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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zé - Nada te turbe
성 안토니오 수도원
수도생활의 기원
인간은 그 본성상 하느님을 향하여, 절대자를 향하여 방향 지워져 있다.
인간이 가진 하느님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어
이러한 본성에 대한 완전하고 충만한 실현으로 나타난 것이 은수생활이다.
은수생활은 수도생활보다 더욱더 오래된 삶의 형태로
그 기원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 마귀의 유혹을 받은 것에 둔다(루카 4,1-2).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머무르시면서
끊임없는 기도와, 완전한 단식 그리고 고독과 유혹의 시간을 보내셨다.
이와 같이 은수자들은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의 완전함을 살기 위하여 하느님을 찾아 광야로 떠나갔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데 방해되는 세상적인 모든 것들에서 떠나
침묵과 고독 속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참회, 고행으로 하느님을 찾기 위해 투신했다.
종교사 안에서 이집트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위대한 사막 교부’들을 탄생시킨 ‘사막의 수도자들’이다.
그래서 이집트는 수도자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3세기 후반에 생겨난 독립적인 은수생활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 제도 또한 4세기 초 이집트에서 생겨났다.
파코미오(290-346)는 테베지방의 나일 강변에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설립하였는데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은 큰 성과를 거두어 회원이 수백 명에 달하는
여덟 개의 수도원과 두 개의 수녀원을 세우고 총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공동체에서 장상을 포함한 모든 회원에게 동일하게 의무를 지우는 규칙을 만들어 적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교회사에서 첫 번째 수도회 규칙서가 되었다.
이집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사막으로 인도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창세 22,17) 이스라엘 자손들을 번성(탈출 1,7-12)하게하여
구원의 계획을 준비시키신 장소이다.
창세 22,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탈출 1,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
‘인간 신’인 파라오의 땅 이집트에서 그것도 불모의 사막에서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공동체 즉 수도 공동체가 꽃피어 난다.
사막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긴긴 세월동안 가슴에 품고 생명의 수도공동체를 탄생시킨 이가
바로 은수자 성 안토니오이다.
성 안토니오는 그리스도교의 첫 은수자는 아니지만
살아생전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안토니오 성인과 관련된 원전은 안토니오와 동시대를 살면서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성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안토니오가 사망한 뒤 바로 성 아타나시오는
자신의 세 번째 유배기간(356-362년)인 357/8년경에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이집트 수도자들과 함께 살면서 이집트 밖에 사는 수도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편지 형식의 서론으로 시작해서 94단락으로 구성된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하였다.
그리고「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안에 나타나는 38개의 금언들
그리고 안토니오 성인의 것으로 간주되는 7통의 서간들이 있다.
안토니오의 생애는 저자의 명성에 힘입어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전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고 수도생활로 이끌었다.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가 세상적인 것을 떠나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기 위해
그리고 복음의 말씀을 완전하게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을 제시해 준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수도자·은수자들의 아버지이며
사막의 교부, 모든 수도자들의 원조라고 불린다.
세상이 주는 모든 안락함과 보호로부터 떠나간 초세기의 은수자들의 주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찾고 완덕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이었다.
구도자로서의 안토니오 성인의 모습은 다음의 말 안에서 잘 드러난다.
“사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업적이나 기적을 통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일차적으로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겸손을 통해서이다.”
악마와 투쟁하며 고행 극기의 삶을 살았던 안토니오는
그러나 이러한 고행과 극기를 수도생활의 목적으로 보지 않았다.
희랍어로 쓰인 안토니오의 생애는
안티오키아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가 375년경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콥트어, 시리아어, 아랍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급속히 이집트 밖으로 확장되었고 수도원 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많은 이들이 이집트 사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사막 교부들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파 되었고 그들의 금언은 복음처럼 확산되었다.
성 안토니오는 이미 4세기말부터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아온 첫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막(광야)
이집트인들의 생활 터전은 나일 강 유역의 비옥한 검은 땅과
그 옆으로 펼쳐지는 불모의 사막 사이의 경계에 있다.
