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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 이완용, 송병준을 중심으로 -
홍 윤표
목 차
서론
제1장 이완용과 송병준의 친일활동
제2장 일본어잡지에서의 이완용과 송병준 표상
제3장 문명인과 폭도, 교육과 억압
결론
서론
현재 한국에서의 이완용, 송병준의 평가는 ‘친일’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특히 이완용
은 1905년의 을사조약의 체결을 승인한 이른바 ‘을사오적’ 중 처음가는 대표적인 인물
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고, 송병준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한국의 권력가
이완용에 유일하게 대적할 만한 정치적 라이벌로서, 친일단체 일진회의 수장으로서 이
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완용에 관한 선행연구의 수는 그 유명도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완용을
단독으로 다룬, 연구서로 인정될 만한 단행본은 1999년에 출판된 윤덕한의 『이완용 평
전』정도가 유일하고, 석사논문 세 편, 국내학술지 논문 네 편정도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1). 송병준에 대한 연구는 더욱 빈약해서 송병준을 단독으로 다룬 연구서나 연구
* 본 논문은 2010년도 BK21 고려대학교 중일언어문화교육연구단 지원비에 의해 연구되었다.
1) 선행연구의 숫자는 이나미(2006:10), 한명근(2000:82), 박치문(1994:4)와 논문검색 사이트 http://www.
riss.kr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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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존재하지 않고, 송병준이 실질적인 리더였던 친일단체 ‘일진회’ 관련으로 박사논
문이 네 편, 국내학술지 논문 다섯 편정도가 존재한다.
이완용과 송병준의 ‘친일파’ 혹은 ‘기회주의자’의 이미지는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도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한명근은 「이완용은 한국근대 정치사의 질곡을 대변하는 인물이다」라고 평한 후에,
「일제 강점기, 이완용을 ‘智力이 非凡하고 識見이 卓越하며 일에 대한 추진력이 뛰어
난 인물’이며, 동시에 “宰相의 지위에 戀戀하여 오백년간의 社稷을 亡케 한 매국노”라
고 한 언급에서 그의 정치역정을 잘 살펴볼 수 있다」(한명근 2000:81)고 기술하고 있
다. 또한 이나미는 「이완용의 경우 본래 위정척사파로서 갑신정변을 강하게 비판하였
으나 시대에 따라 친러, 친미, 친일로 변신하면서 당시 가장 강한 세력에 편승하여 살아
남는 묘기를 보여준다」(이나미 2006:9)고 평가했는데, 이는 그의 기회주의자적인 면모
를 단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에서는 이완용의 친일과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긍정하면서
도 이완용이 한 때 위정척사 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에 힘을 쏟은 것을 보아 그가 나름대
로 시대적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완용의 친일 선택은 이완용 개인의 문제
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송병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데, 오히려 이완용보다도 더 못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윤덕한은 이완용과 송병준을 비교하여 「이완용이 명문가 출신의 정
통 양반 관료인데 비해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 출신으로 어릴 때 상경하여 당시 세도
가인 민영환의 식객 노릇을 하다 출세의 길을 잡은 일종의 떠돌이였다」(윤덕한
1999:277)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송병준과 이완용을 비교하여 「모
(송병준을 가리킴)는 기발한 재주가 많기는 하지만 다만 학식이 부족한 것이 한이다. 일
당(이완용 호)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바로 거기에 있다」(윤덕한 1999:277) 라고 이완
용을 더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송병준은 대체로 행동이 거칠고 공격적인데
비해 이완용은 이런 송병준과 직접 충돌하지 않으려고 슬슬 피하는 자세를 보였다」(윤
덕한 1999:277) 고 한다.
본 연구는 잡지 『조선』(朝鮮)을 중심으로 일본어 잡지에 나타난 한국의 친일 정치
인 표상, 특히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이완용과 송병준을 중심으로 고찰해 나가고자 한
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잡지 『조선』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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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로 매월 발간된 잡지 『조선』은 1908년 3월에 창간되어 1911년 12월까지 발
행되었다. 이후 1912년 1월호부터는 일본 제국의 대륙진출과 맞물려서 『조선과 만주』
(朝鮮及満州)로 바뀌어 1941년까지 발행되었다. 이 잡지의 성격을 말하자면, 재조(在朝)
일본인의 이익대변, 정보 교환, 친목, 본국 소식의 전달, 통감부의 통치정책 비판, 조선
인의 반일투쟁에 대한 강경론 전개 등을 그 특징으로 할 수 있다. (최혜주 2008:80-81)
『조선』의 지면을 살펴보면 시사평론, 논설, 주장, 잡찬(雜簒), 한성인물 평판기, 방
문록, 실업자료, 부원(富源), 연구, 문예, 지방통신, 시사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최
혜주 2008:83) 한편, 『조선』발행부수는 1909년도에 총 24000부였는데, 지역별로 살펴
보면, 발행지인 경성에서 7000부, 경성 이외의 조선지역에 8600부, 일본에 7200부, 대만
840부, 청나라 360부 등이었다.(木村健二 1989:156) 이를 보면 『조선』은 주로 조선과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 독자를 주 대상으로 했으며, 대만과 청나라에까지 일부 발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지역별 발행부수와 지면 구성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종합잡지 『조선의 실업』(朝鮮之実業)과 함께 『조선』은 일본인들의 조선 인식 형성
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고, 시사평론, 논설 등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
민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木
村健二 1989:152)
그렇다면 잡지 『조선』에 드러나 있는 한국 친일 정치인의 이미지는 어떠했을까.
