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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조선(朝鮮) 시대 왕비편
* [추존]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
왕비 : 효공왕후 이씨(孝恭王后 李氏)
생몰년 미상. 조선 태조의 고조인 목조(穆祖:추존왕)의 비(妃). 본관은 평창(平昌).
전라북도 전주출생. 아버지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숙(李肅)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목조와 혼인한 뒤 전주에서 살았으나, 전주부윤과 목조의 사이가
나빠져 죽이려 하자 피신하는 남편을 따라 강릉에 옮겨 살았다.
그뒤 전주부윤이 사혐을 갚기 위해 강원도안렴사를 자청하여 오자, 이것을 피해
배를 타고 함길도 덕원부로 옮겨 살았다.
1394년(태조 3) 추존되어 효비(孝妃)로 봉해졌고, 그뒤 태종이 다시 존호를 추가
해서 효공왕후로 봉해졌다. 아들 6형제를 낳았는데 장남이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 둘째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 셋째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
넷째 익조(翼祖:추존), 다섯째 안창대군(安昌大君) 매불(梅拂),
여섯째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에 있다.
* [추존] 익조 이행리(翼祖 李行里)
왕비 : 정숙왕후 최씨(貞淑王后 崔氏)
생몰년 미상.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증조부인 익조(翼祖)의 비.
등주최씨(登州崔氏)로,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생각이 뛰어나고 기상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처녀 때 항상 말하기를,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나이 20세가 되도록 여러 곳의 혼처를 물리치고 시집가지 않다가 익조를
만나자 나의 배필이라면서 결혼을 승낙하였다. 시집와서도 익조의 뛰어난 풍채와
재주 때문에 다른 천호들의 시기를 받아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나, 그때마다
도움을 얻어 살아났다.
다른 천호들의 시기와 모략을 피하여 한때 변경으로 피신하여 살았으나 뒤에 다시
경흥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1394년(태조 3) 정비(貞妃)로 추존되었고, 뒤에 태종이 상존호(上尊號)를 더하여
정숙왕후로 추봉하였다.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함녕대군 안(咸寧大君安),
함창대군 장(咸昌大君長), 함원대군 송(咸原大君松)·도조(度祖)·함천대군 원
(咸川大君源)·함릉대군 고 태(咸陵大君古泰)·함양대군 전(咸陽大君腆)·함성대군
응거(咸城大君應巨)이다. 묘는 문천의 동쪽 초한사(草閑社)에 있고,
능호는 숙릉(淑陵)이다.
* [추존] 도조 이춘(度祖 李椿)
왕비 : 경순왕후 박씨(敬順王后 朴氏)
본관은 문주(文州).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다. 1394년(태조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흥 동쪽 동명사 근처에 마련되었다.
소생으로는 완창대군 자흥(完昌大君 子與), 환조 자춘(桓祖 子春),
완원대군 자선(完原大君 子宣), 완천대군 평(完川大君 平),
완성대군 종(完城大君 宗)이 있다.
* [추존]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
왕비 : 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
생몰년 미상. 조선 태조의 어머니. 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영흥(永興).
처음 성은 조씨(趙氏)로 선수천호(宣授千戶) 조(祚)의 딸이다.
본래 중국 등주(登州)사람으로 함경도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돈을 많이 모아 큰
부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남다른 데가 많았으며, 가년이 되자 부모가
김린(金麟)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녀가 말을 듣지 아니하자 가재
(家財)를 반으로 나누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슬피 울면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인연이 있는데
어찌 뜻밖에 김린의 아들에게 시집갈 수 있겠는가. 배필이 곧 이를 것이다.”라고
거절하였다.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子春)가 볼일이 있어 조조의 집에 갔는데, 그때 그녀가
용 두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한마리는 뱃속으로 들어가고 한마리는 뜰에 서 있는
좋은 꿈을 꾸자 자춘에게 청혼을 하여 그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조조는 그 복을 완전하게 받고자 성을 바꾸어 외가의 성인 최씨로 하고 이름
도 그가 자(字)로 쓰던 한기(漢奇)로 고쳤다고 한다. 그녀는 회임한 지 14개월 만에
이성계(李成桂)를 낳았다.
그녀의 생존시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여졌고, 조선이 개국되어
태조가 즉위하자 의비(懿妃)로 봉하여졌다. 뒤에 태종이 의혜왕후로 추봉하고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였다.
1471년(성종 2) 영령전(永寧殿)에 이안하였고, 1795년(정조 19)
영흥본궁(永興本宮)에 추제(追躋)하였다.
슬하에 2남 태조 이성계와 영성대군 천계(永城大君 天桂) 1녀 정화공주(貞和公主)
를 두었다.
후궁 : 이씨(李氏)
본관 한산이씨(韓山李氏). 이름은 내은장. 자춘의 여종으로 소생으로
완풍군 원계(完豊君 元桂)가 있다.
후궁 : 정안옹주 김씨(定安翁主 金氏)
이름은 고음가. 후에 정안옹주(定安翁主)에 봉해지고, 다시 정빈으로 추증되었다.
소생으로 의안대군 화(義安大君 和)가 있다.
1대 태조 성계(太祖 成桂 1335-1408)
왕비 : 신의왕후 한씨(神懿皇后 韓氏) 1337~1391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安邊) 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韓卿)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 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
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節妃)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1408년(태종 8) 승인순성(承仁順聖)의 휘호가 추상(追上)되었다.
계비 : 신덕왕후 강씨(神德皇后 康氏) 1356~1396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信川)이다.
부친은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이고, 모친은 진주강씨
은의 딸이다. 정부인인 한씨가 있었으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이성계는 강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강씨는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
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즉위하자 현비(顯妃)에 책봉되고
사후에는 존호를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貞陵)이라 정하였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았다.
1392년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
받았다.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 ??~1449
판중추원사 원상(元庠)의 딸. 1396년 인덕왕후가 죽자 태조의 후비로 경절되어 정식
간택을 통해 궁궐로 들어왔으며, 성빈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조는 그녀를 계비로
인정하지 않아서, 죽은 뒤에 왕비의 제례를 받지 못하고 서모의 제례를 받았다.
1406년 5월 2일 태종은 태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씨를 비(妃)로 승격시켰다.
소생은 없다.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翁主 柳氏)
고흥 사람 유준(柳濬)의 딸. 처음에 태조는 유씨를 빈에 봉했다가 1398년 정경옹주로
봉했다. 1406년에는 태종이 태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씨를 정경궁주로 승격시켰다.
소생은 없다.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 ??~1428
김해 기생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관시로 있다가 인물이 출중하여 태조의 눈에 들었고,
딸을 낳아 화의옹주에 봉해졌다. 소생으로 숙신옹주가 있다.
후궁 : 이름미상
소생으로 의령공주가 있다.
2대 정종 방과(定宗 芳果 1357-1419)
왕비 :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1355-1412)
355(공민왕 4)∼1412(태종 12). 조선 제2대왕 정종의 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월성부원군(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月城府院君) 천서(天瑞)
의 딸이다.
