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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14. 한 사람이 꿇어 엎드려 15. 불쌍히 여기소서 16.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 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마 17: 18. 꾸짖으시니
2.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 17: 14-21. 막 9: 14-29. 눅 9: 37-43 상 )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마 17: 14. 한 사람이 꿇어 엎드려 -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
주의 세 제자가 무리에게 다가왔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렸다.
그 사람은 예수의 신성과 신적 능력을 믿었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었다.
1]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이르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오셨다.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였다.
막 9: 14에 보면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우리는 여기서 산 아래 광경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9명의 제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한 사람'은 귀신들린 아들들을 둔 부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보고 있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이르되' 이 사람의 신앙의 자세가 되어있다. 전능하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피조물의 기본신앙의 자세다.
여기서 '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가 있고, 항복의 의미가 있으며, 모든 것은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께 맡긴다는 의미가 있다.
또 꿇어 엎드린다는 자세는 늘 깨어 기도하는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능력자요, 힘이 있는 자다. 본문에 이 부모는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에게까지 왔으나 해결 받지 못했으므로 다시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마 17: 15. 불쌍히 여기소서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 (Byz C D W ita b d ff2vg (syrp) cop(meg)arm Diatessaron Origen 등.)
그 아들은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고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겪었다.
1]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퀴리오스)는 헬라어로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 2. 17: 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디다스칼로스'(*,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
* 막 9: 17 -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막 9: 21과 눅 9: 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 막 9:21 -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 눅 9:38 -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영어 성경에는 ‘미친’(lunatic)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원문의 단어는 우리 말 성경대로 ‘간질’이라는 의미가 있다.
2]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간질(*, 세레니아조마이)은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이다.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때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 막 9: 20 -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심히 고생하여(*, 카코스 파스케이)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 막 9: 22 -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한다.
이 아이의 간질병은 보통 간질병이 아니라 귀신이 들려 간질병이 든 경우로써 막 9: 17에 보면 그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가 나타내는 증상이 간질과 똑같았다. 귀신이 역사하면 어린아이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거꾸러뜨린다. 저도 어렸을 때 동네 아주머니가 꼭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그 물 속에서 간질 하는 여인을 보았다. 거품을 품고 이를 갈며 발작을 했다.
이런 자녀를 가져보지 않은 부모들은 이 귀신 들린 아이의 부모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분통하겠습니까? 그 아들이 외아들이었다. 부모의 신앙이 귀하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을 메시아로 불렀으며. 생명의 주인으로 불렀다. 신앙은 고백이 위대해야 한다. 신앙이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덧입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긍휼하심을 덧입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한 시라도 살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모든 문제를 가감하지 않고 솔직히 주님께 고백했다. 이런 신앙이 귀한 신앙이다. 마 9: 21을 보면 예수님이 이 아이가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으실 때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라고 대답을 했다. 벌써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귀신이 근방들린 사람은 빨리가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잘 나간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신에 잡혀있는 사람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귀신이 육체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모는 아이를 고칠 수있는 방법이라면 돈이나 체면, 어떤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다. 막 5장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시달리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다. 막 5: 26에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불쌍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에 가서 옷자락을 붙잡고 병이 나았다.
본문의 부모도 결국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 하룻밤 철야 기도를 하셨다. 이 부모는 할 수 없이 남은 제자들에게 찾아갔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았는데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귀신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동을 부렸다.
어린아이를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넘어지게 했다. 그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서기관들이 있었다. 서기관들은 그러지 않아도 저것들이 고쳐내나 어디 보자는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생각에는 그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사 깨끗하게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교만한 서기관들의 입을 딱 막았으면 얼마나 통쾌했을까? 서기관들은 아마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큰 소리 치더니 아이로 더 망가뜨렸구먼!'하고 빈정댔을 것입니다.
마 17: 16.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열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지만(마 10: 1), 무슨 까닭인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다.
같은 배경에 막 9: 18에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 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했다. 대신 남은 아홉 제자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
* 마 10: 1 -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눅 10: 17 -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2]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의 실패는 13: 54 – 19: 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
* 마 14: 16-19, 26, 30, 33 –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마 16: 5, 22 –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마 17: 4, 10-11 –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마 14: 26-27, 31 –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도 여러분,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입니까? 주님께 다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마 10: 1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에게 권능을 주었다. 그리고 전도하러 내보내셨다.
마 10: 8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눅 10: 1 이하에도 똑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나가 전도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눅 10: 17 이하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귀신들도 나사렛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니까 산 아래 아홉 제자들은 이미 찬란한 영적 승리의 체험자들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무리들 앞에서 서기관들 앞에서 영 말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산밑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상실했고, 은혜를 다 까먹어버리고 나니까 이렇게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산아래서 세상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신앙인이 세속에 빠지면 무기력해진다.
신앙의 능력은 주님 앞에 있을 때 일어난다.
