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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동해 강릉으로 해파랑길을 다시 이어 떠나려는 나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편칠 않다. 어차피 사람은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견해가 다 다른 거라고 일축하기에는 가슴 한켠이 서늘하다. 30도가 넘는 불볕더위 폭염에다 본격적인 장마철인데, 동해 외딴 피서지 여자 혼자서 큰일난다고 급기야 나를 만류하기에 이른다. 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축복과 파이팅으로 힘을 주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태양의 후예’ 에서 꽃미남 송중기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초죽음하고 있는 꽃미녀 송혜교에게 바람같이 나타나서 한 말.
“그 어려운 걸 제가 또 자꾸 해내지 말입니다.”
드라마 속 송중기는 건물붕괴 현장에서 인명을 구하고 폭탄을 제거하는 일, 칼과 총에 맞서는 일 등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일에 뛰어든다. 그러나 내가 한달에 한번씩 매주 한주간을 걸어내는 동해안 해파랑길은 태양의 후예만큼 위험하지도 죽을만큼 힘들지도 않다. 안 가본 길, 나이 들어 혼자 걸어서 가는 기나긴 길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내재적인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으로 나는 자꾸 또 그 길들을 걸어내고 있다.
7월 19일 화요일 아침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해 강원도 임원에 12시 경 도착했다. ‘삼척십경’ 이라 일컫는 이사부 사자공원, 해양레일바이크, 해신당공원, 맹방명사십리, 수로부인 헌화공원, 황영조 기념관, 관동팔경 죽서루가 해파랑길 삼척구간에 들어있어 무척 기대되는 곳이다. 정오의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나 그다지 뜨겁지는 않다. 지역별 날씨를 보니, 서울이 32도인데 이곳 삼척 강릉은 23도이다. 서늘하니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나의 해파랑길에 축복이 내린 듯하다. 감사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검봉산 자연휴양림 안내 리본 따라 가는 길 이 싱그럽다. 들판의 모들이 힘을 주체 못하는 청년처럼 어느 새 키가 쑥 자라선 불어오는 바람 타고 녹색 물결 장관을 이루었다. 지난 달엔 어린 모가 막 심어져 애기 크듯이 연두빛 모습으로 무척이나 귀여웠었다. 다음 달에 오면 장노년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모들이 자라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은 바라만 봐도 대견하고 신통하다. 나이 들어서야 느낄 수 있는 진짜 고마운 행복감이리라.
검봉산 휴양림에 도착해 보니 길을 잘못 들은 것 같다. 지도를 다시 보니 검봉산 휴양림을 거쳐가는 게 아니고, 옆으로 살짝 비껴서 코스가 있다. 2km 정도 다시 되돌아가니 쇠붙박이에 달린 주홍 노랑 리본이 팔랑거린다. 스틱을 세워 심호흡을 했다. 덕분에 검봉산 휴양림 안을 조금 돌아보긴 했으나, 나의 치명적인 약점인 사물을 대충 보는 좋지 못한 버릇을 이참에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좌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숲길 임도길이 계속 이어진다. 무엇이 나와 덮칠 것만 같은 으스스한 길에 오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기도로 마음을 다잡으며 걷는다. 언덕 정점인 듯한 곳에 표시판이 보인다. 이 길이 수로부인길이라고 한다. 수로부인길은 절벽에 핀 꽃을 갖고 싶어하는 수로부인에게 암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꺾어 바쳤다는 ‘헌화가’ 와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데려간 바다용왕에게 남편인 순정공이 노래를 부르며 땅을 쳐 구해냈다는 ‘해가’ 가 있는 절벽 해안이나 바닷길일 거라 생각했었다. 지난달 울진에서 삼척으로 넘어오는 갈령재 그 길고 험한 언덕길도 수로부인길이라 한 걸 보면, 동해안의 경치 좋은 삼척과 동해, 강릉시에서 저마다 수로부인길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이었던 수로부인이 혼자서 이런 길을 다녔을 리 만무하고, 남편과 식솔들이 있는 길 위에서 절벽 위의 붉은 꽃을 누가 꺾어줄 수 없느냐 말하는 여인은 실로 대담하다. 또한 바다 용왕이 낚아채갈 정도였다면 그 미모도 상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수로부인은 미색과 당당함을 갖춘 당대의 여걸 여성영웅이었으리라. 사십 오세 만학도로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국어 고전문학 분야를 공부하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한동안 여성영웅소설에 완전히 매료되었었다. 남편의 긴 간병과 경제적인 생활고로 힘든 시기, 자식과 주변인들에게 일상생활인 듯 참으로 많은 걸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여성영웅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여성시각으로 본 여성영웅소설을 연구하여 석사학위도 받았으며, 지금도 나는 소리 없는 내 안의 여성영웅으로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호랑이나 산적들이 나올까 아찔한 고갯목이라 ‘아찔목 잿길’ 이 변하여 현재 ‘아칠목재’ 로 불리우는 곳에서, 아무 생각 없던 길이 되려 더 무섭고 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나마 일찍 피어 미소 짓는 분홍 하양 코스모스랑 노랑 보라 들꽃들이 반겨준 덕분에 아무 탈없이 재를 넘어 잘 내려왔다.
