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 내외분과 딸네와 함께 양평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노랑 금계국과 붉은 끈끈이 대나무꽃이 한창인 종자골로 사돈을 모셔서 고기를 정성스럽게 구워드리고 싶었다. 텃밭에서 바로 딴 싱싱한 상추를 대접하고 싶었다. 텃밭을 가꾸는 우리 부부만의 극진한 손님 대접이건만, 사돈을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끝내 사양하셨다. 사위와 딸도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자주 들르는 해물 순두부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사위가 광명에 가서 사돈 내외를 모시고 왔다. 사돈 내외분은 연예인 못지않다. 바깥사돈은 풍성한 퍼머머리를 휘날리며 청바지에 진한 감색 자켓을 입으셨다. 거기다가 옷 빛깔에 썩 잘 어울리는 엷은 빛깔 스카프를 매셨다. 키가 큰 안사돈은 흰색 티와 흰색 겉옷에 청바지를 입으셨다. 다음날에는 분홍빛 티에 분홍빛 모자였는데 특히 모자를 쓴 자태가 중년의 영화배우처럼 기품이 있었다. 얼굴은 작고 다리는 유난히 길어 보기 좋았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도 평범한 옷차림이다. 멋과는 거리가 있다. 텃밭을 자주 오가고 산을 좋아하고 나이까지 먹으니 편안한 옷에 길들여 있다. 사돈을 만나는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닌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소심한 나는 은근히 염려 중인데, 눈치라도 채셨는가. 바깥사돈은 말씀하셨다. 내가 편하고 자유로우면 되지 누군가의 시선이 무엇이 문제인가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키가 작든 못생겼든 문제가 안 되지요. 대머리면 어때요 누가 그렇게 신경을 쓴답니까. 본인만 집착하는 거지요. 맞아요 맞아요 나는 사돈 앞이라는 것도 잊고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해물 순두부는 다행하게 모두의 입맛에 잘 맞았다.
종자골로 갔다. 봄부터 남편과 내가 부지런히 잡초를 뽑고 꽃을 심고 모종을 가꾸어 온 종자골이다. 손님이 오는 날이면 늘 그러하였듯 사돈네를 만나기 전 한 시간 일찍 와서 우리 부부는 빗자루질을 열심히 했다. 탁자며 의자를 물걸레로 깨끗하게 닦았다. 나는 방을 정리하고 수돗가를 정리했다. 꽃들은 싱그럽게 피어나 있고 텃밭에 작물들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 앵두나무에는 잘 익은 앵두들이 붉은 꽃처럼 달렸다. 붉은 백합 한 송이가 손님맞이라도 하듯 귀하게 꽃봉오리를 펼쳐 들었다.
두 분은 종자골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하셨고 그때마다 남편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바깥사돈은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하셨다. 농장에 대해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즐거워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높아졌다. 시원한 단풍나무 그늘에 의자를 놓고 차와 과일을 대접하였다. 산들산들 바람이 기분 좋게 지나다녔다. 부드러운 표정의 얼굴이며 말을 건네는 모습이 사돈이라기보다는 언니 오빠처럼 다정하고 편해서 이야기꽃이 무궁무진 피어나고 웃음꽃이 벚꽃잎처럼 휘날리는데. 그때 사위가 회사에서 준 복권이라며 우리에게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준비성이 많은 사위는 동전도 나눠주었다. 긁어보세요. 위쪽부터 먼저요.
회사에서 준 복권이라고? 우리는 회사에서 부모님들께 선물을 주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일등이예요 할아버지 당첨이래요. 남편이 웃었다. 할머니 당첨인데요 안사돈이 쾌활하게 웃으셨다. 복권을 긁기에 불편한 자세라서 나는 좀 늦어졌는데 나도 할머니 당첨이 나왔다. 바깥 사돈은 안경을 꺼내느라 좀 더 늦어졌다. 아직도 모르셔 모르셔 딸아이가 안타깝게 말해도 사돈네와 우리 부부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어리둥절한 웃음소리만 요란하게 퍼졌다.
