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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지고 기분만 남은, 그 여름
-----이승희 시세계
김지윤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는 계절
한때는 여름이 좋았다. 덥고 나른하고 아찔한 여름의 태양 아래 뜨거운 낮이 길기만 한 계절. 눈 닿는 데가 다 푸르러 언젠가 다가올 겨울을 상상할 수 없었던, 젊고 싱싱하던 내가 있던 때였다. 한여름의 햇볕이 내리쬐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맨살이 노출되듯, 감춰지는 것보다는 참지 못하고 드러나는 것들이 더 많은 그런 시절이었다.
이승희 신작들은 온통 ‘여름’을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현재의 여름이 아닌 잃어버린 어떤 뜨거운 계절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떠올릴 때마다 나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숨이 막히는 열기와 습기가 더 이상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건 이제 더 이상 내가 그 계절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가을이거나, 겨울에 접어들어 버린 사람들은 비록 다시 여름이 돌아오더라도 계절 속에 섞일 수 없다. 그저 그 어느 잃어버린 여름이 애틋할 뿐이다.
그러니 이승희 신작시들의 여름은 ‘그 여름’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다. 끝나가거나 이미 끝난 여름이므로.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20」의 화자는 여름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라디오 소리만이 유일하다 희미하다”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라디오 소리는 ‘유일’한 것인데 그 뒤에 “슬픔처럼 유일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라디오 소리는 슬픔과 겹쳐진다. 라디오 소리는 왜 슬플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CD나 MP3로 듣는 소리와는 달리 일회적이고 증발되는 소리이며,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소리다. 마치 시간처럼, 흘러가버리고 소모되고 사라진다.
“아무도 없는 방에 몇 번이나 나를 세워두는 일 몇 번의 이별이 다녀가고 난 이제 더 이상 입양될 곳이 없으니 여기서 살아야지”하는, 그런 식의 경험을 반복하다 머물러있게 된 ‘텅 빈 방’은 비록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이라도 나를 소외시킨다. 사랑을 잃고 나면 깨닫는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노래가 단 한번만 흘러나오고 휘발되는 라디오처럼, 세상에는 단 한 사람만 ‘play'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무언가가 사라진 빈자리는 시 속 표현에 따르면 “나머지들의 세계”가 된다.
“유일한” 것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남겨진 “나머지”들은 화자에게 “폐허”로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쓴다. “여름을 폐허라고 읽은 지는 오래 되었고 여름은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비로소 제 모양을 드러낸다고 썼다가 지운다” 이 구절에서 나는 ‘지운다’라는 단어에 눈길이 간다. 화자가 내뱉은 말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는 건, 이제 맨살이 드러나야 하는 여름이 아니라 감추고 가리고 덮을 수 있는 서늘한 계절이 이미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말을 “지운다.” 어차피 잃어버린 것은 그냥 없는 채로,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모두가 떠난 뒤의 나머지가 내가 있을 자리”라면 말이다. “쓰고 지운 것들은 쓰고 지워진 것들로 살아가면 되니까.”
어차피 ‘그 여름’은 지나고 나면 흔적으로만 남게 된다. “쓰고 지워진 것들”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는 가끔 쓸쓸해하고 스산해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이제 나는 여름의 일부가 아니니까 오히려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라고 중얼거린다. 나이가 들며 차분해지고 인내심이 높아지는 까닭은 어쩌면 ‘현명’이나 ‘성숙’보다는 ‘피로’에 있는지도 모른다. 피곤해서 숨고, 소리를 지르기에 너무 지쳐서 울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발견되지 않을 것 울먹이지 않을 것”이라고 화자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면 삶은 조금 더 견디기 쉬워진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탄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도 없으니 오히려 그 이후 오랜 시간을 평온하게 지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차피 상실된 한 시절을 되돌릴 순 없다 해도, ‘그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가을의 사람’은 점점 배워나간다. “나머지를 먹으며 나머지를 낳고 아무도 부르지 않을 노래를 만들고 그 무엇도 가로지르지 않으며 어떤 차례도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화자는 그 여름을 기억하며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기다림도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러고 나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싱그러운 녹음은 없지만 가을은 열매가 무르익은 수확의 때이며 겨울은 다음 봄에 다시 심을 씨앗을 갈무리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물론 “여름은 끝나간다.” 사라진 자리에 절대로 같은 것을 다시 채울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화자는 이미 깨닫고 있다. “나머지가 나머지로 유일해지”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원의 세계’에서 식물을 이해하기
이승희의 이번 신작시들에서는 모든 시편에서 식물적 상상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정원의 세계」다. 그것들은 정적인 것들, “죽은 척하는 식물들”(「정원의 세계」)이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지점에서 멈춰있는 것들을 식물이라 해보자. 홀씨가 되어 날아갈 수 있는 만큼 멀리 날아가다가 멈춰서 떨어져 심어진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식물의 운명이라면.