잡지 『조선』은 제1권 1호 제일 앞에 위치해 있는 「시사평론」란에 「한국내각동
요에 대해 관찰」2)이라는 소제목하의 기사에 총리 이완용과 농상(農相) 송병준을 언급
하고 두 사람 사이의 역학관계를 간단히 설명하였다. 또한 같은 호의 「한성의 인물평
판기」라는 코너에서는 첫 순서로 「이완용의 전생애」3)를 게재하였다. 또한, 『조선』
제1권 제5호의 「한성 인물 평판기」에는 「일진회 수령 송병준」4)이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1910년의 한일병합 이전까지 『조선』에는 이외에도 많은 곳에서 이완용, 송병준
이 언급되고 있다. 그만큼 일본의 지식인들은 한일병합 이전까지 한국 내부의 정치 구
도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이완용과 송병준 두 인물에 주목하
2)『朝鮮』(1908.3)「韓国内閣動揺に就て観察」p.3
3)『朝鮮』(1908.3)「李完用の全生涯」p.31
4)『朝鮮』(1908.7)「一進會の首領宋秉畯」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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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조선』의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제까지의 선행연구를 보면 이완용과 송병준의 전생애에 걸친 친일 행적, 인물의 평
가는 일정 부분 이루어져 왔지만, 한일병합을 전후로 한 일본어 잡지의 자료를 정리, 고
찰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 연구는 일본인이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혹은 「내지」(內地)의 독자를 상
정하여 발표한 잡지 기사에 두 인물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일
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의 정치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한국인을 어떻게 분류하고 규정했는가, 또한 어떤 담론들을 이용해 왔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제1장 이완용과 송병준의 친일활동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완용, 송병준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데에는 여러 이유를 들
수가 있다. 먼저 ‘친일’, ‘매국’이라는 강력한 레테르가 붙여져 있기 때문에 연구 대상으
로서의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확고부동한 담
론이 기존에 형성되어 있으며, 이미 정답이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이완용, 송병
준을 대상으로 연구할 매력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식민지배의
아픔이라는 민족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다양한 연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완용, 송병준이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
반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고찰할 때에는 그 대상 인물이 남긴 문장을 분석함으로써 사상
과 철학 등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완용, 송병준은 자신의 사상, 민족의식, 대외
인식이라 할 만한 것을 문장으로 체계화시키지 않았다. 체계화된 이론이나 사상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행동은 순간순간 변화에 대처하는 ‘기회주의자’로 평가받는 이유가 되었
고, 자료의 부족은 이들에 대한 연구를 곤란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의 이완용, 송병준에 관한 연구는 주로 역사학자에 의해 이루어
져 왔으며, 객관적 사실로서의 그들의 「친일」 행위를 고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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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이제까지의 선행연구와는 달리, 일본인에 의해 재현된 친일 정치인 표상에
관한 연구이다. 특히 1908년 3월에 창간된 『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을 고
찰하기 위해서는, 한일병합 직전의 이완용, 송병준의 활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완용은 「묘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화려한 변신을 한 인물이다.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1882년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1882년부터 1886년까지
는 유교사상과 대외 배척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위정척사파로 활동하게 된다5). 이후 대
원군이 몰락한 후에, 미국인 교사가 있던 육영공원에서 수학하고, 최초의 주미공사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가게 된 1887년부터는 친미파로 전환하게 된다6). 이후 러시아가 조선
에 진출하게 되자, 1896년에는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기게 한 아관파천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7).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의 독립운동단체인 「독립협회」에서의 적극
적인 활동과 1905년의 을사조약을 계기로 중앙 정계에 재등장한 이후의 친일활동을 생
각해 보면 그야말로 카멜레온과 같은 눈부신 변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07년에 이완
용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 통치 아래 내각 총리대신으로 오르게 된다.
이완용이 항상 중앙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면, 송병준은 이완용을 끊임없이 견
제했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완용과 같은 해인 1858년 함경도 장진에
서 태어난 송병준은 1895년에 도일, 1904년까지 일본에서 생활했다8). 1904년 귀국한
이후 일진회를 조직하고 나서는 끊임없이 이완용을 견제했다. 윤덕한은 이완용과 송병
준이 몸담았던 일진회와의 관계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항상 가장 골치 아픈 존
5) 이완용의 위정척사파로서의 활동에 대한 연구 또한 미흡한 상태이다. 박치문은 이완용이 위정척사파로
활동한 이유를 이완용의 뛰어난 학습능력을 통한 유교적 교육 흡수, 전통적인 사대부 집안이라는 배경,
과거 합격 후 주요관직을 거친 점, 가문적 배경과 개인적 능력의 상승작용으로 당시 집권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점,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은 점 등에서 찾고 있다. 박치문(1994)『이완용의 대외
인식 변화와 친일논리 연구』(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사논문) pp.11-15 참조
6) 이완용의 친미・친러 활동에 관한 연구로는 김행선(1984)『친미・친로파로서의 이완용 연구(1858-190
4)』(고려대학교 역사교육전공 석사논문)가 있다.
