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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 박사의 부모 자녀 대화법
누가 저 한테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자식을 키우는 거다.
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 부모 자리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그런 얘기 좀
해 보려고 해요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나이가 몇 살이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가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누군가로부터 태어났고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키워지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너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의 부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안 해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이 시간에는 나와 나의 부모에 대해서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20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어떨 때는 더운 여름에도 빨간 머플러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아니 왜 이 더운 여름에 이렇게 머플러를 하냐고 궁금했습니다. 이 청년의 어머니는 암 선고를 받고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시고 난 다음에 털실을 샀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 동안 머플러를 짜서 아들에게 주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아들은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머플러를 두른다고 합니다. 이 머플러를 두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습니다.
부모는 그런 대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그립고 또 마음이 힘들 때 또 생각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대상이기도 합니다.
어떤 외국 신문에 났던 기사입니다. 꽤 오래된 기사인데요. 어떤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뭔가 출혈이 아주 심해서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상태가 나빠져서 아이를 출산은 했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회복을 하지 못하고 많은 의료진들이 그 엄마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로 중환자실로 옮겨져서 생명 유지장치에 몸을 맡긴 채로 의식을 찾고 있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의료진은 아이를 생각하니까 아이가 너무 가여웠대요.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 한번 제대로 안겨보지도 못한 그 아이가 너무 안 돼서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이 아이를 엄마에게 좀 안겨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근데 이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생명 유지장치에 몸을 맡긴 채로 어떠한 외부 자극에도 별 반응이 없이 그저 그냥 숨만 신체로 있는 상태였습니다. 자이 갓난아기 태어난지 며칠 안 된 아이를 엄마 품에 안겼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막 울자 응애 응애하자 어떤 것에도 반응을 하지 않더니
엄마한테서 반응이 막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처음에는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엄마한테 안겼는데 의료진은 깜짝 놀라서 그 뒤에 아주 자주 이 아이를 엄마한테 안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안기자마자이 엄마는 매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흘렀습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이 엄마가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신문에는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그
엄마가 왜 깨어났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의료진들은 모두 울었다. 이렇게 기사가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엄마는 그런 존재입니다
또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실제 있었던 기사인데 어떤 가족이 캠핑을 갔습니다. 가을날이었는데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고무보트를 빌려서 모든 가족이 타고 호수로 나갔습니다. 물놀이를 하려고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고무보트가 찍힌 겁니다. 그래서 호수 가장 깊은 가운데로 갔는데 그 고무보트에 바람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엔 아이가 여러 명 있었는데 그 막내가 아들인데 두 돌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물에 빠지는 걸 보고 그 엄마는 바로 뛰어들어서 아이를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을날이라 아이가 몸이 물에 이렇게 담겨 있으면 저체온증으로 아이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엄마는 어떤 것도 잡을 수 없고 어떤 거에도 몸을 의지할 수 없는 그 상태에서 아이를 역기처럼 들었다. 어떻게 할 수 없이 아이를 역기처럼 들고 발버둥을 치고 그리고 아빠는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구조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이제 물을 밖으로 나가고 엄마가 밖에 나오지 못한 사정은 신문 기사의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역기처럼 들고 발버둥을 쳤다. 이렇게 돼 있고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한 25분 정도 시간이 경과했었다. 구조대는 아이를 받았는데 아이는 좀 지쳤을뿐 목숨은 괜찮았다. 그리고 아이를 건진 잘 구조한 다음에 엄마를 구조하기 위해서 바로 엄마를 봤는데 그 사이에 엄마는 사망을 했다.
