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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가 된 에스더
성경본문 : 에스더 2: 1-18
1. 그 후에 아하수에로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의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2. 왕의 시신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3. 전국 각 도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붙여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로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으소서 왕이 그 말을 선히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6.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8. 왕의 조명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
9.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케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의례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
10.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하여 고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11.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
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 두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케 하는 기한을 마치며
13.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는 그 구하는 것을 다 주어 후궁에서 왕궁으로 가지고 가게 하고
14.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저를 기뻐하여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
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16. 아하수에로왕의 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이끌려 왕궁에 들어가서 왕의 앞에 나아가니
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욱 사랑하므로 저가 모든 처녀보다 왕의 앞에 더욱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삼은 후에
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방백과 신복을 향응하고 또 각 도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풍부함을 따라 크게 상 주니라 에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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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수에로왕이 잔치에서 기분이 들뜬 나머지 실수를 저렀습니다. 아무리 절 대권을 가진 왕이라도 왕비를 한순간에 갈아 치운 것은 대단한 실수였습니다.
잔치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하수에로는 한 때에 자기가 한 결단에 대해서반성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2:1절에 [그 후에]하고 시작되는 것을봅니다. 아하수에로의 감정이 이제는 풀리고, 감정이 삭여지고 나니까 그 때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감정이 북받쳐서 행동한 것은 감정이 식으면 후회를 하는 것이 십중 팔굽니다.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이 몹시 후회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번복시켜서 와스디를 복위를 시켜줄려고 했습니다만, 자신의 반지를 뽑아서 인을 찍었기 때문에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조그마한 진립니다만, 하나를 배워야 합니다. 누구나 감정이라는 것은 다 있습니다. 한 때는 바람결도 느낄수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내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감정도, 때를 따라 폭풍이 몰려 올 때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고, 파고를 일으키면서 사방에 있는 것을 집어 삼킬듯이 넘실 거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감정이 극했을 때, 중요한 일을 결단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감정이 끌어 오를때에 중요한 말을 하는 사람도 성급한 사람이요, 그 때에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정말로 두고두고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립니다. 바로 아하수에로왕과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이성을 어둡게 만듭니다. 감정이 활활 타오를 때는 이성의냉철한 분별력이 무디어져 버리고, 그 다음에는 분명한 어떤 판단력을 가지고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 하는 일은 나중에 가서는 모두를 후회하고 고통하는 과제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하면 감정을 잘 자제하고 다스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자주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누가 군자입니까? 누가 현자입니까? 누가 성자입니까? 감정을 다스릴 줄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안양고도소를 방문을 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3천명 죄수들 가운데서 예수를 믿고 예배에 참석을 하는데, 그 가운데서 60대에 들어선 어떤 남자를 만나서 [당신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소!] 하고 물었더니, 그 분은 저 시골에 사는 순박한 농부였는데, 한참 가뭄이 심할 때 논에 나와서 수로의 물꼬를 자기 논에 들어 가도록 돌려 놓고 집에 들어와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나가보니까 웬일인지 옆에 논에는 물이 가득한데도 계속 물이 콸콸 흘러 들어 가는데 자기 논은 바짝 마른대로 그대로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폭발해 버렸습니다. 자기가 들어 온 다음에 옆집 사람이 나와서 물꼬를 다시 돌려 논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싸움으로 하다가 이 사람이 감정이 격해지니까 손에 들고 있던 삽을 들어 옆살감을 내리쳤습니다.