1398년(태조 7) 8월 정안군(靖安君:태종) 등에 의한 정도전(鄭道傳)일파의 제거 및
이를 계기로 한 세자 의안대군(宜安大君)의 폐출로 영안군(永安君)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비가 되었고, 같은해 9월에 덕빈(德嬪)에 봉해졌다가 정종이 즉위하면서 덕비
(德妃)에 진봉(進封)되었다.
1400년(태종 즉위년) 정종이 태종에게 전위하고 상왕이 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
의 존호를 가상(加上)받았다.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정종에게 선위하고 정양할 것을 권하여 정종이 조기에 선위
및 천수를 다하게 한 내조가 있었다.
묘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해풍군 백마산(白馬山)에 있다.
1681년(숙종 7) 온명장의(溫明莊懿)의 휘호를 추상받았다.
후궁 : 성빈 지씨(誠嬪 池氏)
본관 청주. 지윤(池奫)의 딸. 그녀의 언니 지씨는 이성계의 장자 방우의 처이다.
정안왕후 김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식 혼례를 통해 입궁하였으나, 그녀 역시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아들 둘을 낳았다.
소생으로 덕천군 후생(德泉君 厚生), 도평군 말생(桃平君 末生)이 있다.
후궁 : 숙의 지씨(淑儀 池氏)
본관 청주. 지윤(池奫)의 딸로 성빈지씨와 자매지간이다.
소생으로 의평군 원생(義平君 元生), 선성군 무생(宣城君 茂生),
임성군 호생(任城郡 好生), 함양옹주(咸陽翁主) 3남 1녀를 두었다.
후궁 : 숙의 기씨(淑儀 奇氏) ??~1457
본관은 행주(幸州). 면(勉)의 딸이다.
소생으로 순평군 군생(順平君 群生), 금평군 의생(錦平君 義生),
정석군 융생(貞石君 隆生), 무림군 선생(茂林君 善生), 숙신옹주(淑愼翁主),
상원옹주(祥原翁主) 4남 2녀를 둠.
후궁 : 숙의 문씨(淑儀 文氏)
소생으로 종의군 귀생(從義君 貴生)이 있다.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1368~1417
해평윤씨 대사헌 윤방언의 딸.
소생으로 수도군 덕생(守道君 德生), 임언군 녹생(林堰君 祿生)
석보군 복생(石保君 福生), 장천군 보생(長川君 普生), 인천옹주(仁川翁主) 4남 1녀 둠.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평창이씨(平昌李氏). 소생으로 진남군 종생(鎭南君 終生)이 있다.
후궁 : 가의궁주 유씨
유분의 셋째딸. 처음 고려 우왕의 총신이었던 임견미의 사위 반복해(潘福海)에게
후실로 들어갔다가 반복해가 죽자, 방과에게 시집을 왔고, 방과가 왕위에 오르자
후궁이 되었다. 소생으로 아들 불노가 있다.
후궁 : 시비 기매
정종의 시녀. 아들하나 낳았으나 신분이 천하여 후궁이 되지는 못하였다.
1417년 8월 환관 정사징과의 간통사건으로 쫓겨났다. 소생으로 아들 지운이 있다.
3대 태종 방원 (太宗 芳遠 1367-1422)
왕비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1365(공민왕 14)∼1420(세종 2). 조선 태종의 비(妃).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
(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여흥에서 출생하였다.
1382년(우왕 8)에 방원(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
(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부군(夫君)을 도와 공이 출중하였으며,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태종과 정비의 불화는 빈어(嬪御)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고,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민무구형제는 이미 태종 2년에 왕이 창종(瘡腫)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정비가 직접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민무구형제가 끝내 대역(大逆)에 몰려 비명으로
죽게 된 데에는,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 곧
민무구형제에게 영향을 주어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게 하고,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도와
주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비는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금령을 범하여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정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정비의 무엄한 태도에
태종이 격분하였던 것이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
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제도를 정하여, 같은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고,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
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媵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56세로 죽음.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
경안(慶安)·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후궁 : 효빈 김씨(孝嬪 金氏) ??~1454
김점(金漸)의 딸로 원래 원경왕후의 몸종으로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 아들을 낳았고,
그 공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빈에 봉해졌다. 소생으로 경녕군 비(敬寧君)가 있다.
후궁 : 신빈 신씨(信嬪 辛氏) ??~1435
본관은 영월 신씨(靈山 혹은 寧越辛氏). 영귀(永貴)의 딸로 처음에 옹주에 봉작되었다가
1422년 태종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간호를 전담하여 신녕궁주(信寧宮主)가 되었고,
이후 빈(嬪)이 되었다. 소생으로 3남 7녀 함녕군, 온녕군, 근녕군, 정신, 정정, 숙정,
소신, 숙녕, 숙경, 숙근 옹주가 있다.
후궁 : 선빈 안씨(善嬪 安氏)
안의(安義)의 딸로 궁인으로 입궁하여 숙선옹주(淑善翁主)에 봉해졌다가 후에 선빈으로
진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익녕군, 소숙옹주, 경신옹주가 있다.
후궁 : 의빈 권씨(懿嬪 權氏)
생몰년 미상.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후궁.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생모이다.
처음 궁인으로 궁중에 들어와 태종의 총애를 받아 궁주에 봉하여지고, 정혜옹주를
출산하여 의빈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죽자 비관하여 세종에게 고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면서 선왕의 명복을 빌었으므로 후궁들이 본받아
앞을 다투어 머리를 깎았다.
당시 조선은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 때였으나 궁중에서는
심하게 금지시키지 않았으므로 범패와 공양의 도구를 준비해두고 조석으로 예불
하였다.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를 맡아서 길렀다.
1453년(단종 1) 늙고 병들자 금성대군이 사저에서 한양(閑養)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혜빈궁 양씨(惠嬪宮楊氏)의 처소로 옮겨서 지냈다.
1457년(세조 3) 선왕을 위하는 왕의 특별배려로 궁호를 영수궁(寧壽宮)으로 고치고
노후를 안양(安養)하게 하였다.
후궁 : 소빈 노씨(昭嬪 盧氏)
노구산(盧龜山)의 딸로 소혜궁주에 봉해졌고, 후에 소빈으로 진봉되었다.
소생으로 숙혜옹주가 있다.
후궁 :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
안동김씨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1411년(태종11) 11월 명빈으로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숙안옹주가 있다.
후궁 : 숙의 최씨(淑儀 崔氏)
태종이 죽고 나이가 들은 뒤 궁에서 나가 사가의 아들 집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소생으로 희령군이 있다.
후궁 : 숙공궁주 김씨
김점(金漸)의 딸. 세종때 평안도 관찰사였던 김점은 최오을마대(崔吾乙鹿大)란 장사꾼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도내의 재물을 긁어 모았다. 또 토관(土官) 같은 벼슬을 팔고 옥사
(獄事)도 뇌물 액수에 따라 처리하였으며, 사신들의 행렬에도 뇌물을 챙겼다.
