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세월의 노래)
사람들은 선입관의 지배를 피할 수 없는가 보다. 이른바 0.4초의 법칙이 예외 없이 작용한다. 바쁘게 살 때는 그냥 무시하고 살았는데 내 나이 칠십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고 반성해볼 여유도 있으면서 말이다.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어느 동호인 운동 클럽 경기이사 일을 하면서 몇 가지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여 재밌게 하고자 했다. 팀 경기와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의한 채점 그리고 시상이었다.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오해하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체육 평교사 출신에 무슨 (문자)말이 그렇게 많은가? 제 분수도 모르는 체 많이 아는 체 하며, 그 무엇을 우리들에게 감히 가르치려 하는가? 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과 카카오 단체톡 예의 없는 댓글들이었다.
내 스스로 알려주어야 하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가는 자고 일어나면 ‘때가 되면 절로 알게 되겠지’ 위안하곤 했다. 그런데 그러자면 앞으로도 무수히 아픈 일들을 참아내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조금은 뻔뻔스럽더라도 진솔하게 소통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다. 그렇게 잘났으면 ‘왜 교장도 못하고 은퇴를 하였단 말인가?’ 라는 물음에는 쉽게 설명하기 곤란해서 난처하다. 이참에 솔직히 다 말해버릴까 보다. 아셔라 말아라. 그 많은 사연들을 어떻게 열거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충이라도 소통해볼까? 나를 나와 소통하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였는가?
울진 온정 시골촌뜨기가 초등학교 6학년 졸업여행을 1박 2일 도보여행으로 후포로 갔고, 그때서야 바다를 보고서는 ‘이런 세상도 있네!’ 라며 놀라 잠을 설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후포중학교를 나와서 형들이 지내고 있었던 서울로 올라가 자취생활하며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이런 저런 사연 끝에 덕수상고에 입학했으며, 진학반을 중간 성적으로 졸업했다.
왜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진학반에서 공부했는가?는 물음에는 수판을 튕기는 것이 적성에도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슴에 품었던 꿈을 어떻게든 펼쳐보고자 했다. <보호자 승인> 란에 동생들을 불러 올려서 공부를 시켜주었던 셋째 형님 도장을 몰래 찍어서 진학공부하는 반에 들어갔던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기도 했거니와 집안 형편상 무료 대학 졸업이라는 제법 그럴듯하게 생각했던 육사 진학을 간절히 바래서 육군사관학교를 응시하였고, 낙방하자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응시했지만 연거푸 실패하였다. 후기였던 서울 시립대학도 응시해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도 상반기에는 시골에서 과수원 농사일을 거들다가 하반기에 학원을 다니면서 다시 도전하였지만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항만청 입사응시 추천을 받기도 했지만 고민 끝에 삼수의 무리수를 감행했고, 삼수 결과도 ‘역시나’가 되자 시골 부모님 모시고 농사꾼의 인생으로 살고자 미련 없이 낙향하려고 했을 때,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삼수 2년 합계 8년을 곁에서 두 눈 뜨고 보았던 바로 위의 다섯째 형님이 ‘그렇게도 열심히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깝지 않냐?’며 경북대학 사범대 체육교육과에라도 진학해서 좋아하는 운동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체육선생 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에 맏형님 살고 계셨던 대구로 내려왔다.
수학 시험을 못 보아서 낙방하는 줄 알았으나 운 좋게 ‘후보’로 합격, 1학년 반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였고, 상병 진급 때 일반병 하사관 차출에 지원해서 원주 육군1하사관학교 3개월 훈련 마치고, 동해안 경계부대 분초장의 만기 군복무를 ....
복학해서는 즐겨 입었던 외투 운동복 등짝에 '진리', '긍지', '봉사' 글자를 새겨서 마음을 다잡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결과는 달콤했다. 50여명 졸업생 중 차석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도 그러할 것이 수석한 후배가 육상 특기생으로 실기 성적이 좋아서 수석이었지, 공부로는 내가 수석의 성적이었음을 모두가 인정한다.