비옥한 땅은 ‘생명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그의 아들 호루스(Horus)가 다스리는 곳이지만
그들은 적대적인 사막의 악신 셋(Seth)과 대립한다.
사막은 불모의 땅이고 무덤의 장소이며
맹수나 도적떼에 의해 살인이 횡행하는 죽음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사막에 대해 어떤 신성한 두려움과 함께 본능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막으로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고향과 가족뿐만 아니라
삶을 보장해 주는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세기 후반에 있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5-305재위) 박해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황제의 박해는 이집트 남부에 수많은 순교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순교자들의 피는
이집트 전역에 그리스도교를 기적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창기의 은수자들은 나일 강과 사막의 경계에 있는 물이 가까운 곳에서
대개 허물어진 무덤이나 버려진 사원 또는 초막을 지어 거주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막과의 경계인 마을 외곽에서 금욕생활을 하면서
3세기 말에 나일 강 연안과 삼각주 분지에 있는 암벽 동굴이나 움막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도시에서 사막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3세기 중엽 데키우스(Decius)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은 고문과 죽음을 피해 사막으로 들어갔으며 이때 은수자 파울로도 있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사막으로 도피했지만 후에는 덕을 닦기 위해 사막에 남았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사막의 수도생활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점차 사막의 맛을 알았고 고독과 침묵을 찾아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박해가 끝나고 이집트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세례자 요한이 사막에서 성장했고
예수님도 사막에서 유혹을 받은 것처럼
사막은 이제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친숙한 장소가 되어갔다.
안토니오와 초기 은수자들이 도시와 마을을 피해 사막으로 간 첫째 이유는
사람을 피하고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막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일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얻기 힘든
불모의 땅이었기에 사막에서의 삶은 비참하고 불편한 삶이었다.
그러나 사막의 교부들은 세상적인 안락과 편안함 그리고 세상의 모든 쾌락보다
이 사막의 황량함과 무서운 고독을 원했다.
박해가 사라진 평화의 시기에 접어들어서 인간적인 본성을 이겨내는 것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는 피 흘림 없는 백색 순교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투신하기 위한 사막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장소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닮고자
쾌적하고 푸르른 정원에서 고요와 휴식을 즐기면서 하느님을 관상할 더 좋은 조건들을 떠나
‘하느님의 뜻에 맡겨진 땅’인 사막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막은 하느님의 은총과 마귀의 유혹이 동시에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던 장소가 바로 사막이며,
불모의 땅, 죽음의 땅으로 마귀의 유혹이 득실대는 장소도 또한 사막이다.
은수자들은 그리스도처럼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그리스도의 투사’였다.
철저한 은수생활을 통해 마귀와의 투쟁을 이긴 은수자들은 마침내 하느님을 만났다.
안토니오는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라는 무기로 사막의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고
수많은 수도자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었다.
성 안토니오의 부르심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Saint Anthony of Egypt, 251-356)는 251년경에
이집트 중부 나일 강가 왼편에 있는 헤라클레오폴리스 근처에 있는
코오마(Cooma)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양친은 안토니오가 20살 즈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둘이 남겨졌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안토니오는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부자 청년에 관한 복음말씀을 듣고 부르심을 받는다.
마태 19,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안토니오는 마치 하느님께서 특별히 자기를 위해 말씀 하신 듯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모님으로부터 상속 받은 100헥타르(약 37만평) 이상의 비옥한 토지를
고향의 주민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여동생을 위해 약간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역사상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실천한 사람은 성 안토니오와 성 프란치스코이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똑같은 이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영감을 받고 회개의 삶을 시작하였다.
안토니오는 어느 주일날 다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는 복음 말씀을 듣고 즉시 교회를 나와
동생을 위해 남겨둔 약간의 재산마저 모두 정리하고 여동생을 맡아준 동정녀 단체에 일부 기부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마을 근처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마태 6,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안토니오는 처음에 마을 가까이에 머무르면서 금욕생활을 하던 완덕에 진보한 은수자들을 찾아 다녔다.