세상에 이렇게 신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엄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쓴 겁니다. 세상에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생명입니다. 부모는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우리 힘을 다합니다. 아이가 위험에 처하면 부모는 생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부모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맞습니다. 또 기사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싱글맘 왜 혼자 사는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이 엄마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 엄마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태워야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아이에게 이 엄마가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거는
멀리 떨어져 있는 특수학교에 매일 등하교를 시키는 일이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엄마는 그 멀리 떨어져 있는 특수학교에 아이를 매일 등교를 시키는 걸로 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엄마가 오는 길에 굉장히 기상이 나빠서 엄마가 운전하던 차가 벼랑으로 떨어졌다고 돼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엄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11번에 걸친 대 수술 끝에, 엄마는 다시 중환자실로 겨우겨우 이제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아이는 엄마의 친구인 이모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아이를 돌보고 학교를 데려다주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 아이는 자폐증을 앓고 있고 또 이렇게 엄마랑 둘이 살다가 엄마를 못 만나니까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의료진이 상의 끝에 이 아이를 매일 엄마를 면회를 시켜줬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중환자실에 온 이 아이는 매일 엄마에게로 다가가서 엄마 귀에다 대고 허리를 숙여서 매일 뭐라고 뭐라고 했습니다.
매일 이모는 궁금했습니다. 도대체이 아이가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지, 그러나 이 아이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조금 어려운 아이여서이 아이가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러서이 엄마가 회복을 했습니다. 이모는 궁금했습니다. 이 아이가 엄마에게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묻자 이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아이가 매일 와서 허리를 숙여서 엄마 귀에 대고 “엄마 나 잘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매일 얘기했답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습니까?
엄마 빨리 나으세요 엄마 사랑해요 이런 말도 하고 싶었겠지만 이 아이는 이 엄마가 무엇을 가장 걱정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엄마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래다주는 그 일이었기 때문에 이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내가 잘하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아이에게 생존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낳는 순간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의 생존을 돕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호르몬부터 뇌신경 전달 물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아이의 생존을 돕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아이에게 부모는 생명의 시작이자 생존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방공호 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몸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주는 그 조건 없는 아낌없는 마음의 수용과 사랑을 통해 아이들은 커나갑니다. 아이들은 그 부모의 깊고 따뜻한 사랑으로 성장을 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우주입니다. 이 우주가 편안하고 이 우주 안에서 사랑을 받고, 이 우주 안에서 존중을 받고 부모가 주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아이들은 살아갑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부모의 위치에서 아이에게 해줘야 되는 상호작용이 있고, 부모는 부모의 위치에서 해줘야 되는 사랑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잘 되면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안정감을 갖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잘 받은 아이들은 부모와 같이 있을 때 편안합니다. 부모가 없어도 편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이러한 사랑을 잘 받지 못한 아이들은 부모와 같이 있어도 불안합니다. 심지어는 부모하고 같이 있어서 더 불행합니다. 부모는 이런 존재입니다.
어떤 분이 성인이 돼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술을 마시면 엄마를 때렸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짐을 싸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엄마가 아빠에게 맞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두고 간 엄마는 엄마를 이해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떠난 이후에 나와 나의 동생들은 이 아버지의 주사를 다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부모가 됐습니다.
물론 어머니를 이해하지만 어떨 때는 우리를 두고 떠난 엄마를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에게 맞은 기억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방을 안 치웠다고 막고 공부를 안 한다고 막고 말을 안 하면 안 한다고 막고 말을 하면 대든다고 맞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돼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과연 있을까요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에게 모진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감정 조절이 안 되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어떨 때는 비난도 합니다. 자식들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어느 자식을 편애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아이를 보호하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길을 가르쳐 줬어야 되는데 부모가 그 길을 잃고 어떨 때는 헤매기도 합니다.
심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너 같은 애 처음 봤어.” “야! 너 키우기 어렵다.” 이렇게 말도 합니다.
“나 네 엄마 안 하고 싶어!” 말하기도 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부모도 없습니다.
어쩌면 부모는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시기든 자식을 사랑했지만 어떠한 형태든 자식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사랑은 했지만 어떻게 보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부족함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상처를 받은 자식은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이것은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안다고 해도 마음이 풀리진 않습니다.