이에 세종은 숙공궁주 김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후궁 :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 ??~1433
궁인으로 입궁하여 1407년 11월에 옹주에 봉해졌다.
후궁 : 후궁 고씨, 후궁 최씨(崔氏)
4대 세종 도 (世宗 祹 1397-1450)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
1395(태조 4)∼1446(세종 28). 조선 제4대왕 세종의 비. 성은 심씨(沈氏).
본관은 청송(靑松). 문하시중 덕부(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온(溫)의 딸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 도 (祹)와 가례(嘉禮)를 올려 빈(嬪)이 되고, 경숙옹주
(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개봉(改封)되고, 이듬해 4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敬嬪)에 봉해졌으며, 같은해 9월에 내선 (內禪)을 받아 즉위
하니 12월에 왕후로 봉하여 공비(恭妃)라 일컬었다.
그러나 1432년(세종 14)에 중궁(中宮)에게 미칭(美稱)을 올리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여 1432년에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한 뒤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청이 군국대사를 상왕 (上王: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일로 대역(大逆)의 옥사
(獄事)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일로 폐비의 논의가 있었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되었다.
1446년에 52세로 죽자 헌릉(獻陵)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으로
이장하였다. 《영릉지 英陵誌》를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가 제술하였다.
휘호는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는 소헌(昭憲)이다.
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신빈 김씨(愼嬪 金氏), 혜빈 양씨(惠嬪 楊氏)
숙원 이씨(淑媛 李氏), 상침 송씨(尙寢 宋氏), 소용 정씨(昭容 鄭氏)
장의궁주 박씨(莊懿宮主 朴氏), 명의궁주 최씨(明懿宮主 崔氏)
5대 문종 휘 (文宗 徽1414-1452)
왕비 :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태종 18)∼1441(세종 23).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 안동권씨(安東權氏)로,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전(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선임되어 승휘(承徽)에 오르고, 1433년경 양원(良媛)에
진봉되었으며, 1437년 종부시소윤 봉려(奉礪)의 딸 순빈(純嬪)이 부덕하여 폐빈된 뒤
세자빈이 되었다.
1441년 원손(元孫:뒤의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죽었다. 같은해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고, 경기도 안산군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예장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현덕왕후에 추숭(追崇)되고, 혼전호(魂殿號)는 경희전(景禧殿),
능호는 소릉(昭陵)이라고 각각 명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으며, 1454년
인효순혜(仁孝順惠)의 존호가 추상되고, 같은해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와 동생 자신(自愼)이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복주되면서 아버지 전이 추폐(追廢)되어 서민이 되었고,
아들 노산군(魯山君)이 종사에 득죄하여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는데, “그 어미 된
자가 왕후의 명호를 유지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추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개장하여야
한다.”는 의정부의 계(啓)에 따라 폐위되고,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평민의 예로
개장되었다.
1471년(성종 2) 남효온(南孝溫)이 추복(追復)을 건의하였고, 1495년(연산군1)
대사간 김극뉵(金克#유02), 사간 이의무(李宜茂), 헌납 김일손(金馹孫) 등이 현덕왕후
의 추복을 헌의(獻議)하였으며, 1512년(중종 7) 주강(晝講)석상에서 경연검토관
소세양(蘇世讓)의 추복건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종묘에 벼락이 침을 계기로 재차 논의가 되면서 전교(傳敎)로 추복되어 현릉
동쪽에 천장(遷葬), 신주가 종묘 문종실(文宗室)에 봉안되었다. 친가(親家)에도
1699년(숙종 25) 단종이 부묘(祔廟)되면서 신원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고, 소생으로는
단종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시집간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있다.
후궁 : (폐)휘빈 김씨(徽嬪 金氏), (폐)순빈 봉씨(純嬪 奉氏)
후궁 : 숙빈 홍씨(淑嬪 洪氏)
생몰년 미상. 조선 문종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
한성부윤 심(深)의 딸이며, 좌의정 응(應)의 누이이다.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후궁으로 세자궁에 들어갔다가 1431년(세종 13)에 같은 후궁인
권씨·정씨 등과 함께 승휘(承徽)에 봉해졌다. 두 차례 세자빈을 폐한 사건이 있은 뒤,
권씨가 세자빈에 올랐으나 일찍 죽자, 홍씨는 내궁을 주관하게 되었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는 귀인(貴人)에 올랐다.
그뒤 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한 뒤에는 숙빈에 봉해져 단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딸이 하나 있었으나 1444년 4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후궁 : 숙의 문씨(淑儀 文氏), 소훈 윤씨(昭訓 尹氏), 사칙 양씨(司則 楊氏)
궁인 정씨(鄭氏), 궁인 장씨(張氏), 궁인 문씨(文氏), 궁인 권씨(權氏)
6대 단종 홍위 (端宗 弘暐 1452-1455)
왕비 :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세종 22)∼1521(중종 16). 조선 제6대왕 단종의 정비.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사 계생(繼生)의 증손녀이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복원(復元)의 손녀이며, 판돈녕부사 현수(玹壽)의 딸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있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
이라 하여 1453년(단종 1)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하여졌으나,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으로 1457년
(세조 3)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다시 정순왕후로 추복, 신위가
창경궁에 옮겨졌다. 능은 사릉(思陵)이며,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다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숙의 권씨(淑儀 權氏)
7대 세조 유 (世祖 瑈 1455-1468)
왕비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
418(태종 18)∼1483(성종 14). 조선 제7대왕 세조의 비(妃). 본관은 파평(坡平).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이다.
1418년(태종 18)홍주 군아(郡衙)에서 태어나 1428년(세종 10)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김종서(金宗瑞)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 때
용병(用兵)이 누설되어 손석손(孫碩孫)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 1)왕비에 책봉되었고,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으며,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 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을 가상하였다.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이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예종의 형)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뒤의 성종)이 즉일로 즉위하였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어렸고, 또 성종에게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는데도 즉일로 즉위하게 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성종 또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이나 섭정을 계속하였다.
1483년 3월 30일 온양에 있다가 행궁에서 죽으니 수가 66세였다.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능은 양주에 있는 광릉(光陵: 세조의 능에서 동편 언덕 丑坐)이며,
6월 12일에 장사하였다.
후궁 : 근빈 박씨(謹嬪 朴氏), 소용 박씨(昭容 朴氏)
8대 예종 광 (睿宗 1468-1469)
왕비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1445(세종 27)∼1461(세조 7). 조선조 제8대 예종의 비.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자헌대부 삼사좌복야 문열공(資憲大夫三司左僕射文烈公)
상질(尙質)의 증손녀이고, 영의정부사 기(起)의 손녀이며, 아버지는 상당부원군 영의정
(上黨府院君領議政) 명회(明澮)이고, 어머니는 고려의 문하시중 민지(閔漬)의 5대손인
가정대부 한성부윤(嘉靖大夫漢城府尹) 대생(大生)의 딸이다.
