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상) 3-(2)봉산탈춤
민근홍 언어마을
[작품 개관]
▷ 문종 : 희곡, 가면극(전통극, 민속극) 대본
▷ 문체 : 대화체, 구어체
▷ 성격 : 해학적, 풍자적, 서민적, 근대 지향적
▷ 배경 :
1) 시대적 배경 - 조선 후기 18세기경(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기)
2) 사회적 배경 - 봉건 질서 해체에 따른 신분 질서 와해
3) 공간적 배경 - 화애도 봉산 지역
▷ 표현 :
1) 언어 유희, 익살과 고장, 반어에 의한 해학과 풍자가 두드러진다.
2) 서민에 의한 비속오와 양반투의 한자어가 뒤섞인 이중적인 언어 의식이 나타난다.
3) 서민에 의한 양반 어투의 패러디가 나타난다.
4) 비언어적 표현과 반언어적 표현이 다양하게 구사된다.
5) 자유 분방한 열거와 대구를 통한 말의 성찬이 나타난다.
[전체의 줄거리]
봉산 탈춤은 황해도 봉산 지방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으로서, 해학성이 강하고 봉건적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잘 반영된 우리 나라 대표적 탈춤의 하나이다. 여기에 소개된 부분은 제6과장 양반춤의 첫장면으로 양반집의 머슴인 말뚝이가 양반 형제를 희롱하는 내용인데, 주로 양반의 허세를 희화화하여 공격하고 있다. 양반춤 과장은 재담들이 일정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고도의 풍자성을 얻고 있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양반과 하인의 정상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양반의 위엄-양반의 위엄을 파괴하는 말뚝이의 항거-말뚝이를 꾸짖는 양반의 호령-양반을 안심시키는 말뚝이의 변명-양반의 안심'이라는 일정한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말뚝이는 근대 이행기 서민의 전형으로서 양반을 실컷 희롱하며, 지배층에 대해 항거하고 있다.
[요지] 양반을 모시고 다니는 말뚝이는 관객, 악공과 한 패가 되어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거나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희롱한다. 때로는 양반들 스스로 무식을 드러내는 글을 지어 보임으로써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양반은 취발이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고, 말뚝이는 이 과정에서 부패한 양반상을 들추어내게 하여 이들을 풍자한다.
▷ 주제 : 양반에 대한 조롱과 풍자
▷ 구성 : 전체적으로 옴니버스식 구성
발단 - 등장 인물 소개
전개 - 양반에 대한 재담과 희롱, 양반의 허세 폭로
전환 - 양반의 비리에 대한 비판
결말 - 인물의 퇴장
[봉산 탈춤]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일지사, 1979)
봉산 탈춤의 연출 형식은 양주 별산대놀이와 대동소이하여 피리, 젓대, 북, 장고, 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 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짓과 동작과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가면 무극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그 구성을 대별할 수 있다.
그 춤은 중부 지방에 남아 오는 양주별산대놀이 춤이나 느린 사위로 긴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해주탈춤형의 장삼춤에 비하여 활발하며, 장삼 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기춤이 기본이 된다.(중략)
봉산 탈춤 대사는 어느 가면극보다도 한시 구절의 인용과 패러디 등이 많아 지방 이속(吏屬)들이 세습적으로 전해 왔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그 내용은 양주 별산대놀이의 주제와 대동소이하며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 제1과장 사상 좌춤, 제2과장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 제1경 신장수놀음, 제2경 취발이놀음,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 등이 된다. 이 중에서 팔목춤, 사당춤, 사자춤 과장이 양주 별산대놀이와 다르다. 봉산 탈춤은 결국 목춤, 노장, 양반 및 미얄의 독립된 네 개의 놀이에 사당춤, 사자춤, 원숭이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중략)
봉산 탈춤의 길놀이는 탈놀이에 출연하는 일부가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소무, 양반, 영감, 상좌, 노장 그리고 남강 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 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일주하는 도중에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는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몰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여 이를 넓히는 일도 한다. 근래에는 봉산에서는 길놀이가 없었고 나무판에 광고문을 적어 사방에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중략)
탈판은 낮에는 단오놀이의 씨름과 여자들의 그네뛰기에 사용되었고, 야간에는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탈놀이를 하였다.
[봉산 탈춤의 유래와 특징]
(역사적 유래)
봉산탈춤은 황해도 일대에서 놀아오던 탈놀이 가운데 내륙의 평야지대인 황주, 서흥, 봉산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탈춤으로서 해안지대인 해주, 옹진, 강령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강령탈춤과 함께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탈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봉산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이며, 특히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위의 분포 지역들은 농산무로가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이며 또 소도시였고, 소위 남북직로의 주요 읍 및 장터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탈춤 공연의 경제적 여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황해도 탈춤은 북으로 대동강을 넘지 못한 반면에 남으로 중부 산대놀이 지역과 남북직로로 하여 연결되었고, 그 극본의 과장과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역시 산대도감계통 탈춤의 한 분파인 해서형임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 말 이래의 일이고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고려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단오는 중부이북 지방에서 남부 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서 성대히 지냈는데, 시계적으로 이 때가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의 시기였으며 단오의 명절놀이로서 봉산, 기린, 서흥, 해주 등지에서 탈춤을 추어온 것은 벽사와 기년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제로서 그 민속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된 놀이로서 관의 행사와 보다 많이 관련된 것에 비하면 봉산탈춤 등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지만, 그러나 역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고 한다.
(특징)
봉산탈춤의 연출형식도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여 피리, 젓대, 북, 장구, 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 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짓과 동작과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탈춤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그 구성을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춤은 중부지방에 남아오는 양주별 산대놀이의 춤이나, 느린 사위로 긴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해주탈춤형의 장삼춤에 비하여 활발하며 장삼 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끼춤이 기본이 된다.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 춤과 마찬가지로 도약무로서 모닥불을 뛰어넘으며 장기를 자랑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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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3.봉산 탈춤(01)_천재(박)Ⅱ 국어 1학년 2학기 중간 [29문제] [Q].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