7) 김행선은 『친미・친로파로서의 이완용 연구(1858-1904)』에서 아관파천의 의의를 부정적인 면과 긍정
적인 면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관파천의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자주독립이었지만, 사
실상 친일파 세력과의 권력투쟁이었다는 점과 아관파천은 결국 조선의 이권을 러시아에게 양도하는 반
민족적인 행위였다는 점을 들었다. 긍정적인 의미로는 아관파천 이후 철도, 전차시설, 광산 채굴 등을
서구의 여러 나라와 공동으로 개발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을 들었다. 즉 조선의 문명개화라는 뚜렷한 목
적을 가진 행위였다는 평가이다. 김행선(1984)『친미・친로파로서의 이완용 연구(1858-1904)』(고려대학
교 역사교육전공 석사논문) pp.19-39 참조.
8) 송병준의 친일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 Ⅳ-8』(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pp.752-782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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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 일진회였다. 내각이나 일진회 모두 일제의 주구이기는 마찬가지다.(중략) 그런데도
이 둘은 서로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대개 일진회가 공격적이라면 이완용은 수세
에 있었다」9)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서로 견제하는 사이지만, 이완용과 송병준
이 공생관계인 시기가 잠깐이지만 존재했다. 이완용이 내각 총리대신일 때 송병준은
1907년 농상공부대신에 오르고, 1908년 6월에는 내부대신 자리에 오르게 된다.
『조선』 1908년 3월 제1권 1호에는 이와 같은 이완용과 송병준의 관계의 대략을 다
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농상공부 대신 송씨는 외부에 일진회의 성원이 있어 그 세력이 크므로, 작년 겨울에 이르
러서는 총리와 스스로 알력・암투 상태를 드러내었고(중략) 특히 동경에서의 송씨의 언행이
매우 불손하여서 문책설이 각 방면에서 일어났을 때 이총리는 단호하게 내각의 부조화를 경
계하고 애써 현상유지 방책을 파지(把持)하고 극력 부하를 단속하여 송 농상과 감정을 따뜻
하게 했다10)
위의 인용을 보면, 선행연구에서 파악하고 있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관계와 거의 일치
함을 알 수 있다. 공격적 성향과 무례하고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송병준11)에 비해, 이
완용은 수세적이지만, 침착한 성품에 넓은 포용력으로 결국은 자신의 권력 안에 정치적
라이벌을 포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만 같은 기사에서 이완용 내각의 약점을 지
적하여, 「총리 이완용씨가 그 형 궁상 이윤용씨와 힘을 합해 궁중에 다수의 친척과 친
구를 배치하여 사문의 권세를 확장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 지극히 힘을 얻고 있다」12)
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위 기사에서는 당시 한국 내각의 정치적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
9) 윤덕한, 위의 책, p.275
10)「農相宋氏は外に於て一進會の声援ありて其勢力偉大なるより咋冬に至りて総理との間に自ら軋轢暗闘
の状態を呈したりし(中略)特に東京に於ける宋氏の言行は頗る不遜にして問責の説各方面に起りたる
に際して李総理は堅く内閣の不調和を警戒し力めて現状維持の方策を把持し極力部下を警束して宋農相
との感情を温めたるものの如し」『朝鮮』(1908.3)「時事評論-国内閣動揺に就て観察」p.3
11)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1909년 1월 순종이 전국 순행을 할
때 송병준이 함께 수행을 했는데, 평양으로 가는 도중 순종이 탄 열차 안에서 술에 취해 시종무관 어담
과 시비를 벌이다 칼을 빼어드는 망동을 부렸다. 그래서 황제 지척에서 칼을 빼든 불경스런 행동을 했
다 하여 결국 내부대신에서 면직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화에서 송병준의 성급한 성격을 볼 수 있다.
윤덕한, 위의 책, pp.271-279 참조
12)「蓋し現内閣の弱点は総理李完用氏が其兄李允用氏と共力して宮中府中に多数の親戚故舊を配置して私
門の権勢を拡張するに対する非難は其尤も有力なる非難なるべし」『朝鮮』(1980.3)「時事評論-国内閣
動揺に就て観察」p.3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17
목된다. 또, 이 기사의 마지막에 「한성정계에서 오히려 이총리의 기도는 그다지 무게가
없었고, 수차례 일어난 정변에 의해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내각이 동요 상
태임을 관찰하여 이것으로 보호정부에도 동요의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내각
의 동요는 도쿄 정부와 기회를 함께 해야 한다는 상상을 기초로 하여 책사의 유언 획책
이 나왔고 그래서 현 내각의 동요가 생겨난 것이라고 관측된다」13)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의 보호국가였던 한국의 정치가 일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이고,
한국의 정치인들이 일본의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 암투를 벌이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
다.
