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구원하는 교육 (잠 23:12-14)
12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이 시간에 “영혼을 구원하는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 여러 교육이 있지만 성경교육처럼 귀중한 교육은 없을 것입니다.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는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만들었다면 성경은 영국을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은 원래 해적의 나라요 도적들이 들끓는 야만적인 나라였지만 성경을 받아들임으로 세계에서 가장 신사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조지뮬러도 죄악의 밑바닥을 걷던 사람이었는데 성경말씀을 받아들인 후 변화되었습니다. 디모데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딤후3:13-17에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성경으로 바로 교육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내가 먼저 성경을 사모해야 합니다.
12절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여기 지식의 말씀은 성경을 가리킵니다. 먼저 성경을 잘 알아야 자신과 남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요?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귀를 기울였던 것은 당시에 개인이 기록된 성경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라는 말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성경만 들려줘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만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읽는 집회로 느헤미야 8장에 나오는 수문 앞 광장의 집회가 있습니다.
느8:5-6을 보면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우리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이슬람교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코란경에는 세 차례 기도할 것을 말했지만 그들은 하루 다섯 차례나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 기도하고, 매일 그들의 경전 꾸란을 소리 내어 낭독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코란 낭독만 하루 24시간 하는 코란전문방송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바른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좋은 전통은 이어 받았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십시다.
그런데 수문 앞 광장에서 백성들이 그토록 아멘을 외치며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 대부분은 제 2세 국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어인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토라(율법)를 새벽부터 정오까지 낭독할 때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 사이사이에 끼어 그 말씀을 아람어로 통역하면서 들려주었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은 그 뜻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이라는 것을 현대적으로 말하면 성경을 그렇게 사모하며 읽으라는 말입니다.
성경교육은 교육자가 먼저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모본을 보이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실천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적인 교육에 동감해야 합니다.
13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교육자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성경은 아이를 훈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부드럽고 달콤하게 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훈계와 채찍을 통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훈계를 피하는 것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혹은 그것을 알면서도 과단성이 없어 훈계할 줄 모르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부모의 자격이 없습니다. 최소한 맞는 것은 맞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면 자녀를 바로 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선진국에서는 부모가 양육할 자격이 없으면 자녀를 국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자식이라고 내 맘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징계했다고 아이를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징계할 줄 모를 때 빼앗아가야 맞는데 올바른 교육을 시행했는데도 법을 과도하게 적용해서 양육권을 빼앗아 갑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진국이 아니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감정으로 폭행할 때는 빼앗아가도 좋지만 정당한 교육인데 잘못된 법을 만들어놓고 훈계를 금한다면 이건 완전한 말세의 징조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훈계할 줄 모르는 것은 아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를 천국 백성으로 바로 교육시키려면 이 성경적 교육방식에 동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따라서 하면 됩니다. 성경은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정당하게 채찍하면 그게 사는 길이지 죽는 길이 아닙니다.
3. 훈계는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14절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여기 스올은 음부를 가리킵니다. 이 ‘쉐올’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구약 시대에 선한 자나 악한 자를 불문하고 모든 죽은 자가 가서 거하는 사후세계로 인식되어졌던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확하게 지옥을 지목해서 스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스올은 악인들이 죄의 대가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들의 영혼이 영원히 갇혀 심판을 받는 곳입니다. 이것이 일차적 의미입니다. 이차적으로는 이처럼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심판을 면하는 길이 생겼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때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교훈하실 때도 있었고, 어떤 것은 이차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곳도 있는데 잘 이해하고 받아야 합니다. 이걸 알지 못하고 다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4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실재 지옥에서 건져낸다는 뜻인가? 그것이 아니라 지옥 갈 사람을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지옥 가지 않게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훈계와 채찍이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필요합니다.
훈계 잘하는 것도 은사일 수 있습니다. 이 은사가 풍부하면 맞으면서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함부로 흉내 내다간 자기가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가 풍부한 부흥사는 개인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민족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엡5:11-14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12:11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이런 일군도 있고 저런 일군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잠언 기자가 말하는 훈계나 책망은 꼭 은사를 받아서 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하신 본문 말씀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겠죠.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가 없지만 사랑 안에서 지혜 안에서 그리고 은혜 안에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잠언 기자가 말하는 책망이 지옥에서 구원하리는 말씀에는 책망 받을 대상 중에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열매로서 나무를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책망하기 앞서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교육은 성경 교육입니다. 성경 교육은 멸망할 영혼을 구원하며 그를 온전케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히 세울 수 있습니다. 가르침도 훈계도 책망도 모두 이를 위해서입니다. 이 교육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훈계를 받을 수 있고 훈계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로 무장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