* 빌 4: 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난 심령은 살수가 없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석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질병을 치료하는 교회
산상에서 기도하러 올라갔던 예수의 일행은 하룻밤을 산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 아래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그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에게 나아와 간질에 걸린 자기의 외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눅 9: 38)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내 아들을 고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1) 산 아래 세상의 실상
① 죄로부터 오는 질병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다. 의학이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근절되기는 커녕 불치의 질병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아직도 암이 정복되지 않고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에이즈라는 새로운 공포의 질병이 발생하였다.
'페스트'에 비유되는 이 질병은 현대인들의 성의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천형의 병으로 알져지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온 지구촌이 페닉에 허덕이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씀으로서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죄는 심령의 평정을 잃게 하고, 심령이 평정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현대의학의 증언이다. 그리고 무지와 조심성의 결여가 질병 파급에 기여하고 있다. 이것 역시 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육체의 건강은 건강한 심령에 의해서 얻어진다.
②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은 다음의 세 악령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그것은 물질 만능사상과 권력 지상주의, 그리고 육적 쾌락주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 칼 막스는 이 세상을 '물질'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에 의하여 그 삶이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부터 물질 만능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을 점령하고 말았다. 물질이 인간의 척도가 된 것이다. 물질적 소유의 정도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이 악령은 인간을 물질화시킴으로서 비인간화에 기여하고 있다.
ⓑ 니이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규정했다.
이 사상은 '힘'의 우상을 낳았다. 권력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정치를 위해서는 모든 물리적인 힘이 거침없이 동원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해결 못할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 법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있다.
이 권력의 우상은 독재와 전제 정치를 탄생시키고 인간을 정치적 도구로 만듦으로서 비인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생명활동은 성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상은 현대인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펄벅은 오늘의 미국의 부부는 다만 '성의 동반자'로서의 의미밖에는 없다고 말한 일이 있다. '성의 자유', '성의 개방'사상은 간통과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미혼모, 기아(棄兒), 독신주의 등의 사회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물질(부), 힘(권력), 성(쾌락)은 현대의 3대 우상이며, 현대인은 이 세 우상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다 악령(귀신)에 사로잡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임을 말해주고 있다.
(2) 교회의 임무
① 간질병을 고치지 못하는 현대교회의 무능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절). 이 사람의 말은 바로 현대 교회의 무능을 찌른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 교회가 왜 간질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나? 그것은 교회 자체가 이 간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돈의 힘이 교회를 지배하고, 봉사자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고등 윤리 종교가 세속적 음란 문화에 휘말려 있다.
교회 자체가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간질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이 무능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이다.
② 산상의 신비적 체험이 교회의 임무를 회복하게 한다.
교회는 산 아래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산 아래 사람들은 모든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다.
교회가 이들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들을 치유해야 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치유 능력은 세상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는다.
교회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하여 신적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그 자체의 건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가 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못할 것이 없느니라'(마 17: 20)고 하신 것은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오늘의 모든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마 17: 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을 고치려는 제자들도,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당사자도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20절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1) 믿음이 없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 3-5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며 그를 배척했으므로,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다.
(2) 패역하였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여기 '믿음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패역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는 하면서도 '주인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패역'이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왜곡시킨다' '그르친다' '굽게 한다'는 뜻의 '디아스트레포'이다. 이 말은 잘못된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믿는 티가 나지 않는 생활이 바로 패역한 생활이다. 헌신이 없는 생활,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생활이 패역한 생활이다.
①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아담이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
ⓐ 불신의 근원은 하나님을 잃은 데서 왔다.
하나님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 되시는데 그 근원을 잃어버렸으므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되며 믿음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패역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요, 진리에 대한 거역'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부모 형제를 거역하고 이웃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패역'은 '거룩에 대해서, 정직에 대해서' 거역한다. 살인이 일어나고 범죄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나고 자연은 공해로 죽어가고 지구는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여러분!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2]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1)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실패도 여기에 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 여기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한 이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그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할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구원 얻을 믿음이 없는 것이고 본문의 제자들의 믿음은 역사를 일으키는 그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능력을 주신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없다면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믿음이 떠날 때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본문에는 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막 9: 23을 보면 아이 아버지가 주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믿음을 붙잡아야 한다. 왜 우리가 낙망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실패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큰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2) 믿음이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영적 원리에 붙잡혀야 한다.
매일매일 우리들의 생활 속에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야 합한다. 나도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귀하다.
미국의 수필가 에머슨은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이루며 산다.'고 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품은 생각에 따라 삶을 이루어 나간다.
* 잠 23: 7 -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① 큰 생각을 품은 자는 큰 작품을 남긴다.
우리들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입으로 시인하는 말의 능력은 더 크다.