머리로 알아도 우리가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되는 일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부모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살다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또 다시 부모가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우리는 자식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어떤 애기 엄마가 명절이 되서 친정에 방문했습니다. 이 아기 엄마는 공부 잘하는 오빠의 치여서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사실은 바로 못하고 몇 년 후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사실은 마음에 맺혀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명절에 집에 가서 얘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 애기 엄마는 어머니에게 친정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늘 마음에 맺혔던 이야기라 언제 한번쯤은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마음이 아팠노라고 상처를 받았노라고 그런데, 이 아기 엄마는 그 얘기를 꺼내고 나서 깜짝 놀랬습니다.
친정 엄마는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맺힌 것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울기도 하고 어떨 땐이 맺혀있는 상처 때문에 마음이 아팠는데 어떻게 우리 엄마는 이걸 기억하지 못했을까?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건 사뭇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굉장히 즐거웠던 추억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최선을 다해 사랑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다를 수 있었을까요?
그러네요. 자식은 어떻게 늘 아팠던 거 생각하고 부모를 잘해준 것을 기억할까요?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다를 수 있을까요.
기억은 원래 주관적인 겁니다. 지역은 인지기능이자 정서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같은 것을 겪어도
기억하는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기억하는 게 다릅니다. 그래서 기억은 왜곡이 생기기도 하고 변형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 자식간에 부모는 “나는 너 하나 잘 키우려고 너 하나 잘 되라고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먹을 거 먹지 않고 쓸 거 안 쓰고 너 뒷바라질 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것을 기억합니다.
자식은 “내가 얼마나 부모 때문에 엄마 아빠 때문에 그 모집 말에 내가 상처를 입었는지 아십니까?” 이걸 기억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부모 자식간에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내 그리고 어떤 말들을 주고 받았길래
이런 일이 생길까 이런 결과가 생길까요 맞아요.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면서 키웠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의 내면 안에 저 깊은 곳에 저 마음에 아주 심연 안에 우리는 다 해결되지 못한 나름의 마음의 어려움들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게 없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 너무나 가까운 부모 자녀 관계에서 나를 키웠던 나를 사랑했던 부모 역시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미성숙함을 통해서도 사랑은 표현됩니다. 미성숙한 사랑은 때로는 자식을 아프게도 합니다. 사랑했지만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이 해결되지 못한 마음의 어려움들은 요렇게 마음 안에 꽉 덩어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살아가면서 아주 사소한 일에도 탁 건드려집니다.
물론 마음 안에 해결되지 못한 부분들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건드려지는 게 다르겠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어떤 사람은 정말 죽을만큼 힘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탁 건드려지면 확! 증폭이 돼서 이것이 생활의 영향을
줍니다. 대인관계의 영향을 줍니다. 마음의 안정 상태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여의도에 사는 어떤 엄마가 있습니다. 네, 이 엄마는 이 여의도 엄마는 사실 그 어머니가 너무 깔끔한 분이셨습니다. 이 여의도 엄마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나 청소를 하는 엄마 밖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깔끔하니 언제나 마룻바닥을 닦는 엄마의 뒤통수와 엉덩이만 기억이 납니다. 이분은 마음 놓겠습니다. 그리고 어지르고 놀 수도 없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놀이를 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치워야 하니까요 너무 심하게 어떨 때는 엄마한테 의논도 하고 싶었습니다 . 그러나 이 청소에 지친 엄마의 얼굴을 보면 나라도 엄마를 좀 거들어들여야지
해서 의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았다고
했습니다이 엄마는 4살짜리 딸을 데리고 있습니다. 네 살이 되니까 이제 자기가
막 뭘 하려고 합니다. 아이랑 놀러 가기 위해서 다 차려입고
나왔습니다. 아이는 재단을 내려가는데 꼭 자기가 한 대요. 내가 내가 내가
자 엄마는 마음 같아서는 반짝 안아서 내려주고 싶지만 그래도 또 오은영 박사님 책을 보니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라 내 공부 열심히 하는 엄마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그래 알았어 대신에 계단이 높으니까 엄마가 한 손을 잡아 줄 거야 애가 아 내가 내가 계단을 내려고 합니다. 계단이 꽤 높습니다. 아이는 내려가다가 한 손으로 계단을 짚습니다. 아지지! 손에 흙이 묻었습니다.