그런 멈춤은 누군가에겐 ‘죽음’으로 읽힐 것이다.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내뱉었던 유명한 대사다. 어쩌면 모든 식물들은 막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셈이다. 민들레꽃의 일생을 생각해보자. 홀씨가 날아가다 땅에 내려 심어지고 싹이 터서 자라고 꽃피운 뒤 결국 씨앗을 맺어 날려 보낸 후 죽는 것이 민들레의 한 생이라면 땅에 내려앉는 순간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피어난다. “죽어가는 제 몸을 보며 미친 듯이 꽃을 피우는 식물의 이야기”라니. 유독 오래 거듭 읽었던 구절이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게 된 나이가 되자 단풍이 다르게 보였다. 그때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름답게만 생각했던 가을 무렵의 단풍이 사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것을.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말이다.
“여름에 영혼을 다 바치고 여기서 뭐하세요 죽었는데 죽은 줄도 모르고 무슨 밥을 먹어요” (「정원의 세계」)라는 구절을 읽는 건 단풍이 들어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한 시절에 영혼을 다 바치고 이제 물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미친 듯이 꽃을 피우는 식물, 타오르듯 단풍 드는 잎들은 돌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절박하다. “여기는 돌아가지 않는 자들의 세계”다.
그래도 죽어가는 것들은 끝없이 무언가를 만든다. 언어는 끝없이 상실되어가는 뭔가를 계속 뒤쳐진 채 한 발 늦게 잡으려 애쓰는 것과 같다. 의미는 미끄러지고 찰나는 사라지므로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언어로 옮겨놓는 순간 그것은 빛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상실된 시절을 떠올리고, 글로 쓰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도 어떤 순간의 흔적이 보존될 수는 있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쓰고 싶다. 기억은 사라지고 기분만 남았다, 라고.
시간의 더께가 많이 내려앉아 본래의 색깔을 확인하기 힘든 어떤 것을 바라보며 과연 저건 처음에 무슨 색깔이었지?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린 가끔 많은 일들을 그런 식으로 떠올리곤 한다. 분명 나는 그때 이런 기분이었는데, 과연 그건 무엇이었지? 기억은 희미해져버렸고 느낌만이 남았다. 그 기억들은 이미 “여름의 감옥에 갇힌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가을로 나아가지 않으면 삶은 계속되지 않는다. 그래도 “손금에서 자라는 무서운 이야기”들은 “오늘의 양식”이 된다. 멈춰 서 있는 것들이 가득한 정원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라나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버드나무 껍질에 쓴 문장들처럼”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다. 버드나무 껍질은 해열, 진통 작용을 한다. 열을 내리고 아픔을 잊게 해주는 ‘버드나무 껍질’의 효능처럼 ‘문장’들은 여름의 열기와 고통이 한풀 꺾인 가을의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해준다.
어차피 ‘그 여름’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건 오늘이다. 그래서 화자는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과 밥을 먹기로 한다.”
정물화의 바깥에서
「몬스테라 몬스테리아」 는 상록 덩굴성 식물의 이름이다. 시인은 이 식물에게 “넌 구멍 난 심장을 가졌구나”라고 말을 걸며 시의 문을 연다.
구멍이 났다는 표현이 흥미롭다. 앞의 시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20」에서 “자꾸만 촘촘해져서 아무도 없는 방”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촘촘한 공간’에는 틈이 없어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반면, 몬스테라처럼 구멍 난 것들은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구멍 난 채로 자라서, “자꾸만 무성해지는 심장의 둘레”가 커졌다고 하니 아마 구멍도 그에 따라 더 늘어났을 것이다.
