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3. 일본의 불교전래
聖德太子, 배불파 누르고 열도에 佛法 전파
1. 한반도 삼국으로부터 불교전래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일본의 전 역사를 통해, 그들의 문화를 결정지었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꼽는다면 제일 먼저 한반도 삼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던 6세기 중엽을 드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를 빼고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들 문화 속에서 불교는 지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 성왕 불상-경전 보낸 뒤 ‘문화 대이동’
<일본 최초의 사원 아스카테라에 봉안된 성덕태자입상. 사진제공=김춘호>
일본에 불교가 구체적으로 언제 처음 전해졌는가를 둘러싸고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 552년(欽明13) 10월 설과 다른 하나는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에 기록된 538년(欽明7) 12월 설이 그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도 두 설이 모두 인정되고 있는 상황이라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두 기록 모두 백제의 성왕이 킨메이텐노(欽明天皇)에게 사신을 보냈고 더불어 불상과 불구, 경전을 보내왔다는 주요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대략 이 시기에 백제의 성왕이 일본왕실에 불교를 전한 것은 사실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할 사실은 불법승 삼보(三寶) 중 승보인 스님은 보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에 일본 최초의 스님이었던 세 명의 비구니가 백제에 유학하고 돌아오지만, 승보가 빠진 불교의 전래는 일본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된다.
불교 초전 이후에도 백제로부터의 불교전래는 계속된다. 554년에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의박사(醫博士)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577년에는 경전(經典), 승려(僧侶),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688년에는 조사공(造寺工), 로반박사(露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이 일본에 보내졌다.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에서도 역시 불교가 전해졌다. 즉, 602년 고구려의 스님 승륭(僧隆)과 운총(雲聰)이 일본에 왔으며, 또한 605년에도 불상건조의 지원금으로 황금 300냥이 지원된다. 623년에는 신라에서 사신과 더불어 불상과 금탑, 불사리를 일본에 보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반도 삼국의 치열한 전쟁이 관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 한반도로부터의 불교전래는 불법승 삼보는 물론 불교문화 전반에 걸친 인적(人的).물적(物的)의 총제적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문화의 대이동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고대 수도였던 나라(奈良)의 절들이, 더더욱 일본화된 교토(京都)의 절들보다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2. 숭불과 배불
한편 한반도 삼국에서의 불교전래가 처음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일본서기>에서는 552년 백제의 성왕이 보내온 불상의 처리를 두고 일본조정의 의견이 크게 갈라지고 있음을 전한다. 즉, “서쪽의 모든 나라들(西蕃諸國)에서는 이미 하나같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나 일본만이 이를 따르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일본도 불교를 신봉해야 한다”는 숭불파 소가노이나메(蘇我目)의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는 대대로 천지사직(天地社稷)의 180 국신(國神)에 사시사철 제를 올리고 있는데, 이제 와서 외국의 신(蕃神.佛像.佛敎)을 숭배한다면 국신으로부터 무서운 재앙이 내려질 것이기에 불교수용을 반대한다”고 배불파 모노노베노오시코(物部尾輿)는 주장한다. 숭불파(崇佛派)와 배불파(排佛派)의 생사를 건 대립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渡來호족’ 숭불파와 ‘토착세력’ 배불파 생사 건 대립
<성덕태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완성된 호류지 금당. 불교신문 자료사진>
소가씨 일족을 비롯한 숭불파의 대부분이 한반도 삼국이나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한 이른바 도래인(渡來人) 호족들이었고, 반대로 배불파는 일본의 토착세력들이 많았다. 숭불파가 불교수용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대륙과의 끝임 없는 관계를 통해 일본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장시켜왔던 이들 도래인 호족들의 출신성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숭불파와 배불파의 대립은 587년 오우메이텐노(用明天皇)이 병사하자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결국 소가노우마꼬(蘇我馬子)와 쇼토쿠타이시(聖太子)가 이끈 숭불파와 배불파의 주축이었던 모노노베노모리야(物部守屋) 간의 전투에서 모노노베 일족이 패배함으로서 끝이 난다.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일어난 숭불파와 배불파간의 대립을 통해 우리는 이후에 전개되는 일본불교의 중요한 특징들 몇 가지를 예견해 낼 수 있다. 우선, 당시 일본은 천황가의 권력이 호족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아, 그들이 무엇을 신봉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규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 수용 이후에도 지역의 호족들에 의해 건립된 절들이 씨족의 조상신을 제사 지내거나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른바 씨족불교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불교 자체를 그들이 이전부터 신봉해 왔던 국신(國神)들과 동일 차원의 번신(蕃神, 외국의 신)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사에서 불상이나 불교의 신장들을 제사지네는 등의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일본불교의 중요한 성격과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3.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
배불파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은 쇼토쿠타이시(聖德太子)였다. 물론 외가인 소가씨와 도래인 호족들의 역할이 컷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의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았고, 배불파를 물리치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킨 인물로, 나아가 일본의 정신을 만들어낸 영웅으로까지 추앙받아 1984년까지 일본의 만엔권 지폐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던 인물이 다름 아닌 성덕태자였다.