이 엄마는 갈등을 합니다. 그냥 놔둬야 돼 도로 올라가서 옷을 다. 벗겨서 손을 씻길까 아니면
데리고 갈까 아이들은 꼭 밖에 나오면 개미와 친합니다
그렇게 개미를 봅니다. 보다가 어떨 땐 입에 넣기도 합니다
아이와 재밌게 놀 수가 없습니다. 만지면 시켜야 되지 않나 도로 데리고 올라가야 되지
않나 이지지 엄마는 이지지 때문에 하루가 괴롭습니다.
지지 엄마는 아이를 사랑할까요? 사랑하지 않을까요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지지 엄마는 지지지만 사랑합니다. 자식을
네이지지 엄마는이 본인의 엄마와의 관계에서 해결 되지 않습니다. 닮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도 그렇게 하고 있는 면을 발견하고 우리는 어떨 때는 고통스럽고 괴롭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언제나 불안합니다. 아주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불안합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나의 이 해결되지 않은 면들이 건드려질 때 불안이 증폭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불안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그럴까봐?
이 까봐? 까봐 때문에 괴롭습니다. 어떻게 될까봐 이럴까 봐 저럴까 봐
또 어렵습니다. 나쁜 길로 빠질까 봐
묵동 사는 아빠가 있습니다. 여의도에서 넘어갑니다. 목동으로 생각해보면 늘 부모님이 다투셨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가 나게 될까봐 언제나 떨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터놓고 뭘 얘기를 하고 의논한 적이 없답니다. 혼날까봐 말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이 묵동 아빠는 나는 아빠가 되면 정말 친절한 아빠가 될 거야 아이에게 소리지르는 아빠가 절대 되지 않을 거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빠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밖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오늘도 야근을 했습니다. 열심히 해서 아이를 조금이라도 원하는 걸 더 해주고
뒷바라질 해주기 위해서이 아빠는 야근을 하고 녹초가 돼서 집에 왔습니다.
띡띡 누르니까 이 집에 아이 둘이 아빠를 너무 보고 싶어서 막 뛰어옵니다.
뛰어오면서 서로 아빠를 먼저 안고 안기겠다고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서로 싸웁니다. 악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 아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조용히 해 아유 그러면 안 되는데이
버럭 아빠는 아이를 사랑할까요 사랑하지 않을까요? 사랑하죠 사랑합니다
버럭 아빠도 아이를 사랑합니다. 맞아요네 이 지지엄마나, 버럭 아빠나 아이를 사랑하지만 본인이 뭔가 해결되지 않은 면이 언제나 삶을 살아가면서 증폭이 되는 겁니다. 사실 버럭하지 않고 친절하게 말해야 되는 거는 아이의 숙제가 아니고 아빠의 숙제였던 겁니다.
아이는 그저 아빠가 좋았을뿐입니다. 본인 이 해야 알고 있지만 그 숙제를
편안하게 처리하는 데에는이 아빠는 좀 더 본인이 해결해야 될 부분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내가 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면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리고 이 자식들은 언제나 자기 나이에 맞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유모 조모로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거에 내가 건드려져서 어떨 때는 이 사랑하는 자녀를
양육하는게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 아빠를 사랑하지만 같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이가 왜 그래?” 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생각해보는 그러한 노력을 늘 하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관계는 말을 하고 살아야 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사이가 나쁜 사람은 말을 안 하기도 합니다. 단절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만 하기도 합니다. 아
조그만 옆으로 아예 감사합니다. 이게 필요한 말입니다. 그런데 가족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 자녀 관계는 감정적 소통을 해야 되는 관계입니다.
