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권사로 소개했습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인 어머니의 권유도 있었고 또 명절이면 나눠주는 과자를 얻어먹을 욕심 때문에 교회를 몇 번 다녀본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다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 가운데 귀감이 되면서 따를 만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 너무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면서 사회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오히려 훨씬 많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시에 할 말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고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뜨끔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제 말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金躍淵는 국제법상으로 볼 때, 중국이 우리나라에게 돌려주어야할 땅인 동북 삼성三省 곧 북간도北間島의 대통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에서도 관리들의 부패와 타락과 민중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하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142명과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습니다.
땅을 개간했습니다. 수백 정보町步의 땅을 더 사들였습니다. 한인촌을 조성했습니다. 곧바로 서당을 짓고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서당은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과 우국지사들을 배출했습니다. 나중에는 명동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병무, 강원용, 문동환 등과 같은 지도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사실 그는 유학儒學의 대가大家였습니다. 정신을 개혁하지 않고는 민족을 살려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했습니다. 장로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탁월한 성경 해석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특히, 그는 북간도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명동학교 교장 일을 보면서도 자신을 돕는 일꾼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쉬지 않고 스스로 땅을 개간했습니다. 천 평이나 되는 밭농사를 지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농부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타작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곳곳에서 몰려온 학생들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들을 몸을 숨길 곳을 찾기 위해서 몰려들었던 애국지사들과 함께 가르쳤습니다. 무수히 많은 독립지사들을 길러냈습니다. 훗날, 해방될 조국을 밝히는 등불들을 밝혔습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義士가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뒤 찾아왔을 때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명동 촌 뒷산에서 몰래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매사에 말없이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존경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해방을 3년 앞두고 “(이제까지 살아온) 내 삶이 유언이다.”라는 말을 가족과 제자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제자이면서 조카였던 윤동주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저는 연변에 머무는 동안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면 무조건 자전거에 올라탔습니다. 세 시간 정도 걸리는 명동 촌까지 달렸습니다. 돌에 새겨진 윤동주의 많은 시들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내 삶이 유언이다.”라는 글이 걸려있는 명동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유언을 마음이 평안해 질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사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유언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남길 수 있는 삶을 살아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