내외가가 당대의 문벌인 가문에서 태어난 한씨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1460년(세조 6)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461년 원손(元孫:仁城大君)을 낳은 뒤 병으로 인하여 녹사
(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요절하였다.
1472년(성종 3)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능은 공릉(恭陵)이며, 파주 남쪽 보시동
(普施洞)에 있다.
계비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98)
?∼1498(연산군4). 조선 제8대왕 예종의 계비. 본관은 청주한씨(淸州韓氏).
청주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1460년(세조 6)에 한명회(韓明澮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사하였므로 1462년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여 1471년(성종 2)에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다. 1497년(연산군 3)에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가 있었으니, 제안대군은 특히
효성이 지극하였다.
능은 창릉(昌陵)으로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오릉(西五陵)묘역에 예종과 합장하였다.
후궁 : 후궁 기씨
* [추존] 덕종(德宗)
왕비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비(妃).
성은 한씨 (韓氏). 본관은 청주(淸州). 서원부원군 확(確)의 딸이며, 좌리공신
(佐理功臣) 치인 (致仁)의 누이동생이다.
1455년(세조 1)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粹嬪)에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횡사함.
1470년(성종 1) 소생 혈(娎)이 성종에 즉위하여 세자로서 죽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자 왕후에 책봉되고, 이어서 인수대비 (仁粹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이 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하였다. 불경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하였고 부녀자를 위하여 지켜야 할 도리인 《내훈 內訓》을
간행,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손자 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에 의하여 폐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박해를 가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대비가 이를 꾸짖으니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
를 받아 얼마 후 절명하였다. 능은 경릉 (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西五陵)에 덕종과 합장되어 있다.
후궁 : 귀인 권씨(貴人 權氏), 숙의 신씨(淑儀 愼氏), 후궁 윤씨(尹氏)
9대 성종 혈 (成宗 諱 1469-1494. 추존 덕종과 인수대비 한씨의 차자)
왕비 :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1474)
1456(세조 2)∼1474(성종 5). 조선 성종의 비. 본관은 청주(淸州).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에 가례를 올렸으며,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74년 소생이 없이 죽자 ‘공혜(恭惠)’
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그뒤 1498년(연산군 4)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가
올려졌다.
능호는 순릉(順陵)이며 파주에 있다. 종묘에 봉안되었다.
폐후 : 제헌왕후 윤씨(齊獻王后 尹氏 ?~1482)
폐비윤씨는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지고, 1476년 왕비에 책봉되고 세자 융(提:연산군)을 낳았다. 투기가 심한 그녀는
왕비가 된 후에도 국모(國母)답지 않게 투기하여, 1477년 비상(砒霜)을 숨겨둔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왕과 그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빈(嬪)으로 강등
될 뻔한 수모를 겪었다. 1479년에는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진노를 사서 폐비되었다.
이후 세자가 장성함에 따라 폐비윤씨의 처우문제가 쟁점화되면서 여론도 폐비에 대한
동정론으로 기울어갔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성종은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臺諫)을 모아 폐비윤씨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 논의에서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로 하여금 사사하게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왕이 된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사사된 것을 알고 폐비의 신원을 모색
하였으며, 1497(연산군 3)년 “폐비의 추숭(推崇)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를
무시하고 개장(改葬)한 후 효사(孝思)라는 묘호(廟號)와 회(懷)라는 묘호(墓號)가
추봉되고 다시 제헌왕후(齊憲王后)에 추숭되었을 뿐만 아니라, 묘도 회릉(懷陵)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다시 관작이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계비 :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1530)
1462(세조 7)∼1530(중종 25). 조선 제9대왕 성종의 계비. 성은 윤씨(尹氏).
본관은 파평(坡平).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호(濠)의 딸이다.
신창(新昌) 공아(公衙)에서 출생하여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해졌고, 1479년 6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에 왕비로 봉하여졌다. 1497년(연산군 3)에 자순(慈順),
1504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1530년(중종 25) 8월 경복궁에서 죽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휘호는 소의흠숙(昭懿欽淑), 시호는 정현(貞顯), 능호는 선릉(宣陵)이다.
후궁 : 명빈 김씨(明嬪 金氏), 귀인 정씨(貴人 鄭氏), 귀인 엄씨(貴人 嚴氏)
귀인 권씨(貴人 權氏), 숙의 하씨(淑儀 河氏), 숙의 홍씨(淑儀 洪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숙용 심씨(淑容 沈氏), 숙용 권씨(淑容 權氏)
후궁 남씨(南氏)
10대 연산군 융 (燕山君 1476-1506)
부인 : 거창군부인 신씨(居昌君婦人 愼氏)
숙의 이씨(淑儀 李氏), 숙의 윤씨(淑儀 尹氏), 숙의 곽씨(淑儀 郭氏)
숙의 권씨(淑儀 權氏), 숙의 민씨(淑儀 閔氏), 숙용 장씨(淑容 張氏)
숙원 전씨(淑媛 田氏), 숙원 최씨(淑媛 崔氏), 후궁 정금(鄭今)
11대 중종 역 (中宗 懌 1506-1544)
왕비 :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 1487~1557)
성은 신씨(愼氏). 본관 거창(居昌).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수근(守勤)의 딸이다.
1499년(연산군 5)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그와 결혼하여 부부인
(府夫人)에 책봉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燕山君)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성희안
(成希顔) 등의 반정추진파(反正推進派)에 의하여 살해당했으므로, 역적의 딸이라 하여
단경왕후도 폐위(廢位)되었다. 중종은 왕후를 폐위할 생각이 없었으나 당시의 형편
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신왕후(愼王后)에게는 소생도 없었으며, 폐위된 후에는
본가(本家)로 쫓겨났다. 1739년(영조 15)에 다시 왕후로 복위(復位)되었다.
계비 :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
1491(성종 22)∼1515(중종 10). 조선 제11대왕 중종의 제1계비.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영돈녕부사 여필(汝弼)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 7월에 호현방(好賢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
(月山大君)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에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지고 1507년(중종 2)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손위(遜位)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인종)를 낳은 뒤 그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경복궁 별전(別殿)
에서 죽었다. 휘호(徽號)는 숙신명혜(淑愼明惠)이며, 1547년(명종 2)에 선소의숙
(宣昭懿淑)이라 추상되었다.
1남1녀를 두었다. 시호는 장경(章敬), 능호는 희릉(禧陵)이다.
계비 :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
1501(연산군 7)∼1565(명종 20). 조선 중종의 계비(繼妃). 본관은 파평(坡平).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동안
동생인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에게 정권을 쥐게 한 결과 인종의 외척인 대윤
(大尹) 윤임(尹任) 일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원로(尹元老)를 해남
(海南)으로 귀양보내고 윤임 등을 사사하였다.
승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불교의 부흥을 꾀하여 1550년(명종 5) 선교(禪敎) 양종
(兩宗)을 부활시키고 승과·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실시하였고, 중종의 능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이장시켰다.
