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일은 하기 싫은 인간
나는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는 인간 축에 속합니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논이나 밭에 가서 풀이라도 뽑고 매실나무에 돋아난 쓸모없는 가지들을 잘라내는 전지작업이나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의 정신과 육체 건강에 유익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남들이 존경하고 우러러 볼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는 일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그 허망한 것에다가 소중한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다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특히 문학이나 종교 같은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그런 경우가 아주 많이 발생 합니다. 그건 일찍이 머슬로우 교수가 이야기 한 인간욕구 발전 단계에서 빚어지는 갈망(욕구불충족/목마름)이 만들어 내는 현상입니다. 인간 욕구발전 단계설은 경영학에 나오는 이야기임으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만, 문학의 영역에 들어와서까지도 이런 하급의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혼들이 상당하기에 머슬로우 교수가 말한 “인간욕구발전 5단계 설”을 정리해 두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제 1단계가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초적인 욕구입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욕구, 배설과 성생활(종족번식)에 관한 욕구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이게 충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끝임 없이 동물적인 탐닉에 빠지게 됩니다. 약탈, 폭력, 성폭력(강간), 같은 행위들이 만연하는 저급한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이런 원초적인 욕구 불충족 때문에 일어 납니다.
이 단계는 동몽선습, 명심보감 같은 윤리 도덕 교육이 집중적으로 필요하고, 이웃의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한 어린아이 단계입니다. 성인이 되어서(강력한 힘을 가지고서도)까지도 정신 수준이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 격리(정신과적인 치료)가 필요 합니다. 빅톨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쟌의 어린 시절 모습과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성당의 은촛대를 훔칠 때의 상황이 이 단계에 해당 합니다. 죄와 벌, 욕구 불충족에서 빚어지는 증오 그리고 사랑, 냉정한 법 집행과 은혜로운 변신 이런 이야기들이 <<레미제라블>> 전편에서 전개 되는 데, 머슬로우 교수의 욕구발전 단계설 그대로이니 꼭 일독을 권합니다.
제 2단계는 안전의 욕구입니다.
내일(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위험으로부터의 자기 보호, 지금까지 자신이 이뤄 놓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지속과 현재 상태의 보전 등과 관련된 행위를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 욕구는 현재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는 것을 못 견뎌 하는 욕구이기도 합니다. 이 욕구 충족을 위해서 각종 사회 보험이 생겨 납니다. 힘이 센 자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뇌물이나 촌지를 가져다 바치는 행위도 안전의 욕구 충족을 위한 행위 입니다.
제 3단계는 사회적 욕구입니다.
어느 집단이든 조직에 속하게 될 때 비로소 존재감과 편안함을 느끼고 조직 속에 적극 소속되고자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은 ‘로빈손 크루소’처럼 혼자 살수가 없기에 가족, 친구, 애인, 동료 등과 친근하게 사랑을 나누면서 살고자 합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져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소속에서 버려질(내쳐질) 때 몰아쳐오는 사회적 욕구 상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수필문학단체의 온갖 모임에 지쳐서 그만 빠져 나오고 싶어도 못빠져나오는 이유도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욕구상실이 두려워서 인간은 스스로 멍에를 지고 노예를 자처 하기도 합니다. 헤르만 헷세는 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를 조종하여 절도를 행하게 하고 도덕적 모호성과 기만의 세계로 인도하는 프란츠 크로머를 통해서 이걸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사회적 낙인( 세칭 뒷다마까기)을 찍는 <<주홍글씨>> 도 이 욕구단계의 소설입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도 자유로운 인간의 영혼을 이 욕구 단계에 가두고 있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에 대한 성찰이자 저항입니다. 공천권을 꽉 틀어 쥐고 있으면 충성을 바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 사회적 욕구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을 가두는 "인형의 집(입센)"입니다.
제4단계 욕구부터는 동물들과는 다른 고차원의 욕구로 진입하는데, 존경의 욕구가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고 스스로 긍지나 자존감을 가지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건 명예심과도 같은 데,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고, 감투를 씌워주면 적극적으로 일하게 되는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남 앞에서서 마이크 쥐고 말하길 좋아 하는 욕구는 존경의 욕구 불충족 때문에 열심히 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용을 쓰고 있는 행위 입니다. 나폴레옹은 양철쪼가리에 불과한 훈장을 만들어서 수여 하는 것으로 부하들을 조직에 충성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존경의 욕구를 버렸을 때 비로소 마지막 제 5단계의 욕구로 넘어가게 됩니다.
마지막 제 5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인간 욕구 단계에서 최종 단계로 전 4단계의 하급적인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고결한 인격과 영혼이 되려는 욕구입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구열, 문학에 대한 깊은 심취, 절대자를 행한 거룩한 신앙심 같은 동기가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 발현입니다. 우리 작가들의 욕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등단 작가가 되어서도 1, 2, 3, 4 단계의 저급한 욕구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육의 궁극의 목표는 바로 이 자아실현에 두고 있습니다. 자아실현형 인간은 남들이 시켜서 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잘 해나갑니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일 그 자체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어서 창의적이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자유인이 자아실현형 인간 입니다. 우리가 저 높은 곳을 향한다고 할 때 그 높은 곳이 바로 여기 자아가 실현되는 단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우리 작가들만큼은 1, 2, 3, 4 단계의 저급한 욕구 정도는 훌쩍 뛰어 넘어서 “자아실현” 욕구에 매진하시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비록 저급한 욕구 충족을 위해 일하고 있는(밥벌이의 지겨움에 빠져있는) 처지라고 하더라도, 작가라면 적어도 욕망의 하급 단계인 전 4단계욕구 정도에 포로(노예)가 되지 말고, 마지막 최상급의 욕구인 자아실현의 길로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이걸 문학적으로 멋지게 그려낸 소설이 있는데 ‘리차드 버크’가 쓴 <갈매기의 꿈>입니다. 이런 인간 욕망의 발전 단계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영혼의 내적 갈등을 헤르만 헷세는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모든 문학은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는 세계 입니다. 여기서 신은 영혼이 자유로운 세계의 상징입니다. 제가 쓰는 북토크! (혹은 수필작품)가 독자님들께 유익합니까? 인간의 욕망 단계를 성찰하고 계시면 수도 없는 글감을 만나실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이 의미 있는 글이 되지 못했다면 오늘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되는데 독자님들 스스로가 판단할 일입니다.^^
(사족 중의 사족이지만 아니 달 수가 없어서 사족을 답니다/ 작가님들이 쓰시는 글이 독자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봐가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훌륭한 문심을 지닌 문우와 문정교류는 필요한 일이지만 너무 많은 문학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글쓰기에 독이 됩니다)
첫댓글 참 훌륭한 글이구나 싶습니다.
작가가 진정 작가다우려면 자아 실현을 위한 목적으로 글을 써야지 허명놀이를 위한 수단으로 글을 써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저의 한결같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