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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에서 겪은 참패는 단순히 경기장에서 벌어진 패배를 넘어, 오랜 기간 누적된 우리 축구계가 쌓아온 행정적, 철학적 부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이다. 언론과 팬들은 연일 감독의 전술 부재와 선수의 기량 부족을 탓하지만, 이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한국 축구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의 인물론에 매몰되어, ‘우리는 어떤 축구를 지향하는가’라는 본질적 철학을 정립하지 못한 데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아들들에게 일찍이 독서의 요체에 대해 “독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치며, ‘선립근기(先立根基)’, 즉 ‘먼저 근본을 세우고 기초를 다지는 일’을 강조했다. 다산에게 있어 독서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배움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그 근본을 세워야 하며, 그 근본은 다름 아닌 부모에 대한 ‘효(孝)’와 형제간의 ‘제(悌)’라는 인륜에서 시작된다고 가르쳤다. 즉, 학문은 인격을 닦는 일에서 출발해야 하며, 비로소 그 바탕이 견고할 때 독서를 통한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드는 법이다.
이러한 다산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 축구가 겪고 있는 위기를 진단하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축구 기술의 화려함과 전술의 정교함만을 좇느라, 정작 축구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 자세’를 망각한 것은 아닌가? 최근 논란이 된 홍명보 감독의 소통 방식과 리더십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러한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단순히 공을 잘 차는 기술적 노하우가 아니라, 축구라는 공동체 안에서 선수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 즉 ‘축구인으로서의 근본’을 세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독서를 잘하기 위해 먼저 인륜의 바탕을 세워야 하듯, 축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축구인으로서의 정직성, 소통 눙력과 예의,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라는 ‘근본’이 먼저 바로 서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카멜레온’과 같은 팀이었다. 강팀을 만나면 극단적인 수비 축구를, 약팀을 만나면 모호한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며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수시로 바꾸어 왔다. 감독이 바뀔 때마다 팀의 색깔이 매번 백지상태에서 시작되는 이 비효율적인 순환 고리는 한국 축구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다. 선진 축구 강국들이 수십 년에 걸쳐 자신들만의 ‘축구 철학’과 ‘언어’를 구축하고, 유소년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일관된 시스템 안에서 선수를 길러내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한국 축구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체계적인 철학적 산물로 보지 않고, 오직 월드컵 본선 진출과 단기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소비해 왔다.
축구협회는 연간 약 1천억 원 규모의 예산을 집행한다. 이 가운데 약 300억 원은 정부 보조금과 국민체육진흥기금 등 공적 재원이다. 그럼에도 운영의 폐쇄성은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2002년 히딩크 감독 이후 잠시 와해된 듯했던 그들만의 견고한 ‘카르텔’은 이제 은밀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다시 형성되었다. 학연과 지연, 협회 내부의 이해관계로 얽힌 이 카르텔은 외부의 정당한 비판을 사실상 차단하고, 축구의 미래를 위한 혁신보다는 조직의 안위와 기득권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막대한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국기(國技)와 같은 스포츠 조직이 공공성을 상실하고 특정 세력의 전유물로 전락한 현상은 한국 축구가 직면한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구조적 문제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목격한 참패는, 우리가 그토록 자랑해 왔던 ‘투혼’이라는 단어마저 이제는 전술적 빈곤을 가리기 위한 낡은 구호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현대 축구는 데이터와 과학, 그리고 철저히 계산된 전술적 약속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정신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체성을 잃은 팀은 위기 상황에서 결코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축구협회는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 축구의 100년 대계를 세울 구체적인 ‘축구 철학’을 선언해야 한다. 이 철학은 감독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한국의 신체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을 결합한 한국 축구만의 고유한 정체성이어야 한다. 빌드업을 할 것인지, 강력한 압박을 할 것인지, 어떤 형태의 축구를 하든 그것이 초등부부터 국가대표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장의 월드컵 성적이라는 이해(利害)를 내려놓고, 축구계 내부의 인맥과 카르텔을 걷어내는 ‘시비(是非)’의 잣대를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찾아야 할 것은 또 다른 감독이 아니라, 어떤 지도자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한국 축구의 철학이다. 그것이 바로 다산이 말한 ‘근기’를 세우는 길이며, 한국 축구가 미래로 나아갈 나침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