그는 그들에게서 복음에 따른 포기의 삶을 배우며 자신의 고향 근처 마을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빈 무덤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노동과 끊임없는 기도에 전념하였다.
악마와의 투쟁을 시작한 첫 번째의 시기에는 악마의 유혹에 시달렸지만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
첫 번째 성공 후 그는 더 높은 단계의 금욕과 더 격심한 악마와의 투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마귀는 그가 단식하고 있을 때 빵을 들고 오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야생 짐승, 여자, 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안토니오를 때리기도 하고 초죽음 상태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많은 공격을 견뎌냈고 사탄이 그러한 환상을 일으킬 때마다
안토니오는 간절한 기도와 회개의 행위로써 이를 물리쳤다.
알렉산드리아의 박해 때 안토니오는 순교를 각오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달려가
감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봉사하며 격려하였다.
박해가 멈췄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와 완덕을 추구하였다.
성 아타나시오는 “당시 이집트에는 수도승들이 많지 않았으며 완덕을 추구하던 안토니오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와 고독안에서 혼자서 수덕을 실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 성인이 사막에서 은거를 시작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소개한다.
그 당시에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메마른 사막은 생명을 위협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악마들의 거주지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안토니오를 매혹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위해 안토니오는 생애 둘째시기에 자신의 마을 근처를 떠났고
마귀와 정면 대결을 하기 위해 6개월분의 빵을 가지고 그들의 본거지인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버려진 성곽이 있는 ‘피스피르’(Pispir) 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안토니오는 이곳에서 20년 동안 소량의 빵과 물을 섭취하며 나가지도 않고
그를 보려고 오는 이들을 만나지도 않고 홀로 고독 속에서 수덕생활의 혁신을 이루었다.
그는 맹렬한 영적·육적인 유혹을 모두 극복 하였다.
안토니오의 뛰어난 성덕과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제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다.
안토니오는 위대한 성자로서 개인적인 명성을 얻게 되자
은수자로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유목민 대열에 끼어 약 150킬로미터를 걸어간 끝에
샘과 야자수가 있는 클리스마(Clysma) 산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는 수에즈 만으로부터 서쪽으로 대략 40km,
그리고 수에즈로부터 남쪽으로 대략 100km 떨어진 홍해 근처의 콜짐(Kolzim)이라고 부르는
깊은 사막의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굴로 자리를 옮겨 수덕 생활에 전념하였다.
안토니오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옹호해 달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의 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간 일 외에는
죽을 때까지 이곳 사막을 떠나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마지막으로 정착한 이곳에서 105세의 나이로 356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죽기 직전에 15년 동안 함께 살아온 두 제자와 산으로 들어가
아무에게도 시신을 내주지 말고 그들만 아는 장소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기 작가는 전하고 있다.
반면 그의 옷은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아타나시오 주교에게 되돌려 졌다.
안토니오는 비록 최초의 은수자도 아니었고 그가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수도규칙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수도생활은 성 아타나시오가 쓴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통해서
초기 이집트 은수자들과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동·서방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수도자들의 이상’을 상징하는데
성 빠코미오는 그를 ‘독수생활(은수생활)의 완전한 전형’이라고 말하였다.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공경을 받는 성인은 압바(하느님 안에서의 사부인 원로) 안토니오,
이집트의 안토니오, 사막의 성인 안토니오, 은수자 안토니오, 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의 아버지,
대 안토니오, 수도자의 수호성인 등 수많은 호칭을 가지고 있다.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는 모두 같은 이름이다.
성인의 축일은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모두 1월 17일에 기념하며
이집트 정교회의 콥트력으로는 ‘Tûbah’ 22일(Tûbah는 1월9-2월7일에 해당하며,
우리 달력으로는 1월 30일)에 기념한다.