제2장 일본어잡지에서의 이완용과 송병준 표상
또한 『조선』1908년 3월, 제1권 1호의 「이완용의 전생애」라는 기사에서는 이완용
이 아관파천 때 친러파 활동을 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아관파천 이후 재야에서 인내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친일파로 돌아서 다시 실권을 잡은 이야기, 이완용의 부와 권세
에 대한 일화, 이완용의 친족이 정부의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완용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독자는 이총리가 의기소침하여 얼굴색 쇠약하고 패기도 광채도 없이 침묵하는 여느 한국
인 같은 그가 통감 저택을 출입하는 것을 보고 그가 총리의 큰 임무를 맡을 수 있을지 의심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백 만장하고 좌중에 서서 천하의 인기와 시선을 끄는 송병준의
상석에서 이 쇠약한 한 신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눈동자를 보라. 냉혹하고 기백장대함이 나타나 있고, 그의 풍채는 돋보이진 않지만, 지
모가 많고 권략에 능하며(중략), 지금은 대적인 송병준조차 스스로의 손아귀에 넣고, 그는 형
식에 있어서는 굴복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국 최고의 정권과 실력을 보이고 있다. 무서운 인
물이 될 것인가14)
13)「漢城政界は寧ろ李総理の企図には余り重からず数次起れる政変によりて失意の地位にあるものは早く
も日本内閣動揺の状態あるを察して之が為めに保護政府にも動揺の時期来るべしと為し韓内閣動揺は東
京政府と機会を一にすべしとの想像を基礎として策士の流言画策となりて茲に現内閣動揺を産出したる
ものと観測せらる」『朝鮮』(1908.3)「時事評論-国内閣動揺に就て観察」pp.3-4
14)「読者は李総理が意気悄然として顔色衰へ覇気無く光彩無き沈黙せる一韓人の如く、統監邸を出入せる
を見て、彼が総理の大任を負へるを疑ふことあるべし、気魄万丈座衆の間に立ちて天下の人気と視線を
惹く宋秉畯の上席に於て斯る痩衰せる一紳士が何事をか為すと想ふ人もあるべし、然れども彼の眼孔を
見よ、冷刻にして気魄壮大を示しており、彼の風采は揚らざるも其智謀に富み権略に長じ、(中略)今
や其大敵たる宋秉畯すらも自ら彼掌中に帰しぬ、彼は形式に於て降参するも事実に於て韓国一の政権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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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에서 송병준은 화려하고 인기가 있어 보이는 반면에 이완용의 겉모습은 작
고 볼품없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이완용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무서운 인물이 될 것」이
라는 마지막 기술에서 다소간의 경계심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이완용이 일본의 의도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표현한 부분이라고 추측된다. 같은 기사에서
「그는 박제순 내각에서 가장 충실 온후한 일본당이 되고, 맹종하는 일본당수가 되었
다」15)고 했으나, 이완용의 변신이 아직은 신뢰할 수 없는 듯 하다. 이완용이 아관파천
이후 오랜 재야생활을 그만두고 친일파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일본공사조차도 10년 전
의 로국당(露國黨)을 신내각에서 본다는 것. 실로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다」16)고 지
적한 것처럼 어떤 계략을 품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의구심이 드러난 부분이라 생각된
다.
한편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발행되었던 종합잡지 『일본과 일본인』(日本及日本人)
1908년 4월 1일호에도 이완용과 송병준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도 「그가
영국파이기도 하였고 러시아파이기도 하였던 이유로 지금 일본파인 것을 의심하는 사람
이 적지 않다」17)고 밝히고 있다. 즉, 일본 국내에서 발행된 대표적인 잡지에서도 이완
용과 송병준을 중점적으로 다룬 기사가 실렸다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이 이 두사람에 크
게 주목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1908년 5월 제1권 3호에는 「방문록」이라는 코너에 「총리대신 이완용씨에
게 묻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방문록」은 매월 기자가 유명인사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문록」은 제1권 3호에 처음으로 기사가 마련되었는
데, 첫 주인공이 바로 이완용이다. 이후 「방문록」에는 사회저명학자, 경제계 인사, 군
인, 정치인 등 주로 일본인의 인터뷰가 다루어졌고, 한국인으로는 김윤식이 『조선』 제
2권 2호에 실린 정도이다. 『조선』이 일본인 독자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주
요목표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앞에서도 언급하였는데, 이를 보아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의
実力を示したり、怖るべき人物なるかな」『朝鮮』(1908.3)「李完用の全生涯」p.33
15)「彼は朴内閣に於ては尤も忠実温厚なる日本党となり、盲従せる日本党首となり」『朝鮮』(1908.3)「李
完用の全生涯」p.33
16)「日本公使すらも十年前の露国党を新内閣に見ること実に意外たらざる得ざりき」『朝鮮』(1908.3)「李
完用の全生涯」p.32
17)「彼が英語派たり露国派たりしの故を以て、彼の今、日本派たるを疑ふ者尠からざるに似たり」『日本
及日本人』(1908.4.1)「韓国の政治家(李完用と宋秉畯)」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19
동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당시 한국의 권력을 쥐고 있던 총리대신 이
완용이었음이 여기에도 드러난다.