1553년 국정을 왕에게 맡겼으나 실질적인 대권은 계속 장악하여 윤원형 등 친척에게
정사를 좌우하게 하였다. 소생은 명종·의혜공주(懿惠公主)·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인순공주(仁順公主) 등 1남4녀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후궁 : 경빈 박씨(敬嬪 朴氏)
?∼1533(중종 28). 조선 중종의 후궁.
1509년(중종 4)에 왕자 복성군 미(福城君嵋)를 낳았고, 그뒤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혜정옹주(惠靜翁主)를 낳아 왕의 총애를 받았다.
1527년에 효혜공주(孝惠公主)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아버지 안로
(安老)의 사주를 받아, 왕세자(후의 인종)를 저주하기 위하여 꾸민 작서(灼鼠)의 변에
연루되어, 1528년(중종 23)복성군과 함께 폐출되어 곧 사사되었다.
그 뒤에 신원되었다.
후궁 : 희빈 홍씨(熙嬪 洪氏)
1494(성종 25)∼1581(선조 14).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
중종반정 때 공로를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 홍경주(洪景舟)의 딸이다.
처음에는 정국공신들의 신분보장을 위하여 정략적인 뜻에 따라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뒤에도 왕의 총애를 사서 아버지의 권세를 뒷받침하고 궁중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사건까지도 탐사하여 아버지에게 알림으로써 사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특히, 훈구파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새로이 정계에 등장하는 사림파(士林派)의
제거에 앞장섰다. 특히, 혁신정책을 주장하여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고집하면서
전국 사림의 영수가 되어 국가의 기강을 진작시키려는 조광조(趙光祖) 일당 제거의
배후활동에 앞장섰다.
훈구파는 사림파들이 곧고 바르게 행동하면서 정치의 혁신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등 제거할 구실을 제공하지 않자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네 글자를
꿀로 써서 벌레가 먹게 해서 모함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여해(尹汝諧)·유희령(柳希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대간들로부터
심한 탄핵을 받았으나 선왕의 총애를 생각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소생으로는 금원군 영(錦原君)과 봉성군 완(鳳城君岏)이 있다.
후궁 : 창빈 안씨(昌嬪 安氏)
창빈은 1499년(연산군 5)에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始興)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질과 용모가 뛰어나 1507년(중종 2)에 궁녀로 들어갔다. 행동이 정숙
하고 단정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후의로 31세에 숙원(淑媛),
이어서 숙용(淑容)에 올랐으며 자비로운 성품으로 덕망이 높았다. 중종과의 사이에
영양군(永陽君)과 덕흥대원군(德興大阮君), 정신옹주(靜愼翁主)를 두었다.
후궁 : 귀인 한씨(貴人 韓氏), 숙의 홍씨(淑儀 洪氏)
숙의 이씨(淑儀 李氏), 숙의 나씨(淑儀 羅氏), 숙원 이씨(淑媛 李氏)
숙원 김씨(淑媛 金氏)
12대 인종 호 (仁宗 1515-1545)
왕비 :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
1514(중종 9)∼1577(선조 10). 조선 제12대왕 인종의 비. 본관은 반남(潘南).
성은 박씨(朴氏).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용(墉)의 딸이다.
1524년(중종19)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존호는 공의(恭懿)·효순(孝順)이며, 전호(殿號)는 효모(孝慕)이다.
슬하에 태생이 없었다. 능은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에 있다.
후궁 : 숙빈 윤씨(淑嬪 尹氏), 귀인 정씨(貴人 鄭氏)
13대 명종 환 (明宗 1534-1567)
왕비 :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
1532(중종 27)∼1575(선조 8). 조선 명종의 비.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영의정 연원(連源)의 손녀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딸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551년에 순회세자
(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4세로 일찍 죽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1569년(선조 2)에 존호(尊號)
의성(懿聖)이 진상되었으며, 1575년에 창경궁에서 44세를 일기로 죽었다. 휘호는
선열(宣烈), 능은 강릉(康陵:楊州 소재)이다.
후궁 : 순빈 이씨(淳嬪 李氏), 숙의 이씨(淑儀 李氏), 숙의 신씨(淑儀 申氏)
숙의 신씨(淑儀 申氏), 숙의 정씨(淑儀 鄭氏), 숙의 정씨(淑儀 鄭氏)
숙의 한씨(淑儀 韓氏)
*** 11대 중종 + 창빈 안씨(昌嬪 安氏)
덕흥대원군 초(德興大院君 岹) +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덕흥대원군의 자녀] 3남 1녀
하원군 정(河原君) : 부인 남양홍씨+신안이씨
하릉군 인(河陵君) : 금원군 영의 양자로 입적
하성군 균(河城君 鈞) :: 11대 선조
14대 선조 균 (宣祖 鈞 1567-1608.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군의 3남)
왕비 :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1555(명종 10)∼1600(선조 33). 조선 제14대왕 선조의 비. 본관은 반남(潘南).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1590년 장성왕후
(章聖王后)의 존호를 받았다.
죽은 뒤 1604년 휘열(徽烈), 1610년(광해군 2) 정헌(貞憲)의 존호가 가상(加上)
되었다. 소생은 없고, 능호는 목릉(穆陵)이다.
계비 :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
1584(선조 17)∼1632(인조 10). 조선 선조의 계비.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제남(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
(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
(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
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 《보문경 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跡) 첩(帖)이 남아 있다. 존호는 소성정의명렬(昭聖貞懿明烈)
이고, 휘호는 광숙장정(光淑莊定)이며, 능은 목릉(穆陵)으로 양주에 있다.
후궁 : 공빈 김씨(恭嬪 金氏)
인빈 김씨(仁嬪 金氏)
1555(명종 10)∼1613(광해군 5). 조선 선조의 후궁. 본관은 수원(水原).
아버지는 감찰 한우(漢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이효성(李孝性)의 딸
이다.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淑儀李氏)의 외종(外從)으로 궁중에서 자라났는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보고 기특히 여겨 선조에게 부탁하여 후궁으로
두게 하였다. 이때 나이 14세였다.
후궁 가운데에서 가장 왕의 총애를 받아 정원군(定遠君:元宗)을 포함,
4남5녀를 두었다.
영조 때 시호를 경혜(敬惠), 궁을 저경(儲慶), 무덤을 순강원(順康園, 楊州 소재)
으로 정하였다.
후궁 : 순빈 김씨(順嬪 金氏), 정빈 민씨(靜嬪 閔氏), 정빈 홍씨(貞嬪 洪氏)
온빈 한씨(溫嬪 韓氏), 귀인 정씨(貴人 鄭氏)
15대 광해군 혼 (光海君 琿 1575-1641)
부인 : 문성군부인 유씨(文成郡夫人 柳氏)
숙의 윤씨(淑儀 尹氏), 숙의 허씨(淑儀 許氏)
숙의 홍씨(淑儀 洪氏), 숙의 권씨(淑儀 權氏)
숙의 원씨(淑儀 元氏), 소용 임씨(昭容 任氏)
소용 정씨(昭容 鄭氏), 숙원 심씨(淑媛 沈氏)
후궁 조씨(趙氏)
(추존) 원종 부(元宗 譜)
왕비 :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선조 11)∼1626(인조 4). 조선 원종(元宗:추존)의 비.