알록달록 어린이 놀이터만 보면 그저 반가운 초등학교, 용화리 장호초등학교를 지나 용화해양바이크레일 정류장이 보인다. 해변으로 가는 운치 있는 다리를 건너 용화해변에 발 벗고 들어갔다. 무지개빛 파라솔 사이로 솟구쳤다 사라지는 물거품 하얀 파도가 휴가 온 가족들 물놀이 풍경과 참으로 시원하다. 언덕을 몇 번 오르내려 거의 지치다시피 어스름이 필 무렵, 오륜 마크의 꽃 형상이 보이는 ‘황영조 기념관’ 에 들어갔다. 강원도 삼척 초곡항에서 해녀로 조개 전복 미역을 잡고 말리는 물질을 해가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영웅을 길러낸 평범한 듯 보이는 어머니. 경주 내내 특히 마의 시간대에서 어머니를 생각했고, 해녀 어머니 폐활량을 닮아 마라톤에 유리한 조건이라고 ‘내 어머니 내 고향 삼척’ 성장관에서 황선수는 술회한다. 값진 금메달은 결코 선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 눈물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볍게만 보아넘겼던 황영조 선수 그 한없는 어머니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과연 자식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 어머니일까? 나 스스로는 자식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뒷받침해주며, 얼마나 올바르게 성장시켜주고 있었는가? 숙연한 마음으로 기념관을 나왔다. 올림픽 금메달 기념 동상과 황선수 격찬의 글 도종환 시비, 마라톤 우승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메인 스타디움 예수의 언덕이라 불리우는 몬주익 언덕 조형물이 참으로 인상 깊다. 황영조 선수 집 찾기 망원경 속을 들여다보며,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다음엔 내 손자도 데리고 와서 보여주고 이야기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궁촌 레일바이크 궁촌해변에 도착해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무덤을 보았다. 어둑해진 길에 마읍천이 흐르는 덕봉대교를 건너니 낮은 덕봉산 섬을 사이에 두고 덕산해변과 맹방해변이 갈라진다. 덕산해변의 석양을 바라보며 물회 먹은 집 위층 민박에서 하루를 접었다.
다음 날 아침 비가 오는 해변 모래터에 초등학교 아이들이 비를 맞으며 해양훈련을 하고 있다. 청소년단체 지도자로 오래 활약하던 때를 추억하며, 시원한 빗속 비옷인 채로 꼬불거리는 해변들 맹방해변, 상맹방해변, 한밑재해변, 오분해변을 쭉쭉 걸어다녔다. 동양시멘트 공장이 보이는 마을길에 삼척교가 보인다. 오랍드리 산소길 뚝방길 코스와 죽서루 가는 길이 겹쳐진다. 삼척여고를 지나 삼척의 남산길은 서울처럼 아름답게 데크로 장식해놓아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산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 강물 풍경이 또한 절경이다. 넓은 광장에 세워진 엑스포 타운의 화려한 신비 동굴관, 삼척시립 박물관을 두루 보고 죽서정과 죽서교를 건너니 오십천 강을 끼고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죽서루가 보인다. 관동팔경 중에 유일하게 바다를 끼지 않고 강가에 세워졌으며, 정자의 기둥 반석이 지형 바위를 이용하여 자연의 깊이가 더한다는 죽서루는 기대와 달리 시들해 보였다. 오십천의 수량이 풍부하지 못하고 주변 나무들도 푸르름이 약하다. 몇 년 전인가 홍수와 태풍으로 오십천이 쓸려 내려가면서 상당수 나무들을 잃었고 복구를 못해 너무 안타깝다는 얘길 들었다. 정자 마루바닥에 누워 천정에 걸려 빛바랜 조선조 임금과 문인 선비들의 글들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바로 근처에 삼장사 삼산사 고찰들이 단청도 울긋불긋 곱다. 성당이 있을 법하여 찾아보았다. 