이 기사는 이완용의 검소한 생활과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연한 조선가옥에서 개축중인 가설 응접실로서 시골 군수의 응접실보다도 더 조악하게
느껴졌다.(중략)
아무런 장식 없는 어두침침한 실내에, 안색 창백한, 체구가 크지 않은 평범하고 아무런 특
색 없는 한 인물이 조선 백의를 입고 관을 벗은 모습은, 영락없는 산사(山寺)의 산승(山僧)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사람이 이 시대의 한국 재상 이완용씨인가 하고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중략)
그는 은근히 악수를 하고 그의 태도는 매우 평민적이었으며 한국인의 특색이라 할 수 있
는 거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악풍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18)
위 기사에서 이완용은 전통 한옥에 살았고, 조선의 흰 옷을 입었으며, 시골 군수보다
도 못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제일의 권세를 지니고 있지만
평민적이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권개입과 부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진 이완용 일가의 일반적인 이미지를 부정하는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사에서 이토 통감은 시와 술, 그리고 미인을 좋아하고, 소네(曾禰) 부통
감은 시와 술, 꽃꽂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당신의 즐거움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자,
이완용은 「나 또한 시를 사랑하고 책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외에도 따로 마음속으로부
터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다」고 대답한 후에 「나에게 손자 하나가 있어 올해 세
살이다. 내가 관청에서 돌아오면 손자가 먼저 기뻐하면서 나를 맞이하고 장난치면서 주
위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손자의 친구가 되어 장난치며 노는 것이 제일의 즐거움
이다」19)고 대답했다고 한다.
18)「純然たる朝鮮家屋にして改築中の仮応接室のこととて田舎の郡守の応接室よりも猶ほ粗末の様に思は
れたり(中略)何等の装飾無き陰暗なる室内に顔色蒼白にして体幹偉ならざる平々凡々何等の異彩無き
一個の人物朝鮮白衣を着て冠を脱ける所宛然山寺に山僧を訪ひし慮あり此人が時の韓国宰相李完用君た
りとは吾人の意外とする所なり、(中略)彼は慇懃に握手せり、彼の態度は頗る平民的なり韓人の特色
とも云ふべき、倨傲尊大自ら豪しとする悪風は彼に於ては見るを得ざりき」『朝鮮』(1908.5)「訪問録-
総理大臣 李完用氏を問ふ」p.60
19)「余亦詩を愛し書も楽む、而も是れ以外別に心から余を楽ましむるものあり」「余に一人の孫あり、今
年三歳、余が役所より帰り来らば彼れ先づ嬉々として余を迎え身辺に戯れて左右を離れず、余は只彼の
友となりて戯れ遊ぶを何よりの楽みとなす」『朝鮮』(1908.5)「訪問録-総理大臣李完用氏を問ふ」
520 日本文化研究․第35輯(2010)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민중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이완용의 집이 불타고,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라는 군중의
함성에 쫓겨 일본 순사들의 보호를 받기에 이르렀다20). 이렇게 민중의 증오를 받고 있
던 이완용이지만, 위 기사에서 인터뷰를 한 이완용은 한옥에 살고 흰 옷을 입으며 전통
을 지키는 검소한 모습과, 손자를 사랑하는 한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일본어 잡지가 그려낸 이완용의 모습은 한국인의 일반적인 민중의식과는
괴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제1권 5호의 「한성인물평판기」에는 「일진회 수령 송병준」을 다루
고 있는데, 여기에서 송병준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이 기사에서는 송병준이 1904년 러일전쟁 때 병참감(육군소장) 오타니 기쿠조(大谷喜
久蔵)의 통역으로 귀국한 것과 1905년 4월에 열린 일진회 연설회에서 변사로 나서
「일약 수만 명의 인기와 숭배를 한 몸에 모았다」21)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후 그
는 궁정과 권력을 가진 신하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일진회가 유력해짐에 따라 세력을
얻어가고, 일본제국의 유일한 맹우가 되면서 그는 점차 그 세력을 더해」22)갔는데, 이
제 「일진회는 가장 유순한 제국의 복종자가 되고, 이토 통감을 칭송하는 자가 되었
다」23)고 서술되어 있다. 송병준은 일개 일본어 통역자에서 불과 3년만에 내각의 대신
이 될 정도로 빠르게 출세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정치가가 얼마 되지 않는 시일에 한 나라의 정무를 잡을 정도의 공적
을 쌓고, 성대한 이름을 얻은 것을 보니, 그가 일종의 곡마사와 같이 정권술의 기예가 뛰어난
점에 다소나마 존경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24)
pp.60-61
20) 윤덕한, 위의 책, p.260 참조. 또, 윤덕한은 당시 민중들의 이완용에 대한 증오의 결과로 이완용이 며느
리와 사통했다는 망측한 소문이 퍼졌다고 해석하고 있다. pp.279-287 참조.
