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2] 이명희(李名熙) - 부활의 체험을 맛보며 1. 요시찰의 신앙아동
1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싱가포르 함락의 기세를 몰아 소위 대동아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어 가는 듯하였으나, 그것이 얼마 가지 않아 일본 국내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전쟁 소식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희생 소식뿐이었으며, 전국의 빈터는 집 울타리 밑과 국민학교를 위시한 모든 학교의 운동장까지 개간하여 고구마와 아주까리를 심어 그것을 짠 기름으로 비행기의 연료를 공급하는 궁색을 떨고 있을 무렵이었다.
2 한 해가 저무는 일본에서의 12월 어느 날, 내가 어려서 일본의 조그마한 한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또다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뜻있게 보내기 위해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주일학교 모범 소년으로서 크리스마스 축하 연극 연습을 하고자 밤마다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3 그런데 하루는 교회에 나가는 도중에 담임선생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어디 가느냐고 물으셨다. 교회에 간다고 대답했더니, 다짜고짜로 뺨을 후려갈기는데 눈에서는 별이 번쩍하고 하늘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4 그 나이가 되도록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 담임선생은 비록 일본인 남자 선생이었으나 비교적 온순하고 공부도 괜찮게 하는 축에 속하는(그때의 한국인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반장이 못되고 일본 학생이 반장이 되고 겨우 부반장 감투가 고작이었다) 나에게 늘 호감을 베풀고 종족은 다르더라도 전혀 차별하는 듯한 기색은 없었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갑자기 뺨을 후려갈기고 때리는 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5 그 사건의 원인은, 당시 일본의 전쟁이 불리해지면서 미국인 크리스천 선교사들을 첩자 노릇을 한다고 본국으로 추방하고, 교회가 첩자의 소굴이라는 구실로 기독교 신앙을 탄압하고, 교회의 출석을 금지하고 있을 때였다.
6 어느 날 국민학교 아침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공공연하게 금지하는 훈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시나 학교의 명령에 개의치 아니하고 여전히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있었던 터였다.
7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이웃 어떤 학교에서는 일본 천황의 사진과 예수님의 사진을 바닥에 놓고 그중에 하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명령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까지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정말 아찔하게 느껴지며 악랄하고 비열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어떻든 나는 교회에 계속 나가는 바람에 혼쭐이 나게 됐고 그다음에 성적표를 받아보니 수신(修身, 지금의 도덕) 과목이 ‘가’였다. 그때까지는 언제나 ‘수’였었는데 수 다음 성적도 아닌 최하의 성적으로 낙하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건에 개의치 않고 교회에 나가는 모범 신앙의 요시찰(?) 학생이었다.
9 나는 할머님과 부모님의 신앙적 가르침과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의 가정은 일찍이 할머님 때부터 기독교 장로회 신앙을 받아들였고, 할머님께서는 장로교 권사님으로서 언제나 목사님, 전도부인되시는 분들과 심방을 하고 부인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는데 일생을 보내신 분이셨다.
10 아버님은 장로교 장로의 직분으로서 교회 일에는 고지식할 정도로 열심이었으며, 친척들, 친지들의 숱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신앙의 고집은 대단한 분이셨다. 이러한 신앙적 가정 환경에서 자란 나의 신앙생활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기독교적 신앙 그것은 나의 신앙의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11 해방 후 한국에 나와서 중학시절에 벌써 주일학교 반사를 맡았으며, 한국동란 시 시골 교회에서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주일 낮, 밤 어른 예배 설교도 한 바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신앙이 순박하고 열의가 대단했던 것 같다.
12 경북 성주군 초전면 문덕동에서 살던 나는 3km쯤 떨어진 교회에 주일 낮과 밤은 물론 수요일 밤까지 빠지지 않고 다녔다. 시골길 논두렁을 유일한 행로로 하고 있는 그 가깝지 않은 길을 눈이 오는 날이나 비 오는 밤-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험한 밤길에도 손전등도 없이 다닌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 신앙이 나를 신학교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