그냥 말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나눠야 됩니다. 이것을 감정적 소통이라고 합니다. 결국 소통을 안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이처럼 자식을 사랑하는데도 참 이상하게 소통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부모가 혼기에 찬 한 30살 된 자녀를 보면 좀 걱정이 됩니다.
네 이왕이면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잘 이렇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물어봅니다.
“너는 결혼을 안 하니?” 사실은 이렇게 말합니다.
“뭐 됐어요. 뭐 결혼을 요즘에 뭐”
“야 너 나중에 혼자 살아봐 너 아플 때 약 하나 사다. 주는 사람 없어 열라면 너 열 재준 사람도 없어 너
나중에 외롭다.“ 아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또 나중에 괜히 늙어서 우리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하지 마
우리 모른다. 사실은 부모는 걱정을 하는 겁니다.
그래도 서로 의지하고 살 사람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을 갖는 건데, 이 걱정을 이상하게 소통을 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예단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공부를 좀 안 하면 열심히 해라 하면 될 걸 “너 그러다가 거기 깡통차~”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예단을 합니다
이상하게 소통합니다.
고3짜리 아들이 있습니다이 아들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뭐 대학에
좀 안 가면 어떻습니까 근데 본인이 굳이 가겠답니다. 근데 공부를 열심히 안 합니다
수능을 받습니다. 못 봤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입이 이만큼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밥도 안 먹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문 딱 닫고 밥도 잘 안 먹고 그리고 있습니다이 상황에서 누가 제일 속상할까요 아들이요 본인이 제일 속상합니다. 자 그런데 이 아들을 보는 엄마가 너무 속이 상합니다. 네 왜냐하면 아이가 마음이
아픈 거 같고 또 고민을 하는 거 같고 밥까지 안 먹으니까 너무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아들 방에 갑니다.
문을 열고 “야! 너 밥 먹어.”
아들이 아 됐어요 앞에 안고파요
“야! 네가 뭘 잘했다고 밥까지 안 먹어 야 네가 태산 엄마가 좀 열심히 하라 그랬지
내가 뭐라 그랬어 너 그렇게 해서 대학 못 간다고 내가 여러분 얘기했다. 내가 몇 번을 얘기해 그렇지 너
이렇게 해갖고 대학 가면 내 손에 장을 뒤진다.”
그랬어 [웃음]
박사님이 5년 전에 저희 집에 다녀가신 거 같은 느낌이 좀 있는데 [웃음]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제일 속상하지네 그걸 보는 나도 좀 마음이 너무 안 좋다. 네가 제일 속상하겠지만 어쨌든 밥은 나와서 먹어라 그리고 네가 잘 생각해 봐서 어떻게 할 건지 의논을 하자!”
그럼 제 아이들이 그래요 뭐 의논한다고 하면서 뾰족한 수가 있나요 이럴 때
그러니까 열심히 하라고 그랬잖아 요걸 참으셔야 됩니다. 이걸 말하지 마셔야 돼요 그럴 때 아니 그러니까
하면 안 되는 부분인거죠 그럴 때 그럴 때 그래 그래도 의논을 해보자네 이렇게
말하는게 필요합니다.
자 그런데 한번 봅시다. 지금
앞에 말한 엄마랑 뒤에 말한 엄마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냐면 첫째 아이를 사랑합니다.
둘째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걱정이 됩니다
넷째 이번 일을 통해 아이가 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아주 핵심적인 문제는 이 앞에 엄마가 본인이 뒤에 엄마처럼 말했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마음은 같지만 다르게 말했는데 본인의 기억 속에는 야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네가 상처 안 받았으면 좋겠고 우리 같이 의논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 엄마처럼 말해야 되는데 이렇게 말하는 거는 영화의 번역 대사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려운 단어가 한마디도 없지만 어쩌면 이렇게 어색한지
제 주변에는 단 한 분도 안 계신 거 같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어쨌든 너무나 우리한테 어색합니다. 왜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거가 익숙하지 않고 또 그것을 본 바도 없고 배움 바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합니다. 익숙하다. 보니까 이것이 편합니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 안 합니다. 나도 그렇게 했더니 옆집 언니도 그렇게 하고 앞집에 동생도 그렇게 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것이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이상하게 소통을 한 거죠.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집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이상이 우리 선생님 꼭 나한테만 뭐라 그래!”
