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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한문학 「편액서관유감(扁額書觀有感)」 성파(星波)의 편액 글을 본 감흥>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영남(嶺南)의 서예 대가이자, 현재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거제도 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 선생이 계셨다. 근대 서예사의 실질적 개창자로 이름을 남긴 분들의 실제 스승으로서, 1910년대 이후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비록 근대적 표현 방법이나 서법의 독자성을 뚜렷이 빛내지는 못하였으나, 전통 서체로서 한 시대를 대표하며, 근대 서예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저는 지난 2010년 경부터 거제시를 대표하는 서예대가 성파(星坡) 선생의 자취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이 생겨, 그의 거제문중 기록과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 그리고 병풍 글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성파의 편액(扁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글씨는 분명 한 시대를 풍미(風靡)할 만한 서예의 기맥(氣脈)이 담겨 있었다. 거제시의 자랑스러운 서예 대가임에 틀림 없었다. 그래서 성파(星波)의 편액 글을 보고 감흥에 겨워 「편액서관유감(扁額書觀有感)」이라는 짧은 글을 지었고 이번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현재 2025년, 성파(星坡)의 고향 거제도에는 그를 기념할 만한 공간이 없으나, 경남 진주시 내동면 <남가람박물관 진주명필전> '진주 명필' 코너에는 근대 추사체 1인자로 꼽는 성파 하동주의 글씨를 비롯해 제자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 우강(愚岡) 김병욱(金秉旭), 도연(陶然) 김정(金正 1906~1999),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1909~2001), 석천(石泉) 김우동(金雨東 1931~1980), 춘포(春圃) 우종완(禹鍾浣)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덧붙여 성파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와 함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등지를 비롯하여. 사찰의 현판과 주련에 남아있고, 고성 개천면 청광리 박부잣집(朴進士) 객실에는 그의 작품이 사방에 걸려있다. 시서유업(詩書遺業, 시와 글씨로 조상의 업으로 삼는다), 담박명지(澹泊明志,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 영정치원(寧靜致遠, 편안하고 정숙해야 원대함을 이룬다), 근급시보(勤給是寶, 근면하고 베풂이 곧 보배이다)의 글씨는 전성기에 썼던 가장 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거제시 사곡 삼거리에 성파 선생의 묵적비(墨蹟碑)를 묵적비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금을 받아 1989년 11월18일 건립 제막하였다. 비문은 이가원(李家源)선생이, 글씨는 김진희(金鎭禧), 조각은 박윤석(朴允奭)이 각각 담당하였다.
● 다음 ‘元’ 운목(韻目)의 칠언절구 「편액서관유감(扁額書觀有感)」은 거제시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의 2012년 평기식 한시다. 영남(嶺南)의 서예대가이며,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거제도 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 선생의 지난 자취를 살펴보던 중에, ‘성파(星波)의 편액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扁額書觀有感)’ 지은 작품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붓을 놀리매 추사체와 같고 붓놀림에는 정령이 담긴 듯, 온유돈후한 유가미의 기상을 담았다. 온 누각마다 성파의 글씨로 편액을 이루니 기묘한 재주와 서법이 고금에 나부낀다고 칭송하였다.
*「편액서관유감(扁額書觀有感)」*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筆蹤猶似秋史門 붓 자취가 마치 추사의 문체 같은데
筆意所到皆精魂 붓놀림이 가는 곳마다 정령이 담겼네.
散入樓閣作扁額 누각마다 흘러 들어가 편액을 이루니
奇才妙翰今古翻 기묘한 재주와 서법이 고금에 나부껴라.
●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선생이 1921년에 사망하자, 하동주 선생도 문상객들과 더불어 ‘元’ 운(韻)의 7언절구 평기식 *「만장(輓章)」* 한 편을 남겼다. 애도의 글에서, 1909년 장지연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일본을 큰고래로 비유했다. 당시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훌륭히 묘사했고, 끝내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안타까운 울분도 읽을 수 있다.
*「장지연(張志淵) 만장(輓章)」* /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
一夜長鯨徙窟宅 하룻밤 사이 큰고래가 소굴로 옮겨와
五江風雨不時昏 오강(五江)에 비바람 부니 시절이 암담하지 아니하랴.
可憐民地終難醒 가련한 백성의 국토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는데
葉葉新聞總淚痕 종이마다 새로운 소식 오니 언제나 눈물 흔적 뿐.
[주] 오강(五江) : 지난날, 서울 근처의 한강(漢江)·용산(龍山)·마포(麻浦)·현호(玄湖)·서강(西江) 등 주요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의 강마을을 이르던 말.