성은 구씨(具氏). 본관은 능성(綾城). 좌찬성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사맹(思孟)의
딸이며, 인조의 어머니이다.
1590년(선조 23) 선조의 다섯째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
(連珠郡夫人)으로 봉하여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封)되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 10) 이조판서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인조를 비롯, 능원대군(綾原大君)·능창대군(綾昌大君)을 낳았다. 능호는 장릉(章陵)
으로 김포에 있다.
후궁 : 후궁 김씨(金氏)
16대 인조 종 (仁祖 倧 1623-1649, 선조와 인빈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장남)
왕비 :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1594(선조 27)∼1635(인조 13). 조선 인조의 비.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영돈녕부사 준겸(浚謙)의 딸이다.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으로 봉하여지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휘호를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추상하였으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효종·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이다.
능(陵)은 장릉(長陵)으로 처음 파주 운천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영조 7) 교하로
이장하였다.
계비 :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1688)
1624(인조 2)∼1688(숙종 14).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繼妃).
본관은 양주(楊州). 아버지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대사간 철견(鐵堅)의 딸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어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義洞本宮)에서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1년(효종 2) 자의(慈懿)의 존호받음.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가 되고, 그가 입어야 할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정치문제
화되어 당시 집권파인 서인이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이듬해인 1660년(현종 1) 남인 허목(許穆) 등이 그의 복상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
하며 서인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고 인조의 둘째 왕자이므로 계모인 그의 복상은 기년설이 옳다고 계속 주장하였고,
이에 남인 윤휴(尹鑴)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끝내 기년설을 고집하여 기년복은 그대로 지켜지고,
서인의 세력이 더욱 공고히 되었다.
그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仁宣大妃張氏)가 죽자 다시 서인·남인간에
그의 복상문제가 재연되어 서인은 대공설(大功說)을, 남인은 기년설을 각각 주장하였는
데, 이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정권이 성립되는 계기
가 되었다. 1661년 공신(恭愼), 1676년(숙종 2) 휘헌(徽獻),
1686년 강인(康仁)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64세를 일기로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죽었으며, 자녀는 없다.
능은 휘릉(徽陵)이다.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숙의 나씨(淑儀 羅氏), 숙의 박씨(淑儀 朴氏)
17대 효종 호 (孝宗 淏 1649-1659)
왕비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
1618(광해군 10)∼1674(현종 15). 조선 제17대왕 효종의 정비. 성은 장씨(張氏).
본관은 덕수(德水). 아버지는 우의정 유(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으로 간택되어 다음해에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하여졌다.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따라가 8년
간이나 머물면서 많은 뒷바라지를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가 죽으면서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을 제때 받지 못하여 사저(私邸)에서 왕자를 낳게 되었다.
그뒤 책봉되어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2년 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왕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오래 신고하다 회상전(會祥殿)에서 죽었다.
이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조비 조대비(趙大妃)가 어떤 복(服)을 입느냐 하는 예송
(禮訟)이 일어나, 기년복(朞年服)·대공복(大功服)을 둘러싸고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의 대립이 크게 일어났다.
소생은 1남 5녀로 현종,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숙정(淑靜)·숙경(淑敬) 등
공주이다. 경렬명헌(敬烈明獻)의 휘호(徽號)가 올려졌다. 능은 여주의 영릉(寧陵)이다.
후궁 : 안빈 이씨(安嬪 李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숙원 정씨(淑媛 鄭氏)
18대 현종 연 (顯宗 棩 1659-1674)
왕비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1683)
1642(인조 20)∼1683(숙종 9). 조선 중기 현종의 왕비. 본관은 청풍(淸風).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서울 중부 장통방
(長通坊)에서 출생하였다.
1651년(효종 2)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사저)에서 가례(嘉禮)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년) 왕비에 책립되고, 1683년 12월 5일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
에서 42세로 죽었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675년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에는 대신들 앞에 나와 울부짖는 등 불미한 일이
많았다. 능은 숭릉(崇陵:경기도 양주군 동구릉 경내 현종과의 합장릉)이다.
숙종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공주를 낳았다. 명선·명혜공주는 일찍 죽고,
명안공주는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19대 숙종 순 (肅宗 焞 1674-1720)
왕비 :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1661(현종 2)∼1680(숙종 6). 조선조 숙종의 정비.
광주김씨(光州金氏)로, 장생(長生)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딸이다.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義洞) 별궁(別宮)에
들어 갔고, 다음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 정식으로 왕비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 痘患)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왕은 창덕궁
(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왕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에서 죽었다.
경덕궁 영소전(永昭殿)에 위패가 모셔졌고, 능은 고양에 있는 익릉(翼陵)이다.
소생으로 두 딸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1713년 존호(尊號) 광렬(光烈)이 올려졌고, 1722년(경종 2) 휘호(徽號) 효장명현
(孝莊明顯)이, 1753년(영조 29) 존호 선목(宣穆)이, 1776년 존호 혜성(惠聖)이 각각
올려졌다.
계비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1667(현종 8)∼1701(숙종 27). 숙종의 계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준길(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균(昒: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에 숙종이 왕자 균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本宅: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黯)·
김덕원(金德遠)·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
었다. 그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
이다. 한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계비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1687(숙종 13)∼1757(영조 33). 조선 숙종의 둘째 계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이조판서 남중(南重)의 3대손이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柱臣)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로 있으면서 1722년(경종 2) 자경(慈敬), 1726년(영조 2)
헌열(獻烈), 1740년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 강성(康聖), 1751년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 영복(永福), 1756년 융화(隆化) 등의 존호(尊號)가 올려
졌다. 사후에 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이 올려졌다. 소생은 없고 능은 경기도
고양의 명릉(明陵)이다.
후궁 : 희빈 장씨(嬉嬪 張氏)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당시 소의(昭儀)였던 장씨와 가까이 하여
왕자 균(昀:景宗)을 낳자, 1689년(숙종 15) 1월 균을 세자로 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
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권대운(權大運) 등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한 바 있던 숙종이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된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張希載)
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후궁 : 숙빈 최씨(淑嬪 崔氏), 명빈 박씨(명嬪 朴氏), 영빈 김씨(寧嬪 金氏)
귀인 김씨(貴人 金氏), 소의 유씨(昭儀 劉氏)
20대 경종 윤 (景宗 昀 1720-1724)
왕비 :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1718)
1686(숙종 12)∼1718(숙종 44). 조선 제20대왕인 경종의 비. 본관은 청송(靑松).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리지만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다. 전호(殿號)는 영휘(永徽)라 하였으며,
1726년 공효정목(恭孝定穆)이라는 휘호가 추상되었다. 능은 혜릉(惠陵)으로 양주에
있으며, 시호는 단의(端懿)이다.