그것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징역 20년 받았는데,목사님이 잘 보니까 아무리 모범수로 감면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형무소를 나가 기 전에 세상을 떠날 확률이 많구나 하는 생각에 애처롭게 여기면서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때의 감정!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얼마나 큰 일을 저지를수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모든 면에서 앞서야 되겠습니다만, 그러나 가장 사소하게 생각하는 감정, 화내는 것, 흥분하는 것, 이런부분에서 자기를 다스리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이런 힘을 갖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데 있어서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길거리에만 나가 보아도 얼마나 감정이 폭발할 수 있는 소지가 많습니까? 조그만한 일에 이성을 잃어 버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많아지고,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모든 것이 너무 성급하게 돌아가고, 더군다나 요즈음과 같이 무더위 속에서는 정신이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너나 할것 없이 신경이 날카로와 있고 예민해 있습니다. 이럴때에 잘못하면 감정이 그냥 마치,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 다니면서 짖밟고 물어 뜯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얼마든지 일어 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고, 항상 우리가 할렐루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감정문제- 잘 처리를 해야 합니다.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점점 무게를 갖고 다가 오고 있습니다. 왜냐면 화를 낼 만한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에 농사나 짓고 살때와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교회생활가 목회도 마찬가집니다. 옛날의 교회와 요즈음의 교회나 신앙생활이 너무나 달라요.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너무나 많고 복잡합니다. 저도 일이 제대로 잘 안된다든지 할 때에 화를 잘 냅니다. 그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황목사님도 감정을 잘 다스려야지]하고 속으로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참 오늘날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왕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우리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수양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드디어 새 황후를 뽑으라는 간택령이 내렸습니다.
언제 이 명령이 내렸을까? 아하수에로왕이 왕위에 오른 제 3년에 와스디가 쫑겨 나갔습니다. 얼마후 감정이 식은 다음에 와스디를 다시 부를까 하는데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왕의 권위상 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새 왕후를 간택을 하도록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같은 해 였던지 그 다음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2장 16절에 보면, 에스더가 새 왕비의 자리에 오른 때가 아하수에로왕 치세 7년입니다. 그렇다면 와스디가 쫑겨난 다음에 만 4년이나 됩니다. 왜 4년이라는 공백이 생겼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와스디를 폐위시킨 아하수에로왕은 왕비를 뽑으라는 명령만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아랍과의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 유명한 살라미해전을 통해서 페르시아의 하대는 궤멸되고, 그리스에게 쫑겨서 살아남은 자들만 끌고 돌아온 때가 2-3년이 걸렸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상심하고 위축되어 있는 왕을 위로 할 수 있는 길은 새 왕비를 맞이해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왕비간택을 서둘렀다고 봅니다.
성경에 보니까 왕비 후보자들이 왕을 만나서 접견하는 기간이 1년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
들이 가과 접견하기에는 많은 기간이 걸렸을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하냐? 하는 것입니다.
평안히 사는 그리스에 군대를 끌고 가서는 왕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는 아군, 적군 할 것없이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몇십배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만든 이 왕이 돌아와서는 그것을 조그모 뉘우치는 마음도 없이 이미 명을 달리한 군사들, 적국의 수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서 자기 자신이 자숙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패배한 자기의 상처,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또 수많은 페르시아의 처녀들을 데려다가는 자기의 욕구를 채우느라고 정신이 없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럽고 악하냐?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서 이처럼 악하고 더러운 동물이 또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닌성을 우리가 무엇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만, 아하수에로왕의 하는 짓을 볼 때에 끔찍끔찍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왕이 왕비를 뽑기 위해서 처녀들을 접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5-6절에 보면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느브갓네살왕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왕인 여고냐를 잡아 가지고 바벨론으로 끌고 갈 때에 함께 잡혀온 사람입니다. 여고냐는 바벨론에게 처음에는 굽신거리다가 나중에는 애굽을 믿고는 바벨론에 대해서 약간 반발을 했습니다. 이것을 괴씸하게 생각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여고냐를 끌고 바벨론으로 가고, 자기에게 잘 순종할수 있는 허수아비왕을 이스라엘에 세웠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 때가 주전 599년이었습니다. 그 때, 모로드개가 몇살이었는지 모르지만, 귀족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총명하고 용맹스러운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만 보더라도 흐리멍텅하고 별고 쓸모가 없는 사람을 끌고 갈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에스더의 사건이 언제있었던 것이냐하면, 대개 주전 514년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르드개가 바벨론으로 끌려온 후 약 85년 후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여기에 나오는 모르드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90세이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배경은 베냐민 자손이요, 기스의 증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므이의 손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왕의 후손이 아닌가 추측을 합니다.
그리고 시므이라는 사람은 사울왕의 자손으로서 악명 높은 사람입니다. 다윗왕을 원수처럼 미워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왕이 자기 아들에게 쫑겨 갈 때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던 사울왕가의 혈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에스라 2:2절에 보면,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다시 건축해도 좋다고 하는 귀환포고를 했을 때에,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유명한 유대 지도자가 4만여명의 아주 믿음 좋고, 애국심이 강한 유대인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제1차로 돌아 갔는데, 그 돌아간 사람들 이름이 에스라 2장 2절에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드개가 1차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기쁨으로 성을 건축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해서 중단되고 맙니다. 꿈을 안고 돌아온 보람도 없이 16년 동안이나 중단된 대역사를 바라보는 중에 그는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수산성에 머물면서 유대인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유대의 지도자였습니다.