21)「一躍して幾万人の人気と崇拝を一身に集めたり」(『朝鮮』(1908.7)菊池長風「漢城人物評判記-一進
會の首領宋秉畯」p.66)
22)「一進會なる団聚が次第に有力となり、勢力となり、日本帝国の唯一なる朋友となりたるに従い、彼は
暫く其勢力を加へ、」(『朝鮮』(1908.7)菊池長風「漢城人物評判記-一進會の首領宋秉畯」p.66)
23)「一進會は尤も柔順なる帝国の服従者となり、伊藤公の謳歌者となり、」(『朝鮮』(1908.7)菊池長風
「漢城人物評判記-一進會の首領宋秉畯」p.66)
24)「吾人は斯る政事家が僅少なる時日の間に於て、一国の政務を握る程の功蹟を乗れ、盛名を得たるを見
て、彼は一種の曲馬師の如く政権術の技芸に長じたるものとして多少の尊敬を表せざるを得ず」(『朝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21
이와 같은 평가는 이완용에 대한 평가보다는 후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짧은 시간에
높은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송병준
이 친일이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도 있지만, 당시 메이지 시대를 휩쓸고
있던 입신출세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개인의 성공을 위한 노력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메이지 시대의 도덕이라 한
다면25), 일본 입장에서는 송병준의 출세담이 내지와 식민지를 아우르는 가장 적합한 예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송병준의 인품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는 점을 언급했
지만, 비슷한 시기의 『만한의 실업』(満韓之実業) 1908년 10월호에는 송병준을 크게
평가한 기사가 보여 주목된다. 「한국 하등 민정」(韓国下等の民情)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 한 토막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족의 단란과 화락을 도모하고, 부인과 자녀를 위로하시지요」라는 충언에, 「우리들
일본 쪽에 있는 사람은 아침, 저녁을 가늠할 수 없다. 종일 부지런히 일한 다음 자고, 다음날
아침 자기 몸의 무사함을 보고 또 하루 무사히 지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자기
신변의 위협을 각오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일신의 지성, 지극한 충심, 국가를 염려하는 국
사의 풍모가 보이지 않는가. 약소국의 대신만큼 동정할 만한 것은 없다.26)
위의 인용은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송병준을 묘사한 글이다. 송병준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완용과 경쟁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려고 힘썼던 인물이었지만, 위의 기사
에서는 송병준을 마치 가족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우국충정의 인물
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애국」이라는 의미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기인하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본과 합병하여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이 「애국」이었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에 가능한 평가였다고 판단된다.
이상과 같이 일본어 잡지에서 나타난 이완용과 송병준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일본 지
鮮』(1908.7)菊池長風「漢城人物評判記-一進會の首領宋秉畯」p.66)
25) 메이지 시대의 입신출세 풍조에 관해서는 오구마 에이지(2007)『일본이라는 나라』(책과 함께) pp.11-
20를 참조.
26)「宋内部大臣が、一家団欒の和楽を作つて、妻子を慰藉せよとの忠言に対して、我々日本側のものは其
朝夕を秤るべからず、終日営々として就寝、翌朝我身の無事なるを見て亦一日の安を得たりと云ふ聞く
に於ては、如何に其身辺の危殆を覚悟し居るのみならず、其一身の至誠だか、至忠だか、国家を念とす
る国士の風を想見し得るではないか、弱国の臣民程同情すべきものはない」『満韓之実業』(1908.10)
「韓国下等の民情」p.34
522 日本文化研究․第35輯(2010)
식인들의 친일파 정치인에 대한 기대감, 입신출세를 도덕적으로 선(善)한 것이라고 판
단했던 메이지 시대의 사조(思潮), 정치적 역학관계를 배제하고 개인 인물에 초점을 맞
춤으로써 호감도를 높이려는 목적 등이 맞물려서 나타난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제3장 문명인과 폭도, 교육과 억압
그러나, 당시 일본어 잡지에서 이완용과 송병준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만은
아니다. 1908년 5월, 『조선』 제1권 3호의 「시사평론」에서는 조선의 「폭도」(의병)
를 거론하면서 이완용 내각이 폭도 진압에 미온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
로하고 있다.
폭도 진압은 단지 일본인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요구
이다. 하지만 현 내각은 아직도 이에 대해 어떠한 묘안도 없이 쓸데없이 사건이 되어가는 대
로 맡긴 채 단지 하루라도 길게 내각의 수명을 유지하는 데에 급급하다.27)
앞에서 살펴본 기사에서는 이완용의 성품을 극찬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의 같은 잡지
에 실린 위의 기사에서는 이완용 내각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온화하
고 아량이 넓은 사람처럼 묘사했던 앞에 인용한 기사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자신의 정
치적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 기사 마지막에는
「우리는 현 내각의 전도를 매우 비관하고 있다」28)라고 불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완용 내각이 정말로 의병토벌에 미온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완용
은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에 반대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봉기한 의병 부대를 토벌할 것을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요청하였고, 1907년 이완
용이 총리대신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체포한 의병장들을 중죄로 처벌하고 아직 체포하
지 못한 의병부대 지휘관들을 체포할 것을 순종 황제에게 상주하기도 했다.29) 또한 송
27)「暴徒鎮圧は啻に本邦人民の要求なるのみならず韓民の尤も切望せる要求なり然れども現内閣は未だ之
に対して何等の成案妙計無く徒らに其成行に任かせ只だ一日も長く内閣の寿命を保つに汲々たり」『朝
鮮』(1908.5)「時事評論-韓国の現内閣」p.4
28)「吾人は現内閣の前途に甚だ悲観せんとす」『朝鮮』(1908.5)「時事評論-韓国の現内閣」p.5
29) 이완용의 의병 진압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
고서Ⅳ-13』pp.541-543, pp.574-575를 참조.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23
병준이 이끄는 일진회는 의병 토벌을 위해 자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의 폭도 진압이 미온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특정한 의
도를 가지고 현실을 오도하는 행위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에 인용하는 기사에
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제1권 제3호의 「일한합병의 이유」라는 논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국인은 입버릇으로 사직의 존망을 말하지만 국민의 존망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안
중에는 사회는 있지만 국가는 없다. 인민은 있지만 국민은 없다. 시대는 있지만 국토는 없다.
