걸 증명해줄 유적이나 유물이 있을 때 이야기가 드라마틱하죠. 백제는 3번에 걸쳐서 천도를 했고 또 멸망하기 전에 저항했기 때문에 철저히 파괴된 역사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야기가 있어도 그걸 증명해줄 유물이나 유적이 그렇게 많지 않죠."
올 여름 내내 이도학 교수는 백제사의 여백을 채우러 다녔습니다. 백제사 연구는 몇 줄의 글에서 그 행간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웅진성엘 가보면 역사서에 나오지 않은 백제의 고뇌를 알 수 있습니다. 지대가 높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지어진 성,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백제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웅진시대 5번째 왕은 평화롭게 등극했습니다. 그는 곧 치욕스럽게 쫓겨 왔던 이 웅진성을 떠나게 되지요.
"백제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천도는 지체할 수 없는 일이요. 선대왕들의 뜻을 받들어 천도를 시행하겠소." (성왕)
"폐하, 지금은 군사력을 키워 잃어버린 수도 한성을 회복시켜야 될 때입니다. 천도로 국력을 분산시켜서는 아니 되옵니다. 더불어 선대왕께서도 중차대한 사안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진 아니하셨사옵니다." (좌평 해씨)
이왕기 교수
"저는 성왕을 만나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을 봤을 때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굉장히 결단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고 또 시대를 앞서가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박순발 교수
"성왕이 천도를 하고 난 뒤에 잠시지만 나라 이름을 바꾼 적이 있죠. 남부여라고. 여러 가지 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로서는 나라 이름까지 바꿀 정도의 말하자면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라고 볼 수 있는 그런 건 틀림이 없습니다."
"백제는 한반도의 끝자락의 나라가 아니요. 우리 백제는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갈 수 있고 바다 너머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소.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고 천도를 단행하겠소." (성왕)
일본 법륭사에는 성왕의 얼굴을 본 떠서 만들었다는 구세관음상이 있습니다. 그의 성품이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이동주 박사
"성왕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군왕인 전륜성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왕으로 불렸다는 것은 결국에 백성들에 의해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불렸다는 것이죠."
"자네, 소문 들었는가? 왕이 웅진을 떠난다는구먼." (백제의 어느 한 백성)
"천도, 사비라고. 죽은 땅이라며. 전쟁 끝나고 이제 편히 사나 했지만..." (백제의 어느 한 백성)
민심을 사로잡는 것도 왕의 자질 중 하나입니다. 전쟁을 겪고 이제 겨우 평온해진 백성들에게 또 어딘가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겁니다. 새로 가야할 그곳이야 말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득해야 합니다. 성왕은 아마 이런 점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을 겁니다.
이도학 교수
"(일본서기에) 천문지리에 신묘하게 통달했다. 이것은 상당히 식견이 원대하고 또 사비도성을 조성할 만한 그리고 귀족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그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가치라든지 또는 지식 이런 것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요."
사비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웅진에 세력 기반을 가진 귀족들 그리고 남하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 그들을 설득해야 만이 실질적인 천도가 가능했지요. 그는 그들에게 어떤 미래상을 보여준 것일까요.
박순발 교수
"고대사회에서 비전 제시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것은 사실 상상하기 쉽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치는 것을 보면 고구려와 더불어서 부여족의 공통후예라는 의식들이 상당히 있었을 거예요. 그러한 의식들이 다시금 사비 천도 무렵에 필요했던 것은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백제 백성이었지만 한두 세대 정도 고구려 치하에 있던 백성들도 많았을 거고."
웅진에 한계는 곧 백제의 한계였습니다. 사비 신도시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성왕이 내린 해답이었습니다. 성왕이 빈들에 사비성을 세운 것처럼 우리는 사라진 사비성을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처음 성왕이 고민했던 것처럼 집하나 길하나 일일이 고민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1400년 전의 사비천도를 짐작해 봅니다. 사라지고 잊힌 백제사는 이렇게 다시 살아납니다.
1982년 백제의 왕궁 터로 추정되던 곳이 발굴되면서 사비의 역사는 한발 전진하게 됐습니다. 1992년 조사 때는 건물터, 하수도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이 지역이 왕궁 터라는 추정을 더 확실하게 해주었죠. 이렇게 사비는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옛 왕성 사비를 그래픽으로 재현하는데 작은 단초가 됐죠. 재현하는 일은 도성을 구성하는 왕궁과 집의 기와 하나 하나까지 알아야 합니다. 고건축을 연구하는 이왕기 교수는 작은 기와장 하나 하나를 붙여 사비성 전체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왕기 교수
"백제 건축을 구체적으로 만들려면 뭔가 근거가 있어야 되겠다. 그러한 여러 가지 기록이나 유적, 유물 이런 것 중에서 백제시대에 만들었던 부여에서 출토된 청동탑편이 있습니다."
