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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8-24
순종과 축복 / 이삼규 목사
뉴욕에 한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 레스토랑에는 그 주변의 나이 드신 까다로운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주방장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 “손님은 왕이다. 절대로 싸우지 마라라! 손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점잖은 할아버지가 오더니 음식을 주문하는데, 감자를 튀겨서 달라고 했습니다. 감자를 튀겨 오니까 너무 크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썰어서 튀겨 오니까 이번에는 너무 두껍다고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에 걸쳐서 주문을 하니까, 주방장이 그만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옆에서 “순종, 순종, 순종" 하고 말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한입에 쏙 들어가게 다시 튀겨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님이 감자 튀김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너도나도 그 감자튀김을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은 그 감자튀김 때문에 유명해져 손님이 더 많이 오게 되었고, 그때서부터 ‘포테이토칩'이라는 새로운 메뉴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까다로운 손님의 주문을 다 들어주다 보니까 새로운 메뉴 하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여도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순종하면 어떤 축복을 받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순종으로 축복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순종과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1)엘리야의 순종
본문 2절과 3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라고 하였습니다.
사악한 아합 왕 앞에 서게 하신 하나님은 갑자기 엘리야로 하여금 여기서 떠나 숨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의 국운이 어두운 역사의 무대에 엘리야를 사용하실 바에는 아합과 정면 대결로 싸우게 하실 일이지 왜 숨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숨으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숨고'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면서 18장 1절을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영원히 숨겨 두실 의도는 아니었음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엘리야를 다시 끌어내실 것입니다. 그를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켜 아합과 더불어 싸우게 하시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여 승전가를 울리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먼저 숨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숨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서 엘리야는 필히 배워야 할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자신이 가졌던 모든 신앙도 의미가 없기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명하여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큰소리 쳤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이제 '숨으라.'고 하시니 얼마나 입장이 곤란했겠습니까?
자신만만하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갑자기 숨으라고 하시니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고, 비겁한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본문 5절을 보시면 엘리야의 행동이 잘 비쳐지고 있습니다.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엘리야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고집과 아집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기 경험에 비추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고, 그 말씀대로만 살았고,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대로, 내 기분과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오직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많이 순종하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제부터라도 엘리야처럼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뜨거운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 때 승산이 있습니다. 거기에 축복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못할 때, 그때부터 성도는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이 다 짐이 되고, 인생의 사는 목적도 잃어버리고 깊은 회의 속에서 비참해져 갈 뿐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갔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생각이나 경험이나 고집을 결코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그리고 매일 매일 내 삶속에서 내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도록 명령하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엘리야는 어떻게 순종합니까?
5절을 보시면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너무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릿 시냇물이 마르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다시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9절).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까지 명령하신 그릿 시냇가에 앉아 있던 엘리야에게 다시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엘리야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10절을 보시면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엘리야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릿 시냇가는 좁고 협소한 계곡입니다. 결코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릿'이라는 말의 뜻이 '분리', '단절'인데 좋은 환경에서 단절되고 분리되어진 나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환경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불평과 원망을 내뿜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나아갔습니다. 신앙은 결코 환경에 좌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들쑥날쑥 한다면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는 120㎞ 정도의 거리입니다. 교통수단도 여의치 않던 시대에 그 먼 거리를 가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왕에 보내 주실 바에는 가까운 곳으로 나를 보내 주시지 왜 하필이면 그 먼 곳까지 가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지 않았을까요?
그뿐 아니라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엘리야를 시험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라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어나 갔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하고, 멋있는 신앙입니까?
2)사르밧 과부의 순종
엘리야가 사르밧에 도착해서 맨 먼저 만난 사람은 한 과부였습니다.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떡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과부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Please bring me a drink of water)라고 했습니다.
3년의 기근 시 물 한 모금은 정말 싼값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동지역에서 냉수 한 그릇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왜 먼저 물을 달라고 했을까요?
순종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작은 일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큰일도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과부가 힐끔 쳐다보면서 “왜 당신은 나한테 물을 달라고 합니까?"하고 휙 가버렸으면 도움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달라는 요청을 듣고 물을 가져다 주려 하자, 엘리야가 또 말했습니다.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please bring me some bread, too)이번에는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물 한 모금 주는 것도 큰 적선인데 거기에다 먹을 떡 한 조각까지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입니까? 여인은 몹시 의아했고, 당혹스러워서 "나에겐 조금의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밖엔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남은 한 움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을 사용하여 떡을 구워 아들에게 먹게 하고 죽으려는 참이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당신은 지금이 어느 땐지 모르느냐? 당신이 누군데 물 가져오라, 떡 가져오라 하느냐?"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왕상 17: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왕상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이 과부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선지자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떡을 만들어서 엘리야에게 줄 것이냐? 아니면 그냥 돌아가서 떡을 만들어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것이냐?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결단입니다. 여인은 어떤 결단을 내렸을 까요? 순종입니까? 불순종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이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원하십니까?