* 롬 10: 10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약 3장을 보면 '혀는 키와 같아서 키가 끈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사람의 혀가 온 몸을 지배한다.'라고 했다.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은 돌고 돌아 비밀로 이야기했지만 돌아오게 되어 있다. 말이란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고, 파괴적인 말만하면 결국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런 말이 있다. '큰 사람의 화재는 아이디어이고, 보통 사람의 화제는 돈 이야기이고, 작은 사람들의 화재는 남의 험담에 있다.'라고 했다. 예부터 큰 사람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험담은 비난이다. 자기 자신이 먼저 해를 당한다.
②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려면 부정적인 감정에 항복하면 안 된다.
왜 실패자가 되고 왜 무능력자가 됩니까? 항상 부정적인 자기감정에 항복하기 때문이다.
③ 어떤 환경이나 형편에 처하든지 항상 좋은 것을 기대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상주시는 분이다.
* 히 11: 26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④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원망과 불평 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오,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도 대 수술을 받고도, 교통사고로 인하여 큰 부상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지켜 주심에 감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동안에 아니 1년 동안 내내 병원에 가지 않고 약 한 봉지 먹지 않고 건강하게 지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의 예배 행위다.
* 시 50: 23 -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⑤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기도를 드리자.
* 막 11: 24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 믿음을 키우시오. 큰 믿음은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능력을 행하지 못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실력 있는 사람이 됩시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 잘 버는 것이 실력이다.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실력이다. 정치가는 정권을 잡고 정치하는 것이 실력이다. 신앙인은 믿음이 큰 자가 실력자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3)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은밀한 죄가 있었다. '패역한 세대여!' 아마 이 9명의 제자들은 세 제자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했는지 모른다. 오늘날도 믿음의 원리는 원망과 불평 속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죄가 그 속에 있으면 하나님은 외면하신다.
* 시 66: 18 -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제자들의 헌신이 없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주님께 내어 바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난다. 하나님께 봉사, 헌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으로 연결된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본문의 22-23절을 보자.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문제를 나에게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다. 마 19: 26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3]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마 17: 18. 꾸짖으시니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 한다.
1]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예수께서는 그 병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한다(눅 13: 11의 경우도).
귀신이 나가자 그 아이는 병이 나았다. 주님의 능력은 바로 이것이다.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정상적인 아이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 우리도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한다. 기도와 말씀과 믿음의 능력으로 귀신을 꾸짖어야 한다.
막 16: 17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 안에 사탄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든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믿기 바란다.
그러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2] 믿음의 능력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산 아래에 내려오신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불신과 패역은 이 세상의 본질이다. 패역은 불신에서 오고 불신은 하나님을 잃은 데서 온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불신과 패역의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는 고통을 참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① 믿음이 없는 시대
'믿음이 없는 세대'는 실락원 이후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시대를 의미한다. 에덴에서 범죄했을 때 이미 우리 인간은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잃은 데서 온다. 불신의 근원은 하나님을 잃은 데 있다. 하나님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으면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그것은 곧 믿음을 잃는 결과를 가져온다.
믿음은 가치와 의미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참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거짓된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인간은 죄인이다.
세째, 이웃과의 관계에 믿음이 없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잃어버린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된다. 믿음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 5)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참된 이웃이 없다. 이웃에 대한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으면 멸망이 있을 뿐이다.
② 패역한 시대
패역은 가치와 의미, 즉 진리에 대한 거역을 말한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부모에게도 거역한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 딤후 3: 1-4 –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와 돈과 쾌락이다. 이들은 권위에 대하여 거역한다. 이들은 거룩에 대하여 거역하며, 이들은 정치에 대하여 거역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권위'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거룩'과 '정직'은 위선으로 이해한다.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어비가 예사로이 자식을 죽인다. 폭력과 테러가 나라와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땅(자연)은 공해로 죽어가고 있으며 산과 들, 바다와 강, 거기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물이 공해로 오염되어 있다.
심지어 공기와 소리까지도 오염되어 있어 결국은 오늘의 인간들은 천륜과 인륜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윤리까지도 거역하고 있다. 패역한 시대가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2) 믿음의 능력
① 믿음의 능력은 귀신을 이긴다.
'그를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간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 마귀(귀신)을 이기는 것은 핵폭탄으로도 안 된다. 레이저 무기로도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마귀를 이기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엡 6: 13-17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나님의 이 전신 갑주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믿음이 이긴다.
② 믿음의 능력은 질병을 고친다.
예수께서는 간질병자를 고쳐 주셨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을 예수께서는 깨끗이 고쳐 주셨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질병)를 다함께 구원(치료)시키신 일로 가득 차 있다.
예수에게는 질병의 고침은 곧 죄의 사유이며, 그것은 다시 마귀(귀신)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병 고침은 생활의 구원이며, 삶 자체의 구원을 의미한다.
예수의 구원은 영혼과 육체, 즉 전인 구원을 의미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능력을 모든 믿는 자에게 위임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 17-18).
이 말씀은 신유의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출 15: 26 –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 약 5: 15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 막 5: 15-16 –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교회가 병을 고치는 사명을 외면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직무유기이며, 주님께 대한 거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