사막의 교부들
“사막의 교부들”이라는 말은 사도 시대 이후 초세기(3-5세기)에
이집트 사막에서 수덕생활로 영적인 진보를 이루었던 수도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신학자도, 철학자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금언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심오한 지혜가 담겨 있어
영성사에서 그리고 수도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사막 교부들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 아래서 단순하고 항구하게 생활하는 것’이었다.
수도자의 삶은 항상 하느님의 시선 아래서 생활하기에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깨어 있음은
수도승에게 모든 활동의 근원이자 목적이며 시작이자 완성이라고 포이멘은 말했다.
38개의 금언집을 남긴 성 안토니오는 사막교부들 가운데 참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사막교부들에게는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했다.
제자는 긴 담화를 듣는 것보다 원로와 함께 살면서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원로들은 제자들에게 자기 뜻을 강요하는 것은 성령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거룩함은 외적인 화려함이나 위대한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곧 사막 은수자들의 본질이었다.
교부들의 금언과 생애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 확산된 덕분에
그들의 영향력은 팔레스티나, 시리아, 소아이사, 그리스, 러시아에까지 미쳤다.
4세기의 세 번째 위대한 수도자 저술가인 요한 카시아누스는
동방 수도제도 특별히 이집트에서 알게 된 수도제도의 영성을 서방교회에 전하였다.
음식규정
초기 사막 교부들의 주된 영적인 훈련은 단식과 고행이었다.
광야에서의 그리스도의 고행을 기억하며 행했던 단식은 은수자들의 가장 특징적인 수덕의 실천이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극히 소량의 음식을 먹었는데 「안토니오의 생애」에 따르면
안토니오는 매 이틀 간격으로, 때로는 매 나흘 간격으로 식사했다고 한다.
사막 교부들은 경험을 통해서 여러 날 엄격한 단식보다는
매일 절제되고 분별 있는 식사가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4세기 말부터는 하루 한 끼 식사가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어느 원로는 “하루 한 끼 식사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하면 짐승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로 해가 진후에 조금의 빵과 물을 마셨다.
이집트의 수도승들은 쉴 새 없이 단식을 했고 극도로 엄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오는 하루에 삼사 온스의 빵만을 먹거나
40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내기도 했고 주일에는 양배추 잎 하나로 때우기도 했다고 한다.
단식과 식사의 방법은 매우 다양해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카시아누스 시대에 빵 두 개(12온스-340그램)가 수도승의 하루 정량이었다고 한다.
엘리우스는 매일 저녁 3온스의 빵과 올리브 열매 세 개를 먹었다고 하고,
포스투미아누스는 하루에 말린 무화과 여섯 개만 먹었다고 하며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에서 나오는 어떤 원로들은 풀과 야생 식물만으로 살았다고 한다.
수도승의 식단에는 병자 회복이나 손님 환대 등의 예외 규정에서도 고기는 없었다고 한다.
뜨거운 사막에서 물을 절제한다는 것은 확실한 고행의 방법이었는데
파울로는 사순 시기 내내 정해진 양 3-4리터의 물로 생활했다고 한다.
식사의 빈도, 소비된 음식, 음료의 양과 질이 어떠하든
반드시 포만감을 피하고 약간 배고플 정도로 육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
기본 원칙이며 황금률이었고 더 이상 먹는 것은 죄악시 했다.
그러나 지나친 단식을 하는 것은 또한 악령의 충동질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정한 음식을 먹거나 굶는 것이 아니라
애덕을 실천하는 신앙이 주님의 가르침임을 잊지 않았다.
생활 방식
안토니오는 기도와 노동을 번갈아 하였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데살 3,10)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는 손수 노동을 했다.
노동은 밧줄을 꼬고 바구니를 만들고 돗자리를 만드는 손일이나
이웃 농부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거기서 받은 품삯으로 식량을 구입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모든 일은 기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가난과 무소유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수도승이 쓰는 물건은 가난하고 적었는데 잠잘 때 쓰는 돗자리, 빵을 담는 광주리 하나,
기름병 하나, 물병 하나, 몇 개의 작업 도구들 그리고 읽을 줄 알면 몇 권의 책들이었다.
