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소개
정선호 시인의 이번 시집은 ‘바람’과 동행한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절로 흘러가는 ‘바람’의 생래는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모질게 때로는 포근하게 때로는 강퍅하게 모든 존재들과 동행한다. 정선호는 ‘바람’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며 ‘바람’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말하자면, 정선호에게 ‘바람’은 세계이며, 세계는 ‘바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바람’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하여 불어대는 그것이 아니라 지구의 “남반구 바다에서불어와/더 많은 땀을 내는 이국의 바닷길에서”(「밀림 속을 달리다」) 감각하는 그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남태평양의 ‘바람’과 시인은 동행한다.
그야말로 태풍 전야다
남태평양 바다는 여름이면 많은 태풍을 만들어
중국과 일본으로, 한국에도 보내곤 하는데
태풍이 오기 전날은 활시위를 당긴 궁사처럼
모든 것이 팽팽한 긴장을 하고 무언가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태풍 오기 전날엔 내 마음도 서서히
그동안 모아두었던 긴장감을 한 곳으로 모아
강한 바람과 비를 만들고 회오리를 만든 후
고국의 어머니와 가족, 채소와 가축에게 보냈다
내 마음의 태풍은 고국을 돌아 소멸되지 않고
우주를 향하게 되었는데 먼저 달에 도착했다
달에 도착한 태풍은 계수나무가 있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달에 처음으로 비를 내리게 하자
토끼들은 신이 나온 대지를 뛰어다녔다
대지엔 식물과 곡식이 자라나 굶주리며 살았던
토끼들에게 양식이 되었다
태풍은 소멸되지 않고 살아 화성에도 도착했으며
화성을 지나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갔다
내 마음의 태풍은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
평화와 안녕의 메신저가 되어 모든 별을 향했다
― 「내 마음의 태풍」 전문
남태평양 바다에서 생성되는 태풍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말 그대로 태풍 전야는 “모든 것이 팽팽한 긴장을 하고” 큰 피해 없이 지나쳐가길 바랄 뿐이다. 자칫 세계를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태풍을 반기는 이는 없다. 그런데 시인은 태풍에 대한 이 같은 통념을 전복시킨다. 태풍 전야에 시인은 고국의 그리운 것들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욕망을 “한 곳으로 모아/강한 바람과 비를 만들고 회오리를 만든”다. 그렇게 아주 빠른 속도로 남반구를 통과하여 북반구에 있는 시인의 그리운 대상들을 휩싸는 태풍을 욕망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시인의 이러한 욕망이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를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소멸되지 않은 “내 마음의 태풍은” 태양계뿐만 아니라 태양계 밖의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평화와 안녕의 메신저가 되어 모든 별을 향” 하고 있다. 이렇듯이 시인의 ‘바람’은 남태평양에서 생성하여 북반구를 지나 소멸되지 않은 채 태양계 곳곳을 흐르고 심지어 태양계 바깥 우주의 영원 속으로 ‘평화’의 전령사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바람’은 시인에게 존재의 시작이며 존재의 궁극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이번 시집에서 ‘바람’에 관한 주요 심상은 매우 중요하다.
야자나무를 닮아 거친 피부의 적도 사람들은
밋밋한 야자나무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
뚝, 열매를 따서 야자나무로 지은 집으로 갔다
붉은 사랑의 흔적 찾아 음식을 만들고
해와 달의 슬픔과 바람의 흔적을 마셨다
― 「야자나무라는 짐승」 부분
기장은 제 몸을 갉아 바람에게 주었다
바람도 그걸 받아 후손에게 넘겼으며
후손들은 그걸 먹고 세차게 불어댔다
경기장 안에선 바람들도
검투사와 맹수를 대신해 싸웠다
― 「콜로세움에 지구를 집어넣다」 부분
추사(秋史)가 유배지 탐라에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을 무렵, 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歲溫圖)를 그렸다 세한도의 소나무 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와 파파야나무 그려 넣고 초가 대신 바파이쿠보를 그려 넣었다 그가 세찬 바람과 눈 내리는 탐라에서 독한 술을 마실 때, 나는 바닷가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추사가 그림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를 바랐으나, 난 열매 맺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원했다
― 「세온도(歲溫圖)를 그리다」 부분
정선호 시인은 적도 사람들의 음식과 집의 주재료가 되는 야자나무로부터 “해와 달의 슬픔과 바람의 흔적”을 만난다. 야자나무의 생장과 적도 사람들의 생활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분리될 수 없는 양자의 관계를 매개해 주는 것이 바로 ‘바람’이다. 따라서 이 ‘바람’은 인간의 삶의 차원과 구분되는 기후 환경의 차원에서 유의미성을 갖는 게 아니라 적도사람들의 문화생태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바람’은 로마의 검투사들과 함께 로마의 흥륭성쇄와 관련한 역사를,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환기한다. 비록 텅 빈 콜로세움이지만 그때, 이곳을 가득 채웠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솟구친 로마의 숱한 정치경제학적 욕망들이 지닌 역사의 흔적을 시인은 텅빈 콜로세움의 적막을 휘감아 흐르는 ‘바람’을 통해 인식한다. 그런가하면, 시인은 필리핀 루손섬에서 열대의 과실수와 열대의 전통 가옥을 그리며 “가난한 나라의 사람에게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원한다. 시인은 추사의 저 유명한 세한도를 패러디한 세온도를 그리는데, 세한도에서 불어대는 맵짜한 한풍(寒風)이 남반구 열대의 필리핀 섬에서 열풍(熱風)으로 전도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세한도의 한풍(寒風)과 그것에 조응하는 소나무가 유가(儒家) 지식인의 윤리적 염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시인이 그린 세온도의 열풍(熱風)과 과실수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세온도를 그리며 열풍 속에서 과실수들이 풍성히 생장함으로써 적도 사람들의 행복과 풍요를 염원한다.