따라서 작금의 보호국에 대해 그들은 일본 배척 사상과 이해를 배우면서도 사실은 일진회나
이완용 내각이나 태황제의 은퇴에 불평을 말할 뿐이다. 그들이 말하길 우리들은 지금 네 개
의 정부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덕수궁, 둘째는 창덕궁, 셋째는 통감부, 넷째는 이완용
내각이라고. 국가 및 국민을 보지 않는 한국인의 안중에는 보호국이 속국이 되는지 독립국이
되는지 혹은 한인의 주머니에서 이중의 정부 상납금을 내게 될 것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을 병합하여 일대 제국의 아래에 통치하면 그들은 처음으로 정부의
존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병은 역사적으로 자연적인 상태이다.30)
위의 인용은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기사인데, 이완용 내각을 오히려 일본 통
감부와 대립하는 세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의 기사는 전체적으로 근대서양문명의 산
물인 「국민국가」를 한국인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황실이
나 이완용 내각은 「국민국가」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위의 기사와 같은 호에는 「한국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라는 기사가 실려 있고,
다음 달에 발간된 제1권 4호에는 한국인의 교육에 관한 기사가 10건에 이른다. 이 시기
의 화두는 한국인의 교육 문제이고, 「폭도」에 대한 진압과 한국 국민의 교화라는 언
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입장이 동시에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폭도」에
30)「韓人は口癖に社稷の存亡を説くなれども国民の存亡は了解せざるなり彼等の眼中に於ては社会あれど
も国家無く、人民あれども国民なし、時代あれども国土なし、故に現今の保護国に対して彼等は日本排
斥の思想と利害を教られつつあるも其実は一進會や李完用内閣や乃至太皇帝の退隠に不平を唱ふるの
み、彼等曰く吾人は今ま四個の政府を奉戴すと其一は德壽宮なり、其二は昌德宮なり、其三は統監府な
り、其四は李完用内閣なりと、国家及国民を見ざる韓人の眼中に於ては保護国が属邦なる乎、独立国な
るか、若しくは保護国とは韓人の財嚢より二重の政府上納金を為すの謂なるが、未だ了解せざるなり。
寧ろ今ま韓国を合併して一大帝国の下に統治せば彼等は初めて政府の存在を了解するに至るべし。故に
曰く日韓合併は歴史的にして自然的状態也。」『朝鮮』(1908.5)「日韓合併の理由」p.6
524 日本文化研究․第35輯(2010)
대한 진압책임을 이완용 내각에 돌림으로써 한국인을 대화가 통하는 문명인과 진압의
대상인 「폭도」로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들을 위정자, 선량한 국민, 폭도 등으로 자의적으로 나누어, 의도
하는 바에 따라 친일 정치인들을 협력자로 삼거나, 혹은 선량한 국민과 대립하는 집단
으로 그려내는 다양한 담론이 『조선』에는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1909년 3월, 제3권 제1호의 「시사평론」에는 「송병준의 일본행」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송병준이 실각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송병준이라는 남자는 한일 신관계에 대해서 이토 통감의 입안을 잘 명심하고 조선의 중심
점이 되어 일한 인물로서 이토 통감의 통감정치는 그에 의해 잘못되어진 부분도 적지 않지
만, 또 그에 의해 성공한 것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는 여보대신 중, 가장 사리에 통하고, 게다가 가장 일본화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인망 없기가 더 이상 없을 정도일 뿐만 아니라, 재한 일본인 사이에
서도 그는 왠지 열등시되어, 그를 굳이 나쁘다고 하는 자도 없지만, 또 그를 중시하는 자도
없는데, 어느 쪽이냐 하면 인망이 없는 편이다. 이는 필경 그의 정치적 행위보다는 그의 인격
의 열등함에 기인하는 것이다.31)
송병준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실각되었다고는 하지만32), 이전의 송병준의 평가와는
달리 인격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한국인 중에서는 가장 일본화된(문명화
된) 인물이지만, 그런 송병준에게 「여보대신」33)이라는 차별어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
로 그 가치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같은 호의 「송병준의 사직과 박제순의 취직」이라는 기사에서도 「한인 모두에게
평판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하는 송병준 내부대
신이 사직을 했다」34)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같은 기사에는 내부대신의 교체가 「이완
31)「宋秉畯と云ふ男は日韓新関係に対しては善く伊藤公の立案を服膺して朝鮮側の中心点となりて働きた
る人物にして伊藤公の統監政治は彼れに依りて誤まられたる所も尠からざるも亦彼に依りて成功したる
ことも決して尠からず、此点に対しては何人も非認する能はざる所なり、又彼はヨボ大臣中、最も事理
に通じ、且つ最も日本趣味化したる人物なり、然るに彼は独朝鮮人間に於て不人望此上無きのみなら
ず、在韓日本人間に於ても、彼れは何と無く劣等視されて、彼を敢て悪むものも無きが、又彼を重ずる
ものも無く、何れかと言はば不人望の方なり、是れ畢竟彼の政治的行動よりは彼の人格の劣等なるに職
由するものなり」『朝鮮』(1909.3)「宋秉畯の日本行」p.7
32) 주 18) 참조.