자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렇지 니가 잘해봐”
선생님이 너한테 그러나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잘못이 있으니까 선생님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에게 왜 그 얘기를 했을까요?
왜 그런 말을 관심을 받고 싶으면 엄마 위로를 엄마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편이니까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도 의견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과는 마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문방구에 가서 사장님한테 ... 이렇게 말할 순 없는 겁니다.
네 엄마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엄마에게 그렇게 말한 겁니다. 자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가 아 나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받아 줘야 되는데 이 엄마는 상황을 설명하고 이 설명을 아이가 알아들으면 받아들여서 이해를 하면 이해해서 납득을 하면 깨달음을 얻고 설득이 되고 마음을 정리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아이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고 인지적으로 설명하는 거 필요합니다만 어떨 때 아이가 나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툭 얘기할 때는 이때는 논리가 아닌 그냥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주제로 하는 마음의 단어를 사용해서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마음의 소통을 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아유! 어쨌든 마음이 속상하고 안 좋네 네가 그럴 때 마음이 불편했겠구나!
마음이 좀 그러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는 야 너 잘 생각해 봐 이렇게 얘기합니다. 물론 인간은 또 있고 또 마음도 있고 행동도 있는 거지만 특히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얘기할 때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감정을 얘기할 때는 생각으로 받지 마십시오. 이게 굉장히 이상한 소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상하게
소통합니다. 지금 마음만 하시는데 제가 깜짝깜짝 놀래요 저희 둘째 이름이 마음이거든요
[박수] 이름을 잘 지으셨네요네 마음이 통하겠다. [웃음]
홍길동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굉장히 성실하고 학교 다닐 때도 열심히 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에서 열심히 만족스럽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가 최소한 20년 동안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해서 사회 한 구성원이 돼서 마음이 편안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가까운 사람과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게 이걸 20년간 돕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일입니다. 어쨌든 홍길동이는 어른이 됐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비교적 잘 지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이 길동씨의 아버지는 맨바닥에 헤딩을 하면서 자수성가를 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아주 따끔하게 얘기를 해줘야! 이 험난한 무림 천하를 꿋꿋하게 이겨낼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렇지 본인 생각만 그래서 언제나 길동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어 나 시험 100점 맞았어요!” 그러면
“야 너보다. 잘하는 애들 많아 너! 그걸로 너 자만하면 안 돼 내지는 뭘 좀 하면 야야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어
야 야 제대로 할 거 아니면 하지 마!” 아빠는 이렇게 말해주면 길동이가 더 단단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길동이는 회사에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래서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임원이 길동이를 불러서 큰 프로젝트를 맡겼습니다. 인정을 받은 거죠 길동이는 2주 동안에 잠도 안 자고 이 길동씨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딱 만들어서 서류를 만들어서 자 임원에게 제가 이렇게 해왔습니다. 그 서류를 받은 임원이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그 임원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길동이는 마음이 툭 내려앉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탁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야 야 야 제대로 할 거면 하고 제대로 안 할 거면 하지 마 니가 제대로 하는게 뭐가 있어 이게 탁 떠오릅니다.”
그래서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임원 전무님은 갑자기 깜짝 놀라면서
아니 홍길동 씨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사실 이 전무는 잇몸이 아파서이가 시려서 그랬는데, 그 순간에 한 건데 이 길동씨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는 거는 우리가 예를 들어 동네 뒤에 있는 야산을 등산을 한다고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가보면 등산객이 잘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이 닦여 있습니다. 이 길은 포크레인이 와서 닦은 길이 아닙니다. 등산객들의 계속 그 길을 걸어가면 그 길을 많이 밟음으로써 사람들이 밝고 지나간 데에는 길이 닦입니다.