모르드개의 삼촌은 모르드개와 함께 잡혀와서 거기서 에스더를 낳았고,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모르드개가 돌보아 주고 키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먼 도성 수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성이라는 말은 왕궁인데, 왕이 겨울을 나는 곳입니다. 얼마 전에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 보면, 이 수산궁은 도시안에 건설된 것이 아니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별장과 같은 기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곳에 모르드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왕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던 관리나, 왕궁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 틀림이 없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하수에로왕이 전국에서 인물 좋은 처녀들을 사방에서 모을 때에,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보내지 않을려고 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에스더가 출중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니렸을 것이고, 아무리 숨길래야 숨길수 없는 상황이 놓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에스더도 아하수에로 왕궁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끌려 들어간 처녀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1차,2차,3차 선발을 거쳐서 왕을 직접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처녀들이 일단 왕을 한번 만나기만 하면 그 처녀들에게는 대단한 선물이 주어지고,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1년동안 몸에 향을 바르고 몸을 가꾸어야 했기 때문에 몇백명을 동시에 그렇게 할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처녀들이 왕을 만나서 테스트를 받는 것이 언젭니까? 14절을 보면 저녁에 왕에게로 들어갔다가 아침에는 나옵니다. 나올 때는 선물을 받아 가지고 는 궁녀들을 거느리는 신하 밑으로 돌아 가서는 왕이 다시 불러 줄까하고 손을 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왕이 기억지 아니하면 다시는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는 불쌍한 여인들입니다. 이것은 왕가에서 있는 보통의 일 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왕정이라고 하는 것만큼, 더럽고 무자비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실 이 세상 역사를 보면 왕정만큼 인간을 괴롭힌 일이 없고, 악을 많이 저지른 것이 없습니다.
유대나라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정을 허락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왕정은 인간을 탄압하는 제도요, 한사람이 호강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종살이를 해야 하고, 그야말로 인권도 짖밟히고 몇사람, 몇가정을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이 일생을 희생을 당하고 굴욕을 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죄악의 유물이요, 인간이 타락한 데서 오는 더러운 제도라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아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자기가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백성들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볼 때에, 선지자들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초라합니다. 다른 나라 왕들에 비하면 너무나 국가의 자도자가 약해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두 왕을 세우겠다고 야단을 치니까 사울왕이 허락이 되었습니다만, 그 때에 사무엘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왕이 서면 그 왕은 너희들에게서 좋은 것은 전부다 빼앗아 갈 것이다. 너희들의 딸들, 너희들의 아들들,너희들의 우양, 좋은 것은 전부다 빼앗아 갈 것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또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삼상 8:18절에 [그날에 너희가 세운 왕에게서 등을 돌리고 여호와께 부르짖겠지만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들은 체도 않을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는 오늘 우리는 얼마나 복이 터진 사람들인 줄 모릅니다. 참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우리가 자유를 얻을려고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나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국민의 뜻에는 복종을 해야한다는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고, 이 정치제도가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을 생각할때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지금부터 1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이 중에서 귀족으로 권세를 누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모두가 이씨 왕가를 섬기느라고 정신이 없겠지요.