사찰 있는 언덕 꼭대기에 성당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이 언덕 아래 마을을 굽어보며 은총을 주시는 모습으로 팔 벌려 서 계시는 삼척 성내동성당에 오니 포근하다. 무릎 꿇어 기도하는 소녀상이 응시하는 위를 바라보니 하얀 성모님이 나를 내려다보시며 내게도 평안과 휴식을 주신다. 지쳐 힘듬도 잡념 시름도 사라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오니 삼척시내 오른쪽 오십천 강가에 장미꽃 축제가 한창이다. 향기가 진동하는 장미공원을 한껏 걸으며 마냥 향기로운 여인이 되었다. 삼척항을 지나자 새천년 해안도로가 쫘아악 펼쳐진다. 오른쪽 동해의 햇살 받은 짙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하얀 파도와 기괴암석 바위들로 가도 가도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어둡지만 않았으면 마냥마냥 이어 걸었을 것이다. 삼척 솔비치 호텔이 근사하게 보이는 앞 정자에서 쉬고 있을 때, 마티즈 작은 하얀 차에서 상큼한 차림의 남녀가 내려 들어온다. 내 앞에 앉더니 셀카봉으로 연신 사진들을 찍으며 웃어댄다. 내게 사진을 부탁하는 이들은 신혼부부라고 한다. 신혼여행으로 그 흔한 해외를 가지 않고 작은 차로 동해안을 도는 젊은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내 카메라로 20여장을 찍어 주었다. 연락처를 주기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신혼부부 사진을 추려 정성껏 포토샵으로 편집해 보내주었다. 감사 인사와 함께 너무 멋진 좋은 분을 만나 행운이라는 답신이 왔다. 순수하고 기분 좋게 이런 일도 하는 내가 참 이쁘지 아니한가!
해안가에 즐비한 모텔들은 평일인데도 휴가철이라고 너무나 비싸다. 해안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가서 작은 모텔에 여장을 풀고 해안으로 나왔다. 해수욕장의 밤은 더없이 현란하다. 울긋불긋한 조명 속에 마구 흔들거린다. 폭죽이 터진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피서객들이 한도 끝도 없다. 혼자라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일미담’ 이라는 한정식 집에서 20가지가 넘게 한상 가득 차려진 2인 밥상을 받았다. 맥주와 함께 오랜만에 거하게 먹었다. 밤배 노래 바다노래 콧노래 부르며 밤바다를 지치도록 보고 걸었다. 삼척 솔비치호텔 산토리아 광장에 올라가니, 둥근 달님이 연못 위에 세워진 황금 기둥 사이로 들어와 황홀경을 더하고 있다. 파란 외계인 모습의 커다란 동상 앞에서 아이들이 마구 뛰어다닌다.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동해안의 여름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검봉산 자연휴양림 가는 들판길
*수로부인길 시작되는 곳에
*용화리 넘어가는 수로부인길 언덕
*'아찔한 목 고개'의 '아칠목재'에서
*용화리 장호초등학교
*파라솔이 있는 용화 해변
*문암해변 풍경
*마라톤 영웅 황영조 기념관에서
*도종환 시인의 황선수 찬양 시비
*황영조 기념관과 성장관
*검봉산 자연휴양림에서,
황영조 기념관 조각거울 앞에서
*황영조 사는 마을 찾아보기 망원경 풍경
*궁촌 레일바이크 타는 사람들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 3부자 릉
*덕산 해변의 저녁 풍경
*석양 속의 덕산 해변
*다음날 아침 비오는 덕산해변의 아침
*삼척 넓은 광장 엑스포타운
*삼척 관동팔경 죽서루에 흐르는 오십천 풍경
*관동팔경 죽서루
*삼척 삼장사
*삼척 삼산사
*삼척 성내동 성당
*축제 중인 삼척 장미공원
*삼척 새천년 해안도로 절경
*신혼여행으로 동해안을 도는 신랑신부
*삼척 솔비치호텔 보이는 해안 풍경
*2인 밥상 받은 일미담 한상 차림
*삼척 해수욕장의 야경
*삼척 솔비치호텔의 야경
첫댓글 저 많은 길 위의 이야기들
그리고 사진들 속에 들어가지
못한 내 소중한 것들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보고 또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