이 길로 가면 조금 더 편안하고 다리도 안 접질려지고 조금 빨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길이 닦이듯이 아이들의 뇌의 세포와 뇌세포가 연결이 되는 뇌신경회로 쉽게 말하면 라인이 형성되는 거 이것이 어떠한 자극을 계속 받느냐에 따라서 길이 바뀌는 겁니다.
언제나 너는 결국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최선을 다해 봐 실패도 괜찮아 이걸 계속 말해주면 이 길이 아주 탄탄대로로 닦입니다. 그러면 실패를 했을 때 아니야 뭐 이걸로 딛고 또 해보면 되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길이 닦여서 어떤 정보가 들어오면 아주 효과적으로 빨리 닦입니다.
그런데 늘 “야! 야! 야!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어!” 이러면 이 길이 탄탄대로로 닦여서
유사한 자극이 싹 와도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비슷한 느낌만 줘도 이 길로 얼른 가서 정보가 해석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좀 걱정되고 편안한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소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화를 소모적인 대화라고 합니다.
사춘기 딸이 머리를 잘 안 감습니다. 안 그러던 아이가 근데이 딸은 좀 예민해져서 사춘기가 돼서
뭔가 입던 옷이 편하지 새로운 속옷을 입으면 약간 버석거립니다. 바삭바삭 그래서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속옷을 도로 입고 나온 애들도 있습니다. 입던 것을 근데 이걸 잘 모르는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 더러 아 더 야 더러워 그럼 애가 나 안 더럽거든요
나 안 더럽다고요
나 어제 감았거든요 더러워 매일 머리를 감으라는 법이 있나요?
애들이 막 이래요 야 너 애들이 싫어해 애들아 좋아하거든요 애들 좋아하거든요
머리에서 냄새나는 애를 행여나 좋아하겠다. 엄마가 모르는 거지 나
애들이 나 좋아하거든요 좋아하거든요 아 더러워 엄마가 내가 밉다는 얘기죠! 밉단 얘기죠! 자 이런 것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부모가 전달하고 싶은 얘기는 저 다 빠져있는 그저 말풍선을 주고받는 이 과정에서 나중에 기억나는 거는 “기분 나빠” 이것만 남게 하는 이러한 이상한 소통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고 삽니다.
이 소모적인 대화는 정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거에 대해서 치열하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도돌이표처럼 내지는 회전문처럼 언제나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 여기서 요만큼의 개선도 요만큼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조언은 제가 드리는 또한 의견은 기분이 좋고 서로 좋을 때는 말씀을 많이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약간 갈등이 생기거나 또는 약간 관계가 안 좋을 때는 말을 간결하게 열 단어를 넘지 않게 근데 어떻게 열 단어를 안 넘어요.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열 단어 내외로 말하는 게 가능합니다. 이것이 소모적인 대화를 피하는 굉장히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 상황에서 우리 부모는 언제나 아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칠 때 이 상황에서 내가 가르치는
핵심적인 그 하나만 먼저 생각해서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건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열 단어 내로 간결하게 하는 연습을 한다면 꼭 열 단어가 아니더라도 조금 더 아이에게 불필요한 소모적인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 몸에 많이 익숙해집니다.
그럼 아까 그 머리 이거는 사춘기 딸에게는 열단어네요 어떻게 말하는데요.