그들의 주요 일과는 독서와 기도였다.
잠은 조금만 잤고 잘 씻지 않았으며 유명한 수도승들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곤 했다.
전례
사막의 은수자들은 물이 있는 오아시스 근처의 자연 동굴이나 암굴을 거처 삼아
카리스마를 가진 한 영적인 스승 아래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 하였다.
이들은 토요일과 주일에 모여 저녁기도와 밤기도를 함께 바치고 새벽에 성찬례를 거행했다.
미사 후에는 형제적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 모였다.
그리고 나눔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은수자들은 시편 기도를 바치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들 안에 육화될 수 있도록 성서 말씀을 암송했다.
안토니오에게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드는 것이며,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는 무기였다.
금언
금언의 원천은 한 제자와 스승 사이의 문답과 여러 수도자들이 나눈 담화
그리고 훌륭한 두 연장자들이 나눈 형제적인 대담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으로 엮어져 후세에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은 사막의 은수자들이 살았던 삶과 관련하여
감화를 목적으로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나온 말로 은수자들의 실재를 비추는 섬광과 같은 것이다.
안토니오 19 : 제자들이 안토니오를 찾아와
“우리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되겠습니까?”
그러자 원로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성서의 말씀을 들었으니 자네들을 위해 그렇게 되도록 하게.”
“사막을 걸을 때 제가 무서워지는 까닭이 무엇일까요?”라고 묻는 이에게 어느 원로가 대답했다 :
“그건 자네 눈에 아직 세상 사물이 보이기 때문이네.”
이러한 ‘금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집트 수도승생활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내적 생활에 대한 추구’즉 구원을 갈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생활을 원하는 한 지원자가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한 답변을 간청하면서 어느 위대한 수도자에게 다가가
“어떻게 하면 구원될 수 있는가?” 라고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인 ‘구원’에 대하여 묻는다.
그가 알고 싶은 건 다만 ‘구원의 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짧고 직접적이며 안전한 ‘구원의 왕도’일 뿐이다.
성 바실리오 교부가 금욕적인 생활에서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구원이라고 말했듯이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인 성 안토니오가 사막에서 평생을 추구했던 것이기도 하다.
구원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 모든 이가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수도자 고유의 것인 까닭은 수도자는 구원 외에는 이세상의 다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언집에서 수도자를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구원의 길’만이 유일한 본분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구원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성령으로 충만해진 이들로 여겨졌고,
하느님의 대리자 내지 신탁의 전달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들은 말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되었다.
수도자란?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비잔틴 시대의 교회는
교리체계의 확립을 위해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는데
동시대에 이집트의 사막에서는 진리에 대한 내적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복음을 온몸으로 살아가는 은수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의 본연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은 이미 우리 인간 안에 내재되어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본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수덕생활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토니오에게 있어서 은수생활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단순히 세상을 떠나 사막에 사는 것이 은수생활의 전부는 아니었다.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세상사의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수도생활의 중심이며, 수행은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특전적인 도구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수도자란 하느님의 종으로서 죽는 날까지 수덕생활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저녁에 잘 때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은 단지 주님의 안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무일도 끝기도 마침기도 후에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으로 강복 하듯이
수도자는 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 안토니오 수도원(The Monastery of Saint Anthony)
성 안토니오 수도원은 이집트 동부 사막의 와디 아라바(Wadi Arabah) 오아시스 지대에 세워져 있는
콥트 정교회의 수도원이다.
홍해 쪽으로 나 있는 산들 안쪽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이곳은 카이로 남동쪽으로 334km 떨어져 있다.
안토니오 수도원은 최초의 사막 은수자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성인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수도원 중의 하나이다.
성 안토니오 수도원은 이집트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수도원이며
여러 콥트 기관들을 설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외적으로는 수도원 운동을 촉진 시켰다.
여러 명의 콥트 총대주교가 이 수도원 출신의 수도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안토니오 성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제자들은 성인이 은수했던 장소 주위에 정착하였다.