◉ [성파(星坡) 선생의 약력과 자취] 하동주(河東洲 1869~1943) 선생은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출신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다. 1869년 2월1일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 진양인(晋陽人) 하지호(河志灝 1827~188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지호(河志灝)는 진양(晋陽) 하씨로 자(字)는 성장(聖章), 호(號)는 송곡(松谷)이다. 성파(星坡)는, 경남 마산, 진주 등으로 나가서 명성을 떨쳤고 1943년 11월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 온 동양의 명필로, 거제도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이다. 43세 때인 1911년 거제군 거제공립보통학교(巨濟公立普通學校, 現거제초등학교) 임기2년 학무위원(學務委員) 명예직을 역임했다. 이 당시, 거제시 거제면 ‘반곡서원 동록당’과 학교건물 ‘거제 기성관’ 편액문을 썼다. 성파 선생은 1911년 1919년 1920년 모두 주소지가 現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437번지로 되어있다. 이후 60세가 지난 후부터 전라도 순천 해남 전주, 경남의 밀양 진주 마산 통영 양산 함양 합천 사천 고성은 물론, 부산∙서울까지, 전국적인 서예가로써 선생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또한 1919년 11월 18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내용에, “원래 하동주(河東洲) 선생은 통영군 거제면 하씨 성을 가진 분으로 호(號)가 성파(星坡)이다. 조선의 명필 前 참판 김정희(金正喜) 추사공(秋史公)의 제자인 하지호(河志灝)는 호(號)가 송곡공(松谷公)으로, 성파의 아버지이다. 성파는 1874년 6살부터 그의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의 전문으로 추사공 서법을 배워 우금 40여년에 손에 붓을 놓지 않아서 필정(筆精)이 귀신이 드러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성파(星坡)는 추사선생으로부터 직접 필법을 사사한,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 공이 돌아가신, 18세 때인 1886년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였고, 63세 때 영남루(嶺南樓) 편액을 쓰셨다 한다. 선생은 선고(先考)의 유훈을 소중히 가슴에 담아, “시와 글씨로써 선조의 업으로 삼는다[詩書遺業]”는 신념을 굳게 지키며,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다[澹泊明志]”는 정신으로 평생을 종이와 붓, 벼루와 함께 하셨다.
◉ 1930년대 신문기사에서, 진주 ‘원당 하성파 선생의 유서전람회 개최’, 조선중앙일보사 전주지국 후원으로 “제2의 완당이라 칭하는 성파 하동주 선생”의 전람회를 개최했다. 1932년 9월16일 ‘전남 순천(順天) 서화전람회(書畵展覽會)’, 1933년 7월4일 ‘전주 서예전람회개최(書道展覽會開催)’ 등, 대부분 경남과 호남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선생은 194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산(梁山)의 통도사, 고성(固城)의 옥천사, 부산(釜山)의 범어사, 통영(統營)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晋州)의 촉석루, 밀양(密陽)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懸板)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 거제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예술인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서예작품 및 평가] 선생은 추사체의 행서(行書)에 주력하여, 추사체 특유의 강직함을 잘 살려 신(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성파의 편액문은 그 글의 의미를 미리 가슴속에 그려놓고, 그 장소의 용도와 쓰임새에 맞게끔, 서법(書法)의 필세(筆勢)을 달리 표현한 점은 서예대가로서의 품격을 느끼게 해준다. 성파의 편액문 글씨체는 나이에 따라 혹은 그 장소의 역할에 따라 붓끝의 서선(書線)을 달리 표현하니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어우러지는 화해(和解)의 경지에 오른 작품은, 타고난 천품(天稟)과 배움을 갖추어야 이룰 수 있는데 성파의 글씨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성파의 글씨체는 인간이 겪은 수많은 속세의 어려움을 초월하여 안정된 원숙미가 가득 차 있다. 숙달(熟達)의 경지(境地)에서 원만(圓滿)한 노년의 능운지지(凌雲之志) 즉, 깨달음에 이르러 편안하고 넉넉하면서, 전체가 안정된 균형미를 이루니 선계(仙界)의 정신(精神)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 [추사체 전승]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의 선고(先考) 하지호(河志灝 1827~1886) 선생이 어린 시절,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으로부터 행서와 초서를 배웠고 이후 장성하여 장사랑(將仕郞) 9품 문관직 관리로 근무하다가 추사 서첩을 입수해, 아들 하동주에게 서(書)를 전수케 했다. 성파 선생은 해서체(楷書)에 정통하고, 행서와 초서를 배운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차에, 추사서첩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추사체를 익혔다. 선고(先考) 하지호 공이 돌아가신, 18세 때인 1886년, 유지를 받들어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하였고, 그의 나이 40세쯤 경남지역에서 최고의 추사체 명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0년대부터 전국적인 서예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현재 전하고 있는 성파 작품 대부분이 성파 나이 60대 혹은 70대의 것이라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이에 선생은 자랑스러운 거제예술인으로서, 근현대서예사의 개창자로 이름을 남긴 수많은 분들의 실질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또한 조선시대 거제도 유학자들의 문필(文筆)을 실질적으로 계승하여, 그 명맥을 이은 유일한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체에서 동록 정혼성과 추사체의 필체(筆體)를 한꺼번에 들어다 볼 수 있다.