계비 :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
1705(숙종 31)∼1730(영조 6). 조선 경종의 계비(繼妃). 본관은 함종(咸從).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다.
1718년(숙종 44) 14세에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올렸고,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1722년(경종 2) 왕비책봉에 백관의 축하를 받았으며, 1726년(영조 2) 경순왕대비
(敬純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1730년 죽자 시호를 선의(宣懿)라 하고 휘호(徽號)를 효인혜목(孝仁惠穆)이라 하였다.
매사에 익숙하였고 온유하였으며 소생은 없다.
지문(誌文)은 판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능은 의릉(懿陵:楊州)이다.
21대 영조 금 (英祖 昑 1724-1776)
왕비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1692(숙종 18)∼1757(영조 33). 조선 제21대왕 영조의 원비(元妃).
달성서씨(達城徐氏).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종제(宗悌)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延礽君)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世弟)
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의 즉위에 따라 왕비에 진봉
되었다.
1740년(영조 16) 혜경(惠敬)이라는 존호가 올려진 뒤 생전에 장신(莊愼)·강선(康宣)
등이 덧붙여졌고, 죽은 뒤 1772년 공익(恭翼)이 추존되고, 인휘(仁徽)·소헌(昭獻)이
추상되어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이라는 존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1778년(정조 2)
휘호로 단목장화(端穆章和)가 올려졌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고양에 있는 홍릉(弘陵)이다.
계비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
1745(영조 21)∼1805(순조 5). 영조의 계비(繼妃).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황후 서씨(貞聖王后徐氏)가 죽자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가례를 행하고, 1772년에는 예순(睿順)을 비롯하여 성철(聖哲)·명선(明宣)·융인
(隆仁)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지만 사도세자와의 사이에 틈이 생겨 참소가 심하더니,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나언경(羅彦景)이 사도세자의 부도덕과 비행을 상소하자 서인(庶人)으로 폐위
시켜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그뒤 당쟁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벽파(僻派)를
항상 옹호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인 공서파(攻西派) 등과 결탁,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 등의 신서파
(信西派)를 모함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형제는 전라도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으로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호는 정순(貞純)이며,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후궁 : 정빈 이씨(靖嬪 李氏)
영빈 이씨(暎嬪 李氏)
?∼1764(영조 40). 조선 영조의 후궁. 사도세자(思悼世子:莊獻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당하는 와중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1764년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장례하게 하였고, 이듬해 시호로
의열(義烈)을 추증하면서 친히 선시지례(宣諡之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궁인 조씨(宮人 趙氏), 숙의 문씨(淑儀 文氏)
* [추존] 진종(眞宗)
왕비 :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
1715(숙종 41)∼1751(영조 27).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조선 진종(眞宗:追尊王孝章世子)의 비(妃).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좌의정
문명(文命)의 딸이다.
1727년(영조 3) 세자빈에 간택되어 효장세자(孝章世子)와 가례(嘉禮)를 올리고,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하여졌다.
소생은 없었으나 죽은 뒤 1752년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76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남(뒤의 정조)을 입양받아 승통세자빈(承統世子嬪)의
호를 받았다가, 정조의 즉위로 왕비로 추존되었다. 능은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영릉(永陵)이다.
* [추존] 장조(莊祖)
왕비 :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영조 11)∼1815(순조 15).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思悼世子)의
비(妃). 본관은 풍산(豊山).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15년 12월(순조 15) 헌경왕후, 1899년(고종 36) 의황후(懿皇后)에 추존됨.
당시 왕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경의왕후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뒤 1795년 남편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책이 유명한 〈한중록 恨中錄〉이며,
그것은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후궁 : 숙빈 임씨(淑嬪 林氏), 경빈 박씨(景嬪 朴氏), 양제 가선(良)
22대 정조 산 (正祖 祘 1776-1800.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차자)
왕비 : 효의왕후 김씨(孝懿皇后 金氏 1753~1821)
1753(영조 29)∼1821(순조 2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비(妃).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아버지는 좌참찬·증영의정 시묵(時默)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南陽洪氏)로 증찬성 상언(商彦)의 딸이다. 한성부 가회방(嘉會坊)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
(嘉禮)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進封)됨.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和緩翁主)가 그를 몹시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청연(淸衍)·청선(淸璿)두 군주(郡主)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청선군주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 하였고,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성품이 개결(介潔)하고 사정에 흐르지 않아서 사가(私家)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경계
하여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화(宮貨)는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물화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
하였다. 휘호(徽號)는 예경자수(睿敬慈粹)이고, 시호는 효의(孝懿)이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健陵)이다.
후궁 : 의빈 성씨(宜嬪 成氏)
미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다. 정조의 눈에 들어 1782년(정조 6)
소용(昭容)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문효세자를 낳아 세자책봉과 동시에 의빈으로
진봉되었다. 왕손이 귀한 왕가에서 세자를 낳아 왕가를 번창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궁중상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왕가의 기대도 보람없이 문효세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아들의
죽음을 상심하여 나날을 보내다가 1786년 딸을 낳은 뒤 산후가 좋지 못하여 곧
죽었다. 옹주도 일찍 죽어서 그 후손은 전하지 않는다.
후궁 :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영조 46)∼1822(순조 22). 조선시대 순조의 생모.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좌찬성 준원(準源)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이다.
그가 잉태될 때 어머니 원부인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 구슬을 바치매 그 광채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다. 어릴 때 두 여형(女兄)과 함께 있었더니 별안간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두 여형은 놀라서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조용히 걸어가서 방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의 빈이 되어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왕자를 낳은 뒤 왕자를 낳지 못하는 왕비를 위로하고 공경하니 온 궁중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또한, 행실이 착하고 예절이 바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말이 적으며 의복과
일상용품들을 극히 검소하게 하니 조야에서 현빈(賢嬪)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느날 그의 궁에서 시중을 드는 나인(內人)이 의복을 만들 때 작은 천조각을 버렸다가
크게 꾸중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또한 후궁인 그의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은밀히 귀중품을 진상하였다가 의금부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죽었다.
궁호(宮號)는 가순(嘉順), 시호는 현목(顯穆), 원호(園號:무덤의 명칭)는 휘경(徽慶)이
며, 효자동 경우궁(景祐宮:七宮內)에 제향되었다.
후궁 : 원빈 홍씨(元嬪 洪氏), 화빈 윤씨(和嬪 尹氏)
23대 순조 공 (純祖 玜 1790-1834)
왕비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1857)
1789(정조 13)∼1857(철종 8). 조선 순조의 비.
익종의 어머니이며, 안동김씨(安東金氏)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의 딸.
1800년(정조 24)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순조 2)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삼간택문제를 놓고 시 · 벽파(時僻派)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서 당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관주(金觀柱)와 권유(權裕)들의 방해
움직임이 있었다.