청동 탑의 기와와 창문 모습. 이것 하나로 왕궁을 만듭니다. 고증과 최첨단 그래픽 기술이 21세기 사비를 재현했습니다. 6세기 사비성에 있었던 왕궁입니다. 왕궁은 부소산성 아래쪽에 들어섭니다. 그 배치와 구도는 당대 모든 건축의 모델이었던 양나라 건강성을 참고 했습니다. 궁궐의 정문인 남문을 지나 처음 대하는 공간이 남궁입니다. 대소신료들이 여기서 국정을 논의하지요. 남궁을 지나면 왕궁의 핵심 구역인 중궁, 중궁에는 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이 있지요. 중궁 뒤로는 왕과 왕족들의 생활공간인 북궁입니다. 북궁 뒤는 후원으로 연결되는데, 바로 저기 성벽이 보이는 곳이 부소산성입니다. 부소산성에서 보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지요.
이도학 교수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계획도시가 되고 평지에 도성이 조정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한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5개의 큰 부로 나누고 거기서 항이라고 하는 이름하에 작은 구간들이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조성이 되는 이러한 도시 모습을 지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죠."
시가지는 신분에 따라 사는 구역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치 즉 예로 백성을 다스리겠다다는데, 예에 가장 존엄한 자리엔 왕이 앉아 있게 되죠.
이도학 교수
"백제왕이 귀족들에 대해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그들의 공간적인 범주가 정해져 있다라는 것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에 귀족들에 대한 백제앙의 권위랄까 이런 것이 부지불식간에 침투해서 귀족들이 왕에게 종속되는 그런 심리적인 규제 이런 것까지도 (도시설계에) 계산하지 않았겠는가."
옛 길의 흔적을 겨우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동래 한가운데에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유적지. 남북으로 정확하게 각도를 잡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지 재보았습니다. 자북과 진북의 차이가 원래 6.5도 그런데 10도입니다. 불과 3.5도 오차. 백제의 기술은 거의 정확하게 북쪽을 찾아 격자형 도시를 세웠습니다. 격자형 도로는 현대 계획도시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이동시간을 최소화 하고 도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사비성은 현대의 계획도시와 그 틀이며 형태가 흡사합니다. 사비성은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된 미래도시죠. 사비가 격자형 도시로 계획되었다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다른 고대도시처럼 도로 양측면을 이용해 배수처리를 했는데 그 배수로가 직각으로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이동주 박사
"이곳이 동서와 남북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지점인데요. 현재 보시는 바와 같이 약 90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배수로를 갖춘 이 도시는 당연하게 상하수도 시설도 있었습니다.
박순발 교수
"계곡 같은 데서 흘러내린 물을 집수하고 그것을 정화해서 수량을 확보하는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그 예가 많지가 않습니다. 목조의 수조 두 개를 연결시켜서 일차적으로 침전을 하고 다시 아래쪽에서 정화된 물을 다시 모아서 사용하는 그런 사례가 확인된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은 4m 크기에 대형 목곽 수조에 일차적으로 걸러집니다. 그리고 40m 길이로 연결된 기와 상수도관을 통해 다시 두 번째 수조에서 걸러져 우물로 흐릅니다. 고대사회에서 천도는 국가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자금과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죠.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는지 기록은 없지만 추산은 할 수 있습니다. 사비와 시기적으로 당나라 통전이라는 책에는 성을 쌓는데 필요한 인력이 나옵니다.2) 이것을 현대식 도량형으로 환산한다면 한 명의 공사인부가 하루의 0.6세제곱미터의 성을 쌓는 셈입니다. 높낮이의 차이는 있지만 일정한 구간을 표준으로 정한 뒤 계산을 하게 되면 나성 공사에 들어간 인력을 어림잡을 수 있지요.