졸업과 동시에 대구북중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근무 2년 만에 체육부 장관상을 수상,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교육대학원에도 진학해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약관 39~42세에 대구공고 체육부장교사도 하며, 동기 졸업생들 중 제일 빠른 승진자로 예상되었다. 사격감독 운동부 선수를 길러내면서 학교운동부 성과거양 우수교사로 평가를 받아, 코치도 없는 서부여중에 발령, 내 운명이 극명하게 바뀌었다. 중학교 1학년 입학 일반 학생을 사격 선수의 길로 들게 하였으면 고등학교에서도 책임지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로 경덕여고 사격 감독 4년을 이어서 근무했다. 발령 받은 첫 해에는 제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전국대회 4관왕에 올라 ‘선인장’ 제목의 시를 다 쓰게 하였고...
대구시 사체과에서의 장학사 시험에도 몇 차례 응시 하였으나 남들의 예상과 다르게 번번이 낙방하였다. 뒷말에 의하면, 경북 벽지에서 초임 근무도 해보지 않고서, 바로 대구 시내에 발령받아 편하게 교편 생활한 후배들을 섣불리 뽑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을 뒤늦게 들었다.
어디 그 뿐이었을까? 어느 날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장학사 시험 몇 번 실패한 나에게 사체과 제일 높은 직분의 어느 분이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주었다. 그 얼마를 송금해주면 합격시켜주겠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을 그토록 쉽게 버릴 ‘안종문’이 아니지 않는가.....
내 힘으로 승진에 필요한 벽지 점수를 얻고자 달성군 벽지 학교 근무를 자원했더니, 그나마 가까웠던 화원중이 아닌 논공중에 발령 받아 하루에 백리의 길을 출퇴근하였다. 체육부장, 연구부장, 학생부장 경력 19년, 내 나이 어느새 50대 중반, 아내에게는 한없이 미안하였으나 승진하려던 마음을 고이 접고 집 가까운 곳으로 돌아왔다.
아픈 마음을 글쓰기로 치료하러 수필문학에도 발을 들여놓으면서 5년을 더 근무한 후, 부모님과 자식들을 생각해서 정년 5년을 앞당긴 2015년 2월 말 평교사로서 30년 교단을 뒤로한 체 명예퇴직을 선택하였다.
시골에서 부모님을 모시다가 어머님께서 그해 11월 초에 소천 하시자 백수를 눈앞에 두신 아버님을 ‘방문 요양사’에 의한 보살핌으로 맡기고, 대구 집과 시골집을 주기적으로 드나들며 지냈다. 후배들의 시간강사 근무 호출에도 별다른 변명 없이 반갑게 응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 4월에 금속 소재를 자르는 원형 톱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넷째 형님으로부터 취직 제안을 받았다. 경주지사 경리 여직원이 출산 휴가를 신청하자, 공장 책임자 겸 총무 역할로 근무하기를 권하여 경주생활을 시작하였다. 벌써 만 7년이 되는가 보다.
매달의 연금에다가 월급까지 받으니 꽤 부유한 생활을 하겠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교단을 떠나면서 명예퇴직금을 어떻게 잘 굴릴까 궁리하다가 집안 지인으로부터 서울 방배동 재건축 단독주택이 재개발 된다고 소개받아 그해 5월에 간도 크게 단독 50평 주택을 샀다. 1+1 보장 혜택을 실현하였으면 승계 대출금을 모두 해결하였겠지만 아직 입주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몇 년 더 이자를 갚아 나가야 되는 형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교장 꿈을 실현하였을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지 속속들이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교장 선생님 출신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였던 일에 보다 더 협조적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자연 무게가 실린다.
아니라면 누구든지 나이 먹고서는 익숙하지 않음의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인 것이 보다 더 큰 근본 이유였을까?
모르겠다. ‘사람의 향기는 일 만 리 간다’고 한다. 대구에서 30년간 성실히 살았던 향기가 경주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애써 위안 하고 싶다. 걸어온 발자국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용기'와 '열정' 그리고 '진실함' 이였다.
하나 더 말 하라면 '나를 위한 삶 보다는 남을 사랑하며 사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소인배들은 남의 허물을 보고 웃겟지만, 큰 그릇의 사람은 본받을 점을 이쁘게 보아줄 것이기에 조금도 서러워 할 이유가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