순종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좋은 환경에서는 누구나 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조건에 다다르면 순종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보릿고개 때 어쩌다 손님이 오면 특별히 아껴둔 쌀을 꺼내서 한쪽에다 살짝 얹어서 손님에게 접대를 합니다. 자식들이 많은 집에서는 쌀밥 구경하기가 참으로 어렵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손님이 조금이라도 남기면 얻어먹으려고 아이들이 눈치 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 불쌍하지는 않지요. 사르밧 과부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마지막으로 빵 하나 구워서 먹게 하려고 하였는데 엉뚱한 손님이 찾아와서 떡을 내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떡을 선지자를 위하여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사르밧 과부는 순종하였습니다.
2.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1)엘리야가 받은 축복
1>까마귀를 보내 주시는 축복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릿 시냇가로 갔더니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보내주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까마귀는 본래 욕심이 많고 게걸스러운 새가 아닙니까?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냈을 때 까마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가 먹을 수 있는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를 위하여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까마귀가 언제 떡과 고기를 날라 왔습니까?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마찬가지로 떡과 고기를 날라 왔습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과연 순종의 자리인가 하는 이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해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처한 이 환경이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 내 직업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보다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지금 하나님이 명하셔서 여기에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고, 오늘 나를 여기 있게 하셨기에 나는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처한 환경이 절대 좋은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백화점이 있고, 상가가 형성되고, 사람이 북적대는 그런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머무는 장소가 험난하고 인적이 끊긴 좋지 못한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숨어 있는 엘리야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주 특별하게 역사 하셨습니다.
잘 훈련된 개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묵묵한 사람을 동원하지 않고 까마귀를 동원하십니다. 까마귀는 레위기서에 보면 부정한 새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부정한 새까지도 동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두 차례씩 공급하셨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역사와 자연적인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는 것은 초자연적인 역사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런 기적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할 때, 일상적인 방법과 수단으로서 나의 생존이 불가능해졌을 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내 삶을 책임지시고, 내 필요를 채우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날마다 이런 기적만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공급하시지만 물은 어떻게 마시도록 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시면 마실 물에 대해서는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왕에 기적을 베푸실 바에야 '갈아 만든 사과'나, '잔칫집 식혜'같은 청량음료까지 주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해야 할 부분을 남겨 놓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기대하기 이전에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서 성도답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마시라고 하신 그 시냇물은 어떤 물입니까?
출렁출렁 넘치는 물입니까? 말라 가는 시냇물입니다(7절). 이왕 청량음료도 주시지 않을 바에는 가물어도 생수가 펑펑 나오는 약수터로 인도하시지 왜 말라 가는 시냇가로 인도하셨을까요? 점점 말라 가는 시냇물을 보면서 엘리야는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여러분이 엘리야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즘처럼 정리 해고, 명예퇴직, 조기 퇴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명예퇴직을 해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출근하는 것처럼 그냥 집을 나서는 남편들이 상당히 늘어가면서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상담하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조기 퇴직 당하고, 한 달 후면 생활비가 끊어지고, 자식을 가르칠 수단이 모두 끊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방으로 살길을 찾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의존하고 있는 시냇물이 말라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떠나라고 하시기 전까지 엘리야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떠나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엘리야의 철저한 순종의 자세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나 서두르며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의 삶을 통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말라 가는 시냇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명하시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다는 순종의 자세로 머물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릿 시내가 마르기까지 그곳에서 엘리야의 삶을 책임지셨습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2>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시는 축복
그릿시냇가를 떠난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르밧 땅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과부를 만났습니다. 엘리야가 이 과부를 만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 대가로 주신 축복입니다. 비록 가난한 여인이었으나 이 과부의 손길을 통하여 공궤를 받게 하셨던 것을 봅니다.
엘리야는 적어도 사르밧 땅에서 2년 가까이 아무 염려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에 주신 축복입니다.
2)사르밧 과부가 받은 축복
1>다함이 없는 축복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엘리야의 말대로 행동한 과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루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은 엘리야와 과부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다함이 없이 하루하루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여러분은 기대하고 있습니까?
넉넉하지 못하지만 다함이 없는 축복!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오히려 넉넉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범죄의 자리에 떨어지고 있습니까?
넉넉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랬더니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내 삶을 채워 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 집의 통의 가루 한 움큼, 병의 기름 조금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여인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이런 것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삶속에서 넉넉함이 없기 때문에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주변의 넉넉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똑같은 축복이 주어지지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며 세월을 허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넉넉하지 못하기에 주님을 바라보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는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한 몸을 이끌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기도하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 나약함은 오히려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내 가난함 때문에 보장받지 못한 내일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따른다면 오히려 그 가난은 축복입니다.
중국의 선교의 문을 열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한 번도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함으로 당당히 하나님의 일을 해낸 선교사입니다.
그가 시작했던 선교 단체가 지금은 O. M. F라는 선교 단체가 되었습니다. 이 선교 단체의 중요 원리 중의 하나가 신앙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속한 선교사들은 '나는 무엇이 필요합니다.'라고 사람 앞에 자기의 필요를 말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그 선교사들이 지금까지 굶어 죽었거나 필요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못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순종하는 사르밧 과부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다함이 없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생명의 축복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왕상 17: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목숨보다 더 중요한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여 자기의 죄가 생각났습니다. 예언자가 자기와 함께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 죄에 주목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그 죽은 아들을 달라고 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와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생명을 바치는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삶을 책임지십니다. 다함이 없는 축복을 주십니다. 생명의 축복을 주십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처럼 순종의 사람이 되어서 이런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