“없는 부분을 만져주면 깊이 잠들 수 있으니까/ 없는 부분의 이야기는 불행하지 않을 거 같아서/ 없는 것만이 있는 것처럼 자라고 있”는 곳은 구멍 난 존재들끼리 서로 의지하는 공간이다. 결핍이 욕망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구멍을 비워두며, “잃어버린 것들/ 우리는 그것들만 키우려 한다”고 말한다.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지 않기에 “어디에도 닿지 않으려는 허공의 뿌리”로 흩어지지만 그래도 몬스테라는 “투명 속을 걷는 일”처럼 떠도는 게 좋아서 드나들고, 지워지고, 비산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여름의 끝’은 계속 유예된다. 자꾸 만나기 위해서, 만나 어긋나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만나야 ‘타자’와의 조우라고 할 수 있으니, 필연적으로 ‘어긋남’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꾸만 구멍이 자란다.” ‘없는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구멍이 커질수록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이 더 커진다. 타자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나와 멀리 있는 존재다. 따라서 타자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멀어질수록 안심이 되는 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타자를 향한 열린 공간을 비워놓아야, 만나고 헤어지며 계속 조우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돌기보다 어딘가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길 바란다. 화단에 심어져 잘 관리되며 자라는 식물들의 삶은 단조롭지만 평안하다. 시 「화단 이야기를 해보면요」 에서처럼 닫힌 공간 안에서의 생활이다. 시인은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낭떠러지’라는 상징을 가져온다. 뿌리내린 식물은 아무 곳으로도 더 갈 수 없는 정지의 상태에서 일상을 구성한다. “낭떠러지마다 방을 만들며 새 식구를 들이”는 식물들처럼 그냥 내려앉을 수 없는 시적화자는 이방인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손님은 될 수 있다. 그는 자기 방을 만들어 뿌리를 내려 갇히는 대신 기꺼이 손님이 되어 “같은 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만도 “세상 다정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친해지면 뭘해요 버려진들 어때요 무엇이든 우거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라면서.
「즐거운 나의 집」의 시적화자가 생각하는 ‘집’은 “날마다 여름”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것이 하나도 없는 날씨”일 뿐이다. “슬픔은 나누는 게 아니구요”란 말처럼 서로의 슬픔은 공유될 수 없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20」에서도 슬픔은 유일한 것이지 여럿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중이 없어요/ 창문도 없구요”란 말처럼 ‘집’은 폐쇄되고 갇혀 있는 공간이다. “나는 어떤 연결된 것들과 잠시 멀어져요”라는 선언이 있고나서 시적화자는 ‘연결’의 족쇄를 끊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이어져 있던 존재들과 단절되었으니 그는 “아무도 오지 않”는 시공간 속에서 혼자가 되지만 “아무도 없는 저녁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그를 붙잡으려고 쫓아오는 것들이 있지만, “날 사냥하는 게 무언지도 모른 채/ 신나서 달아나”는 그는 아무도 쫒아오지 않을 때까지 숨이 차게 뛰다가, 하루가 끝날 때쯤에야 뒤돌아본다. 슬픔은 어차피 혼자만의 것이니, “방마다 들어가” 울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도 그는 들어갈 수 있는 방이 많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하찮아져서 늙은 개를 데리고 가는 더 늙은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거 같아요” (「화단 이야기를 해보면요」)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이런 슬픔은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비명’처럼 높고 큰 소리로 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들을 수 없게 방에서 혼자 우는 흐느낌에 가깝다.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하찮아진, 늙은 사람의 걸음보다 더 뒤쳐져서 등 뒤를 따르는 그런 느릿느릿한 걸음이라니. 슬픔보다 깊은 것은 언제나 피로다.
어쨌든 이 조용한 슬픔은 너무 개인적인 것이어서 공유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화단 이야기를 해보면요」에서 ‘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되는 ‘화단’은 서서히 슬픔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좀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기대도 생긴다. 물론 타인이 누군가의 슬픔을 만져보더라도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어 만지는 이야기에서처럼 타인은 그 일부만을 느낄 수 있고, 전체의 슬픔의 모습을 다 파악하는 데 결코 이르지 못하겠지만 잠시 같은 방에서 잠드는 것만으로도 시적 화자는 “함께 슬픔의 모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설사 하룻밤의 꿈이면 또 어떻겠는가. “식물들은 늘 문을 열어두고 잠을 자”고 내가 그 열린 문으로 “스윽 슥 들어가서 잠을 자고 나와도 모르는 척 눈 감아 주”기만 한다면. 결코 그 방에 머무를 수는 없다 해도 잠시 넘어진 척 하고, 곁에서 잠들 순 있으리라. “넘어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발을 오래 만져주는 거라는 걸 화단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시 속 수많은 정적인 존재들은 마치 한 폭의 정물화인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정물화는 그 자체는 정지하고 있으나 사실 화가에 의해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우리는 모든 멈춰진 것들을 움직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정물화는 영어로 ‘still life'이다. 움직이지 않는데 활기, 생명을 뜻하는 life와 함께 사용한다니. 시인은 정물화의 바깥에서 그것의 의미를 만들며 생기를 부여한다. 'still life'의 ’still'을 ‘아직도, 여전히’로 멋대로 읽어본다. 어쨌든, 여전히 삶이다. ‘그 여름’이 지나갔어도 시간은 계속된다. 기억은 사라지고 기분만 남았더라도 우린 가끔 신산한 현재 속에서도 잠시 ‘그 여름’의 온기를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나쁘지 않을 때가 있다.
약력: 문학평론가, 시인, 문학박사.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수상,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으로 등단. <요즘비평포럼>을
기획,
진행. 경희대,
숙명여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