33)「여보」(ヨボ)는 당시에 한국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주로 멸시하는 의미로 쓰였다. 여보 자동차, 여보
관리, 여보 집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満韓之実業』(1910.5)「韓国の民情」pp. 53-54 참조.
34)「韓人の凡てに不評判なるのみならず、日本人にも余り好愛されざる宋秉畯内部大臣の椅子を去り」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25
용 내각의 나쁜 평판을 잠재울 수 있을까」35)라는 문장도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창간 초기에는 이완용, 송병준으로 대표되는 친일 정치인들은
검소하고 온화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등의 모습이 그려지고, 존경과 감탄의 대상으로 표
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한일병합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점차 한국의 친일 정치인들의
무능함과 인덕이 없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즉, 이는 친일 정치인들을 통한 통감부 통치
가 아닌 일본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끌어내는 논리로 사용되었
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이제까지 이완용, 송병준을 중심으로 잡지 『조선』을 중심으로 일본어 잡지에 나타
난 친일 정치인 표상을 살펴보았는데, 어느 한쪽 방향의 이미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일본 지식인들의 주장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비롯한 일본어 잡지의 기사는 입신출세와 제국주의라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 상을 그려내면서, 한편으로는 한국국민들과 친일 정치인들을 분리해 내는
담론도 형성해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일본어 잡지에서 이완용, 송병준은 일
본 제국의 충실한 협력자이기도 했지만, 때때로 한국 국민들을 해방시킨다는 논리를 펼
칠 때에는 일본제국에 방해되는 위정자로 표상되기도 했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당시의 일본어 잡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이완용과 송병준
과 같은 친일 정치인을 묘사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국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만
들어내고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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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1908.5)「時事評論-韓国の現内閣」
『朝鮮』(1908.5)「訪問録-総理大臣 李完用氏を問ふ」
『朝鮮』(1908.3)「李完用の全生涯」
『朝鮮』(1908.3)「韓国内閣動揺に就て観察」
잡지『조선』에 나타난 친일 정치인의 표상 527
■ 논문초록
키워드
植民地主義、帝国主義、韓国併合、文明、義兵
colonialism, imperialism, Korea-Japan Annexation, civilization, Righteous Army
雑誌『朝鮮』における親日政治家の表象
─ 李完用と宋秉畯を中心に ─
洪 潤杓
現在、韓国において、李完用と宋秉畯は、「親日」で悪名高い。特に李完用は1905年の第二次
日韓協約の時、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た人物として、現在まで、いわゆる「乙巳五敵」と呼ばれ
ている一人である。このように、悪いイメージで有名なこの二人についての研究はあまり行われて
いない。そして、今までの先行研究は、歴史学者によるもので、客観的な事実として、彼らの「親
日」行為に焦点が当てられている。
本研究は、雑誌『朝鮮』を中心に、日本語雑誌に現れている、韓国の親日政治家の表象を考察
するものである。そして、在朝日本人を対象とした雑誌に、李完用と宋秉畯がどのように描かれて
いるのかを考察することによって、当時日本の知識人が韓国の政治状況をどのように認識していた
のかを明らかにした。さらに、本研究は、日本の知識人が韓国に対する植民地支配を正当化し、
露骨に表現する際、韓国人をいかに分類し、規定したのか、また、日本の知識人の間にはどのよう
なディスクールが形成されていたのかを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
『朝鮮』をはじめ、当時の日本語雑誌は、立身出世と帝国主義という、日本の知識人の目的に
符合する親日政治家のイメージを描きつつ、一方では、韓国の国民と、親日政治家を分離するイ
メージも形成しつつあったのである。言い換えれば、李完用と宋秉畯は、日本帝国の協力者であり
ながら、韓国の国民を抑圧する為政者でもあったのである。
필자
인적
사항
성명(한글): 홍 윤표 (한자): 洪 潤杓 (영문): Hong, Yun Pyo
영문제목: Representation of the Pro-Japanese in Chosun
소속: 고려대학교 BK21 중일언어문화교육연구단 연구교수
주소: 인천 서구 연희동 741-25
전화: 010-5315-9806
E-mail: neoxzen@hanmail.net
논문
작성
일시
투고마감일 : 2010.6.4 심사일 : 2010.6.18 심사완료일 : 20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