1827년 존호 명경(明敬)이 올려졌고 헌종연간에 왕대비 · 대왕대비에 진호(進號)
되었으며, 그뒤 문인(文仁) · 광성(光聖) · 융희(隆禧) · 정렬(正烈) · 선휘(宣徽) ·
영덕(英德) 등의 존호가 더해졌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원상(院相)에 권돈인(權敦仁)을 지명하고,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하여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광01)의 셋째아들을 지목
하여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51년(철종 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함으로써,
그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자헌(慈獻)·현륜(顯倫)·홍화(洪化)·신운(神運) 등의
존호가 뒤에 추상되었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의 세 공주가 있으며,
능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인릉(仁陵)이다.
《순원왕후어필봉서 純元王后御筆封書》가 전한다.
후궁 : 숙의 박씨(淑儀 朴氏)
*(추존) 익종(翼宗) + 왕비 : 신정왕후 조씨(神貞皇后 趙氏)
1808(순조 8)∼1890(고종 27). 익종의 비(妃). 풍양조씨(豊壤趙氏). 헌종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풍은부원군 만영(萬永)이며,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인 목사 시연(時淵)
의 딸이다. 12세 때 익종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순조 27)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로되고,
1857년(철종 8) 순조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로 되었다.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도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은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가 쥐게 되었다. 그전부터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및 조카인 조성하(趙成夏)와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즉각적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한,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뒤에
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66년(고종 3) 2월까지 계속 수렴청정을 하며 관리 탐학의 방지, 진휼(賑恤), 황해도
도장(導掌) 폐해의 엄금(明禮宮 토지가 그곳에 많아 항상 대왕대비의 측근이 황해감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공폐(貢弊)의 제거 등을 하였다고 하지만, 실제의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한 바가 있다.
고종은 민비(閔妃)가 정치에 참여하기 이전까지 효도를 다하였으나, 그뒤 민비의 질투를
두려워 한 대왕대비가 고종을 피하였다.
또한, 친정세력들을 대거 기용하였지만, 그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가문이 쇠락
해지자 슬퍼하였다. 더욱이,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24대 헌종 환 (憲宗 奐 1834-1849. 추존 익종과 신정왕후 조씨의 장자)
왕비 : 효현왕후 김씨(孝顯皇后 金氏 1828~1843)
1828(순조 28)∼1843(헌종 9). 조선 제24대왕 헌종의 비(妃).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영돈녕부사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조근(祖根)의 딸이다.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嘉禮)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1851년(철종 2) 경혜(敬惠)·정순(靖順)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端聖)·
수원(粹元)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은 경릉(景陵)이다.
계비 : 효정왕후 홍씨(孝定皇后 洪氏 1831~1903)
1831(순조 31)∼1903. 조선 헌종의 계비(繼妃).남양홍씨(南陽洪氏) 판돈녕부사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재룡(在龍)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왕비가 되었고,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왕대비가(王大妃)가 되었다.
딸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경릉(景陵)이다.
후궁 : 경빈 김씨(慶嬪 金氏), 정빈 윤씨(貞嬪 尹氏), 숙의 김씨(淑儀 金氏)
*** 장조(莊祖) + 숙빈 임씨
3남 은언군(恩彦君)의 자녀
* 상계군 담(常溪君 湛)
* 풍계군 당(豊溪君 塘) :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
*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 壙) +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
-> 회평군 명(懷平君 明) : 최씨生
영평군 경응(永平君 景應) : 최씨生
덕완군 원범(德完君 元範) : 용성부대부인生, 25대 철종
25대 철종 원범 (哲宗 元範 1849-1863. 사도세자의 서자의 자손)
왕비 : 철인왕후 김씨(哲仁皇后 金氏 1837~1878)
1837(헌종 3)∼1878(고종 15). 조선 제25대왕 철종의 비(妃). 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문근(汶根)이며, 어머니는 이용수(李龍秀)
의 딸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의 근친으로 1851년(철종 2) 왕비에 책봉
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1863년 명순(明純)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66년(고종 3) 휘성(徽聖)에 이어 정원(正元), 1873년에는 다시 수령(粹寧)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년 창경원 양화당(養和堂)에서 죽었다. 순조 때부터 이어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가 왕비로 된 이후 절정에 달하였다.
휘호는 경헌장목(敬獻莊穆)이고, 전호(殿號)는 효휘(孝徽)이다. 묘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西三陵)의 예릉(睿陵)이다.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귀인 조씨(貴人 趙氏)
숙의 방씨(淑儀 方氏), 숙의 범씨(淑儀 范氏)
궁인 김씨(宮人 金氏), 상궁 이씨(宮人 李氏)
상궁 박씨(宮人 朴氏)
*** 장조(莊祖) + 숙빈 임씨
4남 은신군(恩信君)의 자녀
남연군 구(南延君 球)의 자녀
-> 흥녕군 창응(興寧君 昌應)
-> 흥완군 정응(興完君 晸應)
-> 흥인군 최응(興寅君 最應)
-> 흥선대원군 하응(興宣大院君 昰應) +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
자녀 -> 완흥군 재면(完興君 載冕) : 여흥부대부인生
익성군 재황(載翼成君 晃) : 여흥부대부인生, 26대 고종
완응군 재선(完應君 載先) : 계성월生
26대 고종 재황 (高宗 載晃 1863-1907. 영조의 현손)
황후 : 명성왕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
1851(철종 2)∼1895(고종 32).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도 불린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계비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911. 조선 고종의 계비(繼妃). 흔히는 엄비(嚴妃)로 불린다.
일찍이 궁인으로 입궁하여 궁중생활을 하다가 1895년(고종 32)의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明成王后)가 비명에 간 뒤 고종의 총애를 입어 1897년에 고종의 제3자
은(垠)을 낳았다. 1900년 8월에 귀인(貴人)에서 순빈(淳嬪)으로 봉해졌고,
1901년 마침내 고종의 계비로 책립되어 엄비라 불리게 되었으며, 1903년 10월에
황귀비로 진봉되었다.
여성의 근대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906년에 내탕금(內帑金)을 내려 숙명여학교
(淑明女學校)와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개설시켜 여성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당시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던 민병석(閔丙奭)의 제청으로 시호를
순헌으로 정하니 순헌황귀비이다.
이때 궁호(宮號)를 망덕(望德)으로, 능원의 원호(園號)를 영휘(永徽)로 정하였다.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保堂貴人 李氏), 귀인 장씨(貴人 張氏)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 보현당귀인 정씨(普賢堂貴人 鄭氏)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
내인당소의 이씨(內人黨昭儀), 삼축당상궁 김씨(三祝堂尙宮 金氏)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尙宮 金氏), 상궁 염씨(尙宮 廉氏)
상궁 서씨(尙宮 徐氏), 상궁 김씨(尙宮 金氏)
27대 순종 척 (純宗 拓 1874-1910)
황후 :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계후 :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1966)
[출처] [본문스크랩] 조선(朝鮮) 시대 왕비편 |작성자 하영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