그때 남편이 손가락으로 딸 다움이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곧 만나재요 무슨 말이죠? 재가 재가. 그 말만 반복해서 더듬거렸다. 아이를 가졌어요 라는 말을 하기 일보 직전 나는 알아챘다. 내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영상은 여기에서 멈췄다. 동영상을 찍던 딸아이를 정신없이 다가가 내가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딸아이 눈에 흥건하게 고여있던 눈물은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내게 기록되었다. 안사돈도 딸아이를 꼭 안아주셨다. 등을 두드려 주셨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축복과 사랑을 나중에 아이에게 보여주려구요 태명은 반반이예요. 다움이 둥글고 환한 이마와 제 우뚝한 코를 닮았으면 해서요. 딸과 사위의 반반이에 대한 향기롭고 풋풋한 사랑에,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내 가슴이 징 울렸다. 남편 특유의 웃음소리 허허허 에도 흡족함이 듬뿍 묻어났다. 사돈 내외분의 얼굴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상기되었다.
반반이를 맞이한 기쁨과 행복은 여행 내내 함께였다. 용문산 녹음이 짙은 긴 산책길에서도, 1100년 나이에도 푸르고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에 압도되어 엎드려 절하고 싶어지는 동안에도, 다움과 홍길을 가운데 앉히고 최고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장어와 돼지갈비와 소주를 곁들여 먹던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에도, 평소에는 술 한 잔 놓고 분위기만 맞추던 남편이건만, 술을 즐기시는 사돈과 건배를 연발하며 네 잔째 마시는 동안에도,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기쁨과 행복은 우리 곁에 나란히 누웠다.
다음날 강 건너로 기차가 지나가는 아침 샛강을 끼고 콘도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도, 세미원 징검다리를 건너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한 연꽃을 구경하는 동안에도, 김정희의 세한도에 대한 바깥사돈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마주 앉아 입을 크게 벌려 핫도그를 먹을 때에도, 물고기가 떼를 지어 다니는 강을 오래도록 마주할 때에도, 남편이 물통을 던져 똑바로 세웠을 때 다섯명이 폭탄이 터지듯 한목소리로 환호했을 때에도, 정갈하면서도 구수한 맛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헤어지기 직전 헤어지기 섭섭해요 라고 소심한 내가 용감하게 말을 하여 모두 웃었던 순간에도, 기쁨과 행복이 함께였다. 반반이가 함께였다.
한 생명이 잉태되어 우리 곁으로 오는 일, 이만한 찬란함이 있을까. 이만한 축복이 있을까. 이만한 위대함이 있을까. 이만한 선물이 있을까. 이만한 감사함이 있을까. 사돈네와 우리 부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 나이를 오래전에 넘어섰으니. 더욱 간절한 소망이었다. 엄지 척을 힘있게 들어 올리게 되는 감사하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글을 쓴다고 십여 년 넘게 활동을 하였지만 애석하게도 요즈음은 시의 샘 줄기가 막혔는지 막막하던 차인데, 반반이의 소식을 듣자마자 막혔던 시의 샘이 시원하게 뚫리기라도 했는가. 다음과 같이 내게 찰랑찰랑한 글들이 고여 들었다.
반반아!
2023년 6월 6일 2시
외할아버지 농장 단풍나무 푸른 그늘에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네 어미와 아비가 모였구나
푸른 나뭇잎은 살랑대고 노란 금계국 피어났구나
네 아비가 복권 한 장씩 나눠주었지
회사에서 상품으로 준거예요 긁어보세요
회사복권인 줄 알고 열심히 긁었구나
할아버지 당첨! 할머니 당첨!
어안이 벙벙한 채 궁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웃었구나
아직도 모르시네 네 어미와 아비가 재미있어했지
곧 만나재요 무슨 말이죠? 재가요 재가요
외할아버지가 더듬거리며 네 어미 가르치는 순간
외할머니가 박수 치며 벌떡 일어섰구나
눈시울 붉히며 네 어미 끌어안았구나
네 어미 맑은 눈에 눈물 그렁그렁했지
할머니도 달려가 네 어미 꼬옥 안아주었지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와 네 아비
세상 거머쥔 남자의 득의만만한 표정이었지
네 어미와 아비가 말했구나
태명은 반반이예요 저희 둘 좋은 점 닮으라구요
박수소리와 웃음소리에 단풍나무들 어깨춤 추더구나
초음파 영상 보고 네 어미 자랑스레 말했단다
심장 박동이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나요
외할머니 듣기에는 지축 흔드는 굉음이로구나
내 심장까지 쿵쿵 울려 어디든 따라다니는구나
반반아! 반반아! 건강하게 잘 크거라
2024년1월14일에, 눈부신 첫 눈맞춤 하자꾸나
네 앙증맞은 분홍빛 발가락에 첫 입맞춤 하자꾸나
반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