이렇듯이 우리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그동안 한국 시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열대지역에 기반한 심상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관념적 상상력이 아니라 시인의 낯선 곳의 생활경험 속에서 피어올린 심상이 한국 시의 경계를 심화 확장시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국문과 교수) 해설 중에서
2. 저자약력
정 선 호
1968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금오공대 생산 기계공학과와 창원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몸속의 지구』가 있다.
3. 도서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유행가를 다시 부르다
야자나무라는 짐승
봄의 재구성
바다 묘지
미술관에서의 명상
연꽃을 말하다
잠수함을 만들다
밀림, 공항과 바다가 있는 저녁
보덴저 호수에서
지명수배자
망고나무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순장의 풍습
내 마음의 태풍
혁명가의 가족사진
쓸쓸한 식사
제2부
세온도(歲溫圖)를 그리다
콜로세움에 지구를 집어넣다
겨울, 숲으로의 여행
Sleepness에서 놀다
봄이 떠나가신다
밀림 속을 달리다
새꽃
초봄
장미와의 전쟁
귀신들, 귀신들
겨울, 포은에게
창밖에 동백꽃 피다
안드로메다에서 전해온 통신
지리산 고사목 지대에서
봉황동에서 목선이 출토되다
제3부
모텔에서의 첫 경험
수빅영화관 앞에서
해반천을 따라 달렸다
전설의 고향
탭판공원에서
버섯 농장에 가다
가을, 호박꽃
수로왕비릉 앞에서 물을 긷다
봄의 대공연장
성탄절, 적도에 눈 내리면
겨울, 수빅만에서
주말농장이 사라졌다
조화(造花)를 말하다
다호리에서 밭을 일구다
죽음 또는 영상
제4부
섬진강가에서 길을 잃다
에펠탑에 오르다
그래도 빨래는 말라야 한다
노동시의 즐거움
화장실에서 채륜을 만났다
국밥집의 흑백사진
다시 고인돌공원에서
옛 전신전화국에 가다
사랑이 사라졌다
K시인에게
꽃과 함께 가을을 지내다
버스 정류장을 바라보다
능산리고분에서 축구 관람을 하다
수빅박물관에서 조선인을 만나다
요양이라는 말
해설 열대의 ‘바람’과 동행한 시 - 고명철
**** 추천의 말
정선호 시인은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체험은 이 시집의 시들에서 야자나무의 이미지, 파도의 이미지, 망고나무의 이미지, 남태평양 태풍의 이미지 등 이국적 상상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시집의 시들에는 가야로 대표되는 고대 세계와 관련된 상상력도 펼쳐져 있다. 가야시대 소녀의 이미지, 목선의 이미지, 성산패총의 이미지, 수로왕의 이미지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과거 세계를 향한 그의 상상력은 이 시집의 시들에 드러나 있는 여타의 이미지들을 통해서도 두루 확인된다. 전자를 수평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수직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두 상상력을 토대로 지금 이 나라의 왜곡된 현실을 탐구하고 있는 시들도 충분히 주목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꽃을 말하다」「잠수함을 만들다」「새꽃」「섬진강가에서 길을 잃다」「화장실에서 채륜을 만났다」 등의 시에서 엿볼 수 있는 정선호 시인의 기발하고도 참신한 상상력에 동참하는 것이 이 시집의 시들을 읽는 정작의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정선호 시의 현재는 필리핀이고 과거는 가야국이다. 그의 정신은 이 두 지점을 오가면서 흙이 수천 도의 열기로 도자기를 빚고 겨우내 푸른 보리를 키우듯이 자신의 시를 키웠다(「봄의 재구성」). 이국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 실존적 존재를 찾으려는 그의 시심은 “연꽃에서 수년 전 사람의 영혼을 읽어내기도 하고”(「연꽃을 말하다」), “누군가 정해놓았을 내 운명을 수배”(「지명수배자」) 하기도 하는 예민한 촉수를 보여주고 있다. 시집에 실린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인 여러 편의 시는, 이런 시를 빚어내는 정신적 고투의 정점에 “고국의 어머니와 가족, 채소와 가축”(「내 마음의 태풍」)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지극한 시심이 박헌영의 가족사진과 같은 ‘역사’와 마주칠 때면 더욱 뜨거운 시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 김용락(시인, 경운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