박순발 교수
"사비나성 전체의 총 연장이 6.3km 정도입니다. 총 연장의 성벽의 단면 이것을 말하자면 적분하는 방식으로 하면 되겠죠.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림잡아 보자면 연 인원 약 2백만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백제 멸망 당시 인구 기록이 76만호 380만 명입니다. 나성 공사에 200만 명이라면 인구 절반이 넘는 인력이 동원됐다는 얘기죠. 산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백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박순발 교수
"이 전체 조사 구간은 약 300m 가까이 됩니다만 발굴 조사를 통해서 정확히 축조 과정과 축조 내용을 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대개 평지의 경우에는 내측의 토축 부분을 두고서 그 토축 부분을 기대어서 성 바깥부분을 돌로 쌓는 그런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역시 전체를 돌로 쌓는 것에 비해서 다소 공력이 덜 들 수 있는 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성벽 축조 방식은 백제의 사비 천도 이전에는 없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성. 이것이 백제 식입니다. 도시는 사라졌지만 성벽은 1400년을 견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라진 도시 얘기를 다시 할 수 있는 단초가 돼 주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맞추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성왕의 사비천도 역시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거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백제와 존재와 역사를 증명하고 싶었던 이야기, 사이버 시티(City) 사비가 그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백마강 어귀의 나루터는 관광객으로 늘 붐빕니다. 6세기였다면 지금 이곳은 외국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비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지금은 나룻배가 떠다니며 백마강 인근에 관광지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백마강을 보면 좁다란 것이 6세기 국제도시는 아무래도 좀 과장됐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도학 교수
"지금의 백마강은 이제 천수백 년 간의 세월이 흘러서 퇴적이 많이 되어 큰 배가 운항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백제 때는 지금보다 강폭이라든지 수심이 훨씬 깊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부여 백마강에 배가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3) 백마강 어귀엔 넓은 항구가 있었을 겁니다. 성왕은 일찍이 이곳에 국제항을 염두 해두었습니다. 백제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당나라로 가는 배를 백제에 주문했을 정도죠. 사실 이건 만이 좁아져 버린 백제의 위용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밀려난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성왕은 대안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항구엔 외국인을 위한 숙박시설도 만들었죠. 바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성왕이 던질 수 있는 최대의 승부수였습니다.
이도학 교수
"백제의 문물들이 굉장히 번창했고 특히 왜에 보내는 물산 가운데 말하는 앵무새라든지 그리고 또 노새라든지 낙타라든지 그리고 흰 꿩이라든지, 이런 진기한 물산들 특히 남방 물산들까지도 백제에 들어와 왜로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가 어디까지 진출했는가는 여전히 흥미로운 백제사의 연구 주제입니다. 한성을 뺏긴 이후로 좁아져 버린 백제는 국토를 바다 밖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씁니다. 역사에 나타난 백제의 흔적은 국내보다 더 유명한 백제를 짐작케 합니다.
이도학 교수
"수서라는 중국의 역사책에 보면 백제 땅 안에 중국인, 왜인, 신라인, 고구려인이 섞여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만 살았겠습니까? 그밖에 동남아시아 사람이라든지 주변의 사람들이 부여 땅에서 살았고 외국인들이 더불어 사는 국제화된 도시고 동아시아의 중심지로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부여는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538년 백제는 사비로 수도를 옮깁니다. 그리고 123년 동안 화려한 시절을 보내죠. 그리고 그 후 1400년을 잊혀진 도시로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이왕기 교수
"부여를 함축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뻘 속에 묻혀 있는 진주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소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여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부여에는 땅속이든 지상이든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백제의 정보와 이야기가 들어있는 거죠."
이동주 박사
"현재 여러 발굴조사와 함께 문화유적의 정비, 또 세계문화유산의 지정 준비 이런 여러 가지 활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0년, 20년 후의 부여 모습은 현재와 또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도학 교수
"망한 나라, 의자왕이 흥청거렸던 그런 공간,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삼천궁녀, 백제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랄까 선입견을 세척하고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부여가 갖고 있는 위상을 제대로 점검할 수 있는 그런 노력..."
1400년 긴 잠에서 지금 사비가 깨어납니다. 사라졌던 미래 도시, 그 도시가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이 도시의 가장 화려한 시절은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글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EBS 다큐프라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우리 기억 속에 잊힌 1400년 전 사비의 모습을 다시 생생히 보여준 이 다큐입니다. 백제를 알아 가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지금 행사를 열고 있는 부여와 공주를 꼭 탐방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주)
1) “529년 10월, 백제 보병, 3만 명이 오곡원에서 전투를 치뤘으나 전사자를 2000여 명 내고 패했다.” 삼국사기
2) “구십삼 장 칠 척 촌의 성을 쌓을 때 매일 흙을 2척씩 쌓는다고 가정하여 계산하면 47명이 필요하다.” 통전 공사인력 추산 부분에서...
3) “부여부터는 조류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 백마강 일대까지는 모두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택리지(이중환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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