마구간 앞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우마야도노미코(皇子)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요우메이텐노(用明天皇)의 아들이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모두 소가노이나메의 딸들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가씨와 깊은 혈연관계의 인물이었기도 했다. 이러한 출생배경 때문에 어려서부터 도래인 호족들과 깊은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스승은 고구려의 혜자(慧慈)스님이다.
고구려 혜자스님 제자…석가여래 화신 ‘신앙’
일본 최초의 여제이였던 스이코텐노(推古天皇)기에 황태자가 된 그는 소가노우마코와 더불어 천황을 보좌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다. 우선 호족세력의 비대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권을 강화를 위해 관위를 12단계로 정하고 출신성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두루 등용한다. 또한 ‘17조 헌법’을 정하여 호족들에게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을 제시하여, 천황을 따르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것을 강조한다. 아울러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수나라에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는 등 천황의 중앙집권을 강화해 간다.
자신이 직접 <법화경>, <유마경>, <승만경> 삼경에 대해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지었다고도 하며, 배불파 모노노베씨와의 전투 중에 서원을 세웠던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지금의 오사카에 건립했다. 만년에 그가 기거했던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의 서쪽에 호류지(法隆寺)를 지었고, 현재 호류지는 일본의 보물창고로 불릴 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절이 되었다. 물론 ‘17조 헌법’과 ‘삼경의소’에 대해서는 진위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가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성덕태자에 관해 우리가 이해 할 때 이러한 실제인물로서의 그의 행적보다도 더욱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그에 대한 신앙이다. 성덕태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완성된 법륭사금당본존불의 명문을 통해 성덕태자가 곧 석가여래의 화신으로 신앙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성덕태자신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는데, 여기에 다양한 기담까지 결합되어 천태제2조(天台第二祖)인 남악대사혜사(南岳大師慧思)의 후신으로, 관음의 후신으로, 신선 등으로 널리 신앙된다. 풀 한포기 돌 하나에도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일본인들의 종교심성 위에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불교를 깊이 신앙할 것을 부르짖었던 성덕태자는 곧 석존이었고, 관음이었으며, 불교 그 자체였던 것이다.
4. 최초의 사원 아스카테라(飛鳥寺)
1956년에서 이듬해까지 이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인 아스카테라(원명은 法興寺 혹은 元興寺)의 전모가 밝혀졌다.
원래 이 절은 587년 소가노우마코가 배불파 모노노베노모리야와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고 이 절을 지을 것을 서약했던 것이 절을 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스카테라이전까지는 기존의 건물을 개축하여 불상을 안치하는 수준의 임시적인 불당이었는데, 이 절이 완성되고 비로소 일본에 본격적인 사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절이 백제에서 건너간 공인들에 의해 직접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백제장인들의 행적이 남아 있다.
백제출신 장인들 작품…가람배치는 고구려式
587년과 588년 백제는 조불공, 로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의 사원건축의 전문가들을 일본에 파견한다. 이들은 곧바로 아스카의 기누누이노미야즈코오야코노하(衣縫造祖樹葉)의 저택을 부수고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590년 사원건립에 필요한 목재를 확보한 다음 곧바로 본격적인 사원조영이 시작되었다. 592년 금당과 회랑이 완성되었고, 593년 탑의 심초에 불사리를 안치하고 찰주(刹柱)를 세웠으며, 596년 가람이 완성된다.
중앙에 방형의 오층목탑을 두고 동.서.북쪽에 세 곳의 금당을 두고 남쪽에는 남문을 배치한 이른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대 가람이었다. 약 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러한 대 가람을 완성했던 것을 보면, 국가적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대 사업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람배치는 일본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행태이며, 오직 고구려의 사지들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가람이었던 것이다. 일본 땅에서 백제의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원이 고구려의 가람배치를 택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백제의 장인들과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건립된 일본 최초의 사원 아스카테라의 완성은 대 항해를 앞둔 일본불교호의 출항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던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할 것이다.
김춘호 / 원광대학교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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