왕이라는 것이 이렇게 더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린 것도 이 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두 인격을 하나로 만들어서 서로 의지하며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의도하신 것은 1부1처입니다.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마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인물이 너무 뛰어나도 왕궁으로 끌려 가기 쉽고, 남자가 너무 뛰어나도 풍파가 많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뛰어난 왕입니다만, 그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려 버렸고,백성과 신하들에게는 많은 짐을 지운 사람입니다. 그래도 훌륭하다는 왕이 그 정도에요. 솔로몬을 보세요. 부인이 몇사람입니까? 부인이 천명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정말로 더러운 사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뒤 떨어진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우리가 중국에게 뒤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씨 조선의 왕정이 망쳐 놓았지요. 임금하나 섬기느라고 백성들이 수백년 동안 종노릇 한 것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이제 에스더가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을 만날 때까지 준비를 했는데, 한가지 특이한 것이 있는데, 10절을 보면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고하지 아니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즉,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겼다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에스더가 유대민족을 배반했다는 말도 아니고, 에스더가 하나님의 신앙이 없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르드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에스더에게 [너는 가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고 당부했습니다. 두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20절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보고 [너희는 항상 다른 민족과 구별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섞이지 말고, 혼인을 금해야 하고, 신앙을 팔아 먹는 어떤 영적인 간음을 행해도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어디가서든지 밝혀야 합니다. 이것을 밝히지 아니하면 언제 혼혈이 되고, 언제 멍에를 같이 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언제든지 유대인이라는 표를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과 섞이는 것을 막았습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에 잡혀 갔어도 끝까지 자기의 혈통을 지킨 것을 에스더 후반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유대인 사회가 있었고, 그들의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문화를 끝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아도 유대인들의 그 끈질긴 민족성, 끈질긴 선민의식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배경이나, 자기의 출신을 숨긴다는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힘으로해서 왕궁으로 끌려간 에스더의 운명이 참으로 비참해질 수 있다고 모르드개가 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타개하고 현실을 사는 지혜는 자기의 혈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딜레머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내가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을 밝힐 것이냐? 아니면 숨기는 것이 더 좋으냐? 하고 고민을 할 때가 있을지모릅니다.
그런데 보세요. 제가 볼 때에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잘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처음부터 임했다고 한다면 자기의 민족을 대고 자기 배경을 밝힘으로서, 당장 어떤 마이너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그들이 믿었다면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에 에스더가 [나는 유대여자]라는 것을 밝혔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더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을지도 모르고, 왕후가 되었더라도 하만이라고 하는 음흉한 사람이 유대민족을 멸족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후가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히 그런 생각을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에스더가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왕궁에 들어간 것이 1년이 넘도록 하만 때문에 피를 말리는 고통과 고민 속에서 살게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몹시 어리석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이런 우를 범하고 스스로 화를 자초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처신을 하는 것이 여러가지 불리한 것 같이 느껴지는 환경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요. 내가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옳은 일이냐? 아니면 숨기고 이 위기를 넘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냐? 주님 앞에 물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나가면, 처음에는 실패 같이 보여도 그것이 나중에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요, 만약에 우리가 신앙이 없는 태도를 가지고 지혜라고 생각하고 발을 들여 놓으면 처음에는 성공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불행한 자리로 떨어지는 어리석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여기에서 실수를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이런 약한 부분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계속 베푸시는 것을 봅니다. 9절에 보면, 에스더가 왕궁에 들어 갔는데, 처녀들을 맡은 감독자의 눈에 에스더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15절 끝에 가면 에스더는 감독자에게만 잘 보인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동료 처녀들이나, 모든 왕궁의 신하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나갈 때에 왕의 마음에도 들만큼 모든 면에서 은총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평범하게 보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다니엘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사람에게 은총을 입고, 사람의 눈에 잘 드는 것은 자기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히 만난 사람을 통해서 좋은 길들이 계속해서 열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마음에 쏙 든다는 것이 쉬운일입니까? 그런데도 처음 만난 사람을 통해서 모든 것이 잘 풀려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에스더서 전체를 흐르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지요. 여러분, 포로로 잡혀 와서 초라하게 사는 모르드개와 에스덥니다. 모르드개는 나이도 많고, 아니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에스더는 또 포로로 잡혀온 가문에서 태어나서 부모도 없이 외롭게 자랐습니다. 사실 두 사람을 보면 너무 초라하고 너무나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보니까 너무 암담해서 믿음없는 사람처럼 행동을 한 것도 보입니다만,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그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불쌍히 여기시사 그들을 향하신 높고 아름다운 뜻을 가지시고, 발걸음 하나하나 마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신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볼 때에 초라한 것도 많고, 여러가지 면에서 심히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막힌 은총르로 대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하나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신다고 했습니다. 참새 두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했거늘,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걸음걸음 하나마다 하나님이 지켜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고 저는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지켜보십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든 기뻐서 웃는 일이든 간에, 그 모든 일들이 나에게 일어난 이상은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설혹 내가 실패해서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선하신 우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