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42) 벙어리 처녀
유 초시는 쉰이 갓 넘은 떠돌이 훈장이다.
이 마을에서 훈장질하다가 글 꽤 한다는 마을 유림의 유임 간청이 없으면
보따리 싸서 다른 마을로 가야 한다.
정해진 자리가 없으면 남의 셋방살이를 하든가 주막 구석방에 처박히든가 동가식서가숙이다.
유 초시는 학식이 깊고 인품도 좋지만 살아온 길은 순탄치 못했다.
10여년 전에 아들을 사산(死産)하면서 산독으로 상처(喪妻)까지 하고
열여섯살 벙어리 딸을 데리고 돌아다닌다.
제 손자 머리 나쁜 줄은 모르고 몇년째 <동몽선습>만 잡고 있다고 훈장을 탓하던
매죽골 촌장이 사랑방에 서당을 열고 유 초시를 훈장으로 모셨다.
매죽골 서당에는 학동이 12명이다.
경칩이 지난 어느 날
하늘엔 구름 한점 없고
봄 햇살이 내려앉아
대지가 생명을 밀어 올릴 때
암탉이 병아리 떼를 데리고 나들이하듯
훈장이 앞장서고 학동들이 맨발로 뒤따랐다.
만물이 소생하는 땅기운을 받으려고
답청(踏靑)에 나선 것이다.
논둑으로 밭둑으로 산으로 서너 식경을 돌아다니다
서당으로 돌아오니 모두가 낮잠에 빠져들었다.
“내 금단추∼”
서당을 찢는 고함소리에 목침을 베고 잠들었던 훈장도 깨고
모든 학동들도 눈을 떴다.
고함친 학동은 천석꾼 부자 오 첨지 손자 만석이었다.
할아버지의 비단 마고자에 달렸던 커다란 금단추를
만석이 조끼 첫 단추로 달았는데 그것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모두 제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라.”
훈장이 한 사람 한 사람 조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답청하다가 떨어졌을세라
훈장과 학동들이 답청했던 길을 다시 돌며 찾았지만 헛걸음이었다.
단추 자리 조끼에 실밥이 그대로 있는 걸로 봐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예리한 칼로 싹둑 잘라낸 것이다.
저녁나절이 돼 모든 학동이 집으로 가고 나자
오 첨지 내외가 달려와 훈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못할 말을 서슴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구경하며 훈장의 벙어리 딸을 도둑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소동이 끝난 후 우물가에서 세수를 한 훈장은 하늘을 쳐다보며 흐느꼈다.
그해 그믐달 훈장 유 초시는 보따리를 싸서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솥과 그릇 보따리를 인 벙어리 딸을 앞세워 눈발이 훨훨 휘날리는 고갯길로 사라졌다.
7년 세월이 흘러 그 일도 잊히고 훈장 유 초시도 까맣게 잊혔다.
봄이 찾아왔다.
머나먼 고을 나루터 주막집 앞의 버드나무에도
물이 올라 버들강아지가 눈이 부시도록 부풀었다.
저녁나절 마지막 돛배가 나루에 닿았다.
내일이 장날이라
장돌뱅이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메고 지고 나루에 내려 주막으로 들어오는데
갓을 쓴 젊은이도 들어왔다.
찬모인 처녀가 그 젊은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막 뒤꼍을 돌아 끝방으로 찬모를 따라간 젊은이가
“훈장님, 영학이 왔습니다”라며 큰절을 올리고는 대성통곡했다.
“네가 영학이냐?” 누워 있던 훈장 유 초시가 벙어리 딸의 부축으로 일어나 벽에 기댔다.
호롱불을 켰다.
영학이는 꿇어앉아 유 초시의 손을 꼭 잡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벙어리 딸이 부엌에서 개다리소반에 술상을 차려왔다.
“이게 이승에서 마지막 술 한잔이여. 허허허.”
“훈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내일 한양에 올라가셔서….”
“콜록 콜록 안돼, 안돼, 보현연명보살이 와도 안돼.”
정적이 흘렀다.
“훈장님, 답청을 한 그날도 오늘처럼 따뜻했지요?
우리가 모두 눈을 감았을 때 훈장님 손이 제 저고리 속주머니에 들어와 금단추를 잡으셨잖아요.”
“몰라! 나도 눈을 감았으니까.”
영학이 유 초시 다리에 엎드려 또 대성통곡이다.
유 초시가 매죽골에서 쫓겨난 이듬해
5년을 병석에 누웠던 홀어머니를 저승으로 떠나보내고
혈혈단신이 된 영학이는 한양 외삼촌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한세상 잘 보냈다만 딸아이 때문에 눈을 감을 수 없구나.”
“훈장님, 제가 밥을 굶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주모가 간단한 혼례상을 차려오고
영학이와 훈장의 벙어리 딸이 맞절을 올렸다.
첫날밤 이십삼년간 고이 지켰던 처녀막이 터지며 벙어리 말문도 열렸다.
“마패! 서방님은 암행어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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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크리스마스 이브날..
즐겁고 은혜 충만날 날되시고
추운 날씨에 건강도 함께 챙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