“위생은 중요해 머리를 감아라!” 이렇게 그냥 말하는 거죠. 네 사실만네 그럼 애들이 감았거든요 그러면 또 가면 좋을 거 같아 이렇게 정도를 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게 참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되게 간단한 건데 부글부글한데요
우리는 그 꼴을 견뎌야 합니다. 자 저는
여러분께이 말씀을 꼭 드리고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왜 인생이 고해라고 합니다. 아 맞아요 부모의 역할은 참 그 자리 어려운 자리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최선을 다 해도 결과가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을 다 해줘도 상대가 나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게 어쩌면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것만 골라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살다. 보면 이런 것들이 인생의 삶에 훅 하고 옵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이 희노애락을 다 더하면 공평한 것 같습니다. 근데 이게 어느 시기에 누가 먼저 겪느냐 종류가 다를 뿐이지 우리 인간이 다 더해보면 모두가 겪는 행복과 어려움은 더하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을 개인이 얼마만큼 받아들일 것이냐 그리고 받아들인 걸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이것을 나에 맞게 어떻게 소화를 시키느냐 그것을 우리는 결정할 뿐이지 나의 인생의 오는 좌절과 어려움과 실패와 고통과 안타까움을 막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훅 옵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과연 이게 끝나긴 끝날까 이럴 정도로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정말 끝도 모르는 나락으로 나의 인생과 삶이 아주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의 처하기도 합니다. 과연 끝나긴 할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런 걸로 뭘 그렇게 힘들어 하세요 그러나 개인이 힘들 때는 그것이 아픈 것이 맞습니다. 개인이 건드려지는 덩어리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게 어떤거든 내가 아프면 아픈 거 맞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고나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것을 우리는 인생에서 훅 오는데 피할 수도 없는데 “극복하세요” 저는 그 말 잘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떨 때는 극복이란 말을 할 수도 없을만큼 너무 아프고 힘든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인생이 어쩔 때는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거즈 같은 너덜너덜한 그런 헝겊처럼
느껴져도 우리는 그것을 꿰매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그냥 어깨를 내어주고 서로 손을 잡고 그냥 머리를 맞대고 우리는 그냥 우리의 어려움을 그냥 꿰매고 살아야 됩니다. 그 꿰맨 자리가 매끈하지 않아도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어떨 때는 미워도 우리는 그냥 꿰매고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과 아픔 뒤에 오는 그 인생은 갇히는 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겪을 때 아픕니다. 아파서 우리는 힘이 들지만 그래도 겪어 가야 됩니다. 이것을 겪을 때 나라는 사람을 나무라고 비유를 했을 때 뿌리째 흔들리는 것까지는 막아야 됩니다.
비록 아파해도 내 자신이 아주 피폐해지고 나의 삶을 망가뜨리는 그런 정도까지 뿌리째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이걸 흔들리지 않으면서 뿌리째 좀 겪어 가려면 내면의 힘이 좀 있어야 됩니다. 이 내면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면 우리의 소중한 자녀에게 이 힘이 좀 길러지도록 우리가 좀 애써 줄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힘 우리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좌절과 아픔과 안타까움과 실패 이러한 스트레스 고통 이것을 그래도 좀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가지 않으면서 좀 겪어가는 내면의 힘은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 아이들에게는 부모입니다.
이 부모와 살아가면서 겪었던 아주 즐거운 추억 아주 행복했던 단편적인 기억에 한 조각들 이런 것들로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느 날 봤더니 이것이 떠오르면서 나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아이들은 이걸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이러한 경험을 많이 해야 됩니다.
물론 오냐 오냐라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한테는 할 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할 말도 좋게 하는 것도 연습해야 됩니다. 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눈을 부릅뜨고 얘기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운 거는 매일 작은 실천을 해야 됩니다. 이 작은 매일의 실천이 모이면 나의 삶이 바뀌고 나의 가족이 바뀌고 나와 아이의 관계가 바뀌고 내가 아이의 마음에 어느 순간 닫아라 다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작은 요렇게 서 있을 때 똑같이 줄에서 있는 것 같지만 각도를 1도만 바꿔도이 일도의 변화가 쌓이고 쌓이면 6개월 1년 후에는 다른 곳에가 있습니다. 이 다른 곳이 우리 소중한 아이 우리 소중한 가족의 마음에 도달해 있는 겁니다.
가족은 이처럼 중요하고 특히 아이에게 부모는 온 우주이자 생명이자 생존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위대하고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네 여러분들 놀랍고 위대한 사람들이니까 존경합니다.
네 [박수]
감사합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