성 안토니오 수도원은 율리아누스 황제(Julian the Apostate, 331/332-363 재위)의 통치 시기인
361-363년경에 지어졌다.
성인의 제자들에 의해 맨 처음 정착할 때는 ‘독수생활’이 강조되어 아주 기본적인 건물들만 들어섰다.
그들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성당을 중심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의 움막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나일 강 인근 사막 한가운데 설립된 수도생활 중심지들은
유목민들의 습격과 약탈로 인해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와디 나트룬의 스케티스 사막에 있는 수도원들은 5세기 동안 거듭 황폐화되었고
수도승들은 살해되거나 흩어졌다.
그러나 요새화된 수도원들은 ‘성지’가 되었고 이집트 교회의 심장이 되었다.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수도승 중에서 선발되면서 이집트 그리스도교와 사막 수도승생활 간에는
긴밀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6-7세기에 세테(Scetes)의 많은 수도자들이 베두인들의 빈번한 침입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성 안토니오 수도원으로 옮겨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수생활은 점차 시들어지고 안토니오의 제자들도 안전과 형제애를 촉진하기 위하여
독수생활에서 공동체 생활로 변화해 갔다.
이 시기에 수도원은 끊임없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때로는 세테로부터 온 콥트 수도자들과 함께 머물렀고 때로는 동쪽으로부터 온 멜키트(Melkite,
451년 칼체돈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인 시리아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종파) 수도자들과 함께 하였다.
안토니오 수도원은 멀리 외딴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누렸지만
11세기에 짧은 시기 동안 매우 강도 높은 박해의 시기가 있었다.
수도원은 동부 사막에 사는 베두인들에 의해 수차례 약탈되었고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 성당의 내부. 성당 돔 안쪽모습. 우주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사가들
수도원은 12세기 들어서 복원 되었고 그 후 몇 세기동안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침입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수도원 성곽이 지어졌다.
십자군 시대 말기에 들어서 유럽의 외교관들과 신부들이 성지의 일부분처럼 이집트를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온 성직자 한명은 안토니오 성인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거룩한 사막교부들의 은신처와 움막”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순례기에서는 “이 사막에는 매우 높고 폭이 좁은 바위 아래에
안토니오 성인이 살았다고 하는 장소가 있고,
그 바위에서 돌을 던져 닿을만한 거리에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곳은 신앙심 깊은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인데 하느님의 은총과 안토니오 성인의 도움으로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안토니오 수도원은 15세기 초에 접어들어 일상적인 순례지가 되었지만
15세기 후기에는 수도원에 고용된 베두인 노동자들에 의해
많은 수도자들이 살해당하면서 다시금 황폐화 되었다.
그 후 수도원은 시리아 수도자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수도원은 복원되었다.
수도원이 복원된 후 에티오피아와 이집트 수도자들이 수도원에서 함께 살았다.
그렇지만 수도원은 서서히 황폐화 되었고 19세기에 접어들 때까지 소수의 수도자들만이 남아
인근 마을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연명했다.
17세기에는 프란치스칸 선교사들이 선교를 준비하기 위한 근거지로 잠시 이용하기도 했지만
수도원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안토니오 수도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근 마을로부터 매달 한 번씩 음식과 생필품을 운반하는 낙타 대상(caravan)이 다니는 길만 있었다.
사막을 통과하여 수도원으로 이르는 길은 3-4일의 여정이었다.
그러므로 당시까지 수도원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수에즈 운하 길(Suez-Ras Gharib Road)이 생기면서
카이로부터 수도원까지는 5-6시간 거리로 단축되었다.
현대식 수도원은 다섯 개의 성당과 정원, 제분소와 빵집이 있는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검댕이로 그을려 있던 성벽은 말끔하게 단장되었다.
수도원에 있는 가장 오래된 이콘은 7-8세기에서부터 13세기까지에 이른다.
