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C. Cardinale, 1938~ )
'C.C'라 불리는 섹스심볼 -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Claudia Cardinale)'
'이탈리아' 여성 특유의 다부지고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한때 '브리지트
바르도'(B.B), '마릴린 먼로'(M.M)와 더불어 'C.C'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리며,
1960~70년대 최고의 스타가 되었죠. 하지만 '바르도'나 '먼로'가 자신들의
성적(性的)인 외모를 앞세워 스크린을 누비며 세상 남성들로부터 지대한 사랑을
받은 대신, 그녀는 관능적인 매력을 다소 배제한 체, 오직 연기력만으로 '이탈리아'
영화계를 선두 지휘했습니다.
'이탈리아 여배우'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지방 미인대회를 통해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실리' 출신의 이민자의 딸로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어는 물론 불어와 아랍어를 습득, 훗날 국제무대에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고, 튀니지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주최한 미인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그 부상(副賞)으로 이탈리아에서 개최한 베니스영화제에
참석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베니스에서 그녀는 우아하고 청순한 매력을 뽐내며, 유럽 각국의 영화 관계자
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1958년 튀니지와 프랑스 합작 영화인 <Goha>로
데뷔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연기가 서툴기만 한 그녀는 배우로서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자각(自覺), 그녀는 곧바로 1930년대 중반 '뭇솔리니'
정권시절 창립한 영화 학교에 들어가 두 달간 연기수업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완벽한 몸매라면 굳이 연기수업을 따로 받을 필요가 있겠나"
며 조롱아닌 조롱을 퍼부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그 무렵 우후죽순 처럼 쏟아져
나온 '글래머 여배우'들과는 생각이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그리고, 1958년 겨울 그녀는 로마에 위치한 '비데스 스튜디오사'와 7년간 정식
계약을 체결한 직후, '마리오 모니첼리' 감독이 연출한 <Big Deal On Madonna
Street>의 국제적인 성공으로인해 자신의 명성 또한 함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같은 성공 가능성을 알아본 이는 다름아닌 '비데스 스튜디오'의 수장인
제작자 '프랑코 크리스탈디'였으며, 그는 그녀와 1966년 결혼하여 1975년까지
10년동안 부부로 지냈습니다.
1960년대 그녀는 '이탈리아'를 벗어나 '유럽 영화'에까지 자신의 경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 시발점은 이탈리아의 명장, '루치노 비스콘티'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60년>과 역시 '비스콘티'가 연출하고 '알랭 들롱'과의
두번째 공연작인 <레오파드, 1963년>, '장 폴 벨몽도'와 공연한 필립 데 브로카의
<Cartouch, 1962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2분의1, 1963년>과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량한 서부극인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8년>등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대중들이 바라는 여성특유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녀는 결국 '더빙'에 자신의 음성을 맡겨야하는 난관에 자주 봉착하기도 했죠.
그러나 훗날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국제적인 성공을 가져가는데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그녀는 유럽에서의 생활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는데, 그 이면(裏面)에는
헐리웃의 돈다발을 든 제작자들의 끈질긴 유혹이 그녀의 욕구를 부채질했고, <핑크팬더,
1963년>, <서커스 월드, 1964년>, <프로페셔널, 1966년>은 그 시기에 터져나왔죠.
그녀의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는 훗날 자신의 가치가 작품
들을 통해 인정받기를 더욱 원했습니다. 그녀는 상업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그 때부터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고, 미국을 떠나 다시 고국이나 프랑스 영화계에서 활동을 재개
했습니다. <피츠제랄도, 1982년>, <사랑에 빠진 여인, 1987년>, <나의 어머니, 1991년>
같은 출중한 연기력을 필요로하는 작품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모두 숱한 염문(艶聞)을 뿌리고 전성기(全盛期)를 보냈지만, 단 두차례 결혼하여
자녀를 한명 두었고, 현재는 혼자서 85세의 쓸쓸한 노년(老年)을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