○ [경남 고성군 옥천사] 옥천사에 가면 추사의 1대 제자 위당 신관호와 2대 제자 성파 하동주, 3대 제자 청남 그리고 도연과 은초의 유묵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나한전의 주련과 <백련암(白蓮菴)> 편액이 성파의 글이고, 일주문의 <연화산옥천사(蓮華山玉泉寺)>는 청남이, 성보박물관 편액 <보장각(寶藏閣)>은 은초가 썼다. 그리고 옥천사 입구 산문 석주 앞면의 <연화산옥천사(蓮華山玉泉寺)>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 그리고 안쪽 면의 <삼일수신천재보(三日修身天載寶)와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는 석각 글은 도연이 썼다. <자방루(滋芳樓)>와 자방루 마루에 걸려있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은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 1810~1888)가 썼으니 이들 모두가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맥(書脈)을 이어온, 큰 인연을 확신케 한다.
◉ [성파(星坡)의 서체(書體)] 서예 대가 성파(星坡)는 일생을 오로지 추사체 전수에 힘을 바쳐, 강직하면서도 기예(奇藝)가 감도는 서체를 터득했다는 평을 받는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종이와 붓, 벼루와 함께 하면서, 붓을 놀리매 침착(沈着)하고 웅건(雄建)한 정신으로 사셨던 분이었다. 그의 일필휘지(一筆揮之)한 붓끝에는 조수가 바뀌듯이 어떤 때는 국화꽃이 또 어떤 때는 매화꽃이 만발하였고, 거침없는 붓 봉오리가 때론 뾰족하고 때론 몽실한 젖가슴 같았다.
또한 그의 서체는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의 지적인 단아함이 스며들어, 섬 거제도의 웅장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대양을 향해 나래를 펴고 거침없이 떠다니는 자유로운 뭉게구름을 연상케 한다. 모나지도 않고 너무 곡선에 의존하지도 않는, 장중함이 고향 앞바다로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갑옷을 던져놓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황혼의 붉은 노을을 닮았다. 다도해의 섬들처럼 언제나 여백 속에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넉넉하고 포근한 선생의 글씨를 보며, 지난 선생의 서도(書道)의 삶을 회상해 본다. 이에 선생의 호(號) ‘성파(星坡)’ 즉, “언덕 위의 별”이라는 의미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서 샛별이 되어 밝게 빛날 것이다.
○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의 심미(審美)의식과 <영남루(嶺南樓)> 현판의 서예미
밀양시 영남루 남쪽(배면) 처마에 걸린 <嶺南樓)> 현판은 영남의 서예가이며, 현재 경상도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던, 거제도 출신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洲 1869~1943)의 글씨이다. 현판은 밀양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대숲이 있는 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성파 선생의 선고(先考) 송곡(松谷) 하지호(河志灝 1827~1886)는 당시 거제도의 학자이자 스승인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에게 한학과 성리론적 인간품성과 도리에 관한 사상과 철학적 가르침을 배웠고 이를 아들 성파(星坡)에게 전수하였고 성파는 이러한 폭넓은 철학적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옮겨 오고 예술세계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처럼 성파는 일제강점기 혼란한 정세에도 성실하게 지방의 변변한 서맥(書脈)을 이은 영남의 서예가로, 영남의 서파를 형성하고 서맥을 이어간 인물이다. 성파는 동록 선생의 학문적 깊은 온축에서 나오는 안목과 고결한 인품을 전수받아, ‘도는 자연의 법칙을 본받는다’라는 도법자연(道法自然), 자연이연(自然而然)의 심미의식으로 타고난 천품에 자연과 인간의 화해(和諧, 화목하게 어울림)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추사체의 행서는 털처럼 가는 획이 있는가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도 있고, 추하고 아름다움이 교차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서투른 듯한 고아함이라면 성파의 글씨체는 획이 두텁고 부드러우며 안정되고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원숙함이다.
성파가 63세에 썼다는 <嶺南樓)> 현판 글씨를 보면 필획과 필선이 강인한 듯 부드러운, 자신이 스스로 터득한 필의를 더하여 ‘고요하고 산뜻하며 평온한’ 평담(平澹)하고 안온(安穩)하게 다가오는 조형미가 돋보인다. 만년의 성파는 젊은 날 추사체를 익힐 때처럼 객기(客氣)나 호기(豪氣)를 부려 실험적인 작의(作意)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변해왔다’는 뜻으로, ‘절로 그러하여지다’라는 자연이연(自然而然)의 마음으로 부드럽고 침착하게, 정숙하고 평온하게 느껴진다. 성파의 <嶺南樓)> 편액 글씨를 보면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는 균형미가 돋보이며 인간과 자연, 자연이연(自然而然)의 어우러짐은 평담안온적(平澹安穩的) 화해미(和諧美, 화목하게 어울리는 아름다움)로 인식된다. 게다가 기교보다는 자연과 인간이 합일된 심미적 감수(感受)와 온유돈후(溫柔敦厚, 부드럽고 온화하며 성실한 인품)한 유가미(儒家美)의 기상을 담고 엄정단아(嚴整端雅)한 영남 서예의 기맥(氣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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