제단에는 전능자이신 그리스도, 천사들, 왕좌의 그리스도, 아브라함의 희생,
아브라함과 멜키세덱, 예레미야, 엘리야, 이사야, 모세, 다윗, 다니엘, 성 마르코, 성 아타나시오,
성 테오필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베드로 등의 이콘이 있다.
성당 안에는 3개의 제대가 있는데
북쪽 제대는 성 마르코, 중앙에는 성 안토니오 그리고 남쪽에는 아타나시오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2005년도에 ‘사도들의 성당’아래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4세기의 ‘수도자 방’이 발견 되었다.
▲ 성가대석이 있는 남쪽 벽에는 성 요삽(Anbâ Yûsâb, 1735-1826)이
유리로 만들어진 유골함 안에 안치되어 있다.
성인은 안토니오 수도원의 수도자였으며 주교였고 뛰어난 신학자이자 호교론자였다.
그는 콥트교회의 교리에 대하여 31권의 해설서를 썼으며 그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고 남아
사후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콥트 교회에서는 1월 24일에 성인의 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 안토니오 성당과 사도들의 성당 사이의 통로에 있는
유스투스 안토니오(Abûnã Yustus al-Antûni)의 나무로 만들어진 성유물 함이 있다.
안토니오 수도원의 은수자로 살다가 1976년에 선종을 했는데
그는 많은 기적들을 일으켜 살아서부터 성인으로 공경 받았었다.
수도원 도서관과 박물관은 수도원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콘들과 전례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에는 1700여개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더 많은 필사본들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베두인들이 수도원을 침략했을 때
이들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사본들을 불 태웠다고 한다.
안토니오 성인이 은수했던 동굴은 수도원에서부터 2km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홍해에서 680m 높이 그리고 수도원에서부터 300m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홍해를 등지고 선 산 능성에 위치하고 있어 와디 아라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성인은 죽기 전 356년까지 이 작은 자연 동굴에서 살았다.
▼ 안토니오 성인의 동굴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동굴 성당. 바위를 깎아서 만든 성당.
테베의 파울로는 이곳에서 약 20km 떨어진 안토니오 성인보다 넓은 동굴에서 은거했다.
한번은 안토니오 성인이 파울로를 찾아 길을 떠났는데
늑대 한 마리가 파울루스의 동굴까지 안내했다고 한다.
두 원로가 천상적 담화를 하는 동안 까마귀가 빵을 하나 물고 왔다.
여느 때라면 빵 반쪽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하느님의 배려로
안토니오 성인의 몫까지 해서 양을 곱절로 늘린 것이다.
2002년부터 이집트 정부는 8년간에 걸쳐 수도원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수도원의 성벽과 두 개의 주요 성당, 수도자들 지역과 망루 등을 복원하였고 현대식 하수처리장도 만들었다.
남·여 각각 150명씩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숙소를 새로 지었고,
수도원에는 콥트교회 총대주교를 위한 은둔소 방도 마련되어 있다.
이집트에 있는 ‘미국 연구 센터’의 고고학자들이 성 안토니오 성당에 있는 이콘들을 복원하였다.
복원 동안 고고학자들은 4세기 때의 수도자들의 작업장 지역을 복원하였다.
이곳은 유리 바닥으로 만들어 방문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복원된 수도원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960년대에 주일 신앙학교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는데
교육받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세상적인 기쁨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안토니오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1960년에 24명의 수도자에서 오늘날은 120여명의 수도자로 늘었다.
또한 과거에는 평균연령이 50대가 넘었고 사막 교부들의 전통에서처럼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상인, 목수, 염색공이나 노예출신들이었지만
오늘날은 잘 교육된 젊은이들과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이 수도원에 입회하고 있다.
안토니오 수도원은 이제 콥트 그리스도교의 센터로 영적인 피정과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종교적인 회합 등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루카 7,24)
The Monastery of Saint Anthony - "Ends of the Earth"
첫댓글 이집트 성 안토니오 수도원의 역사와 사진, 그리고 영상 등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형제 님~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태풍이 지나고 있습니다.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