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은 선 수행에 관한 열 가지 공부 방법을 말한다.
고려시대 공부십절목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공부십절목과
고려 말 나옹 혜근(懶翁慧根, 1320-1376) 화상의 공부십절목 두 가지가 있었다.
(1) 지눌(知訥) 국사의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
먼저 지눌(知訥) 국사가 제시한 열 가지 공부 방법,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부터 보도록 하자.
지눌 국사는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래 부처인 진심(眞心)을 올바로 드러낼 수 있도록
중국 및 우리나라 조사(祖師)들이 언급했던 참선하는 방법을 집대성해서
열 가지로 구성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가했다.
‘무심(無心)’은 마음 자체가 없음을 무심이라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에 그 무엇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할 뿐이다.
이는 빈 병이라 말할 때, 병 속에 아무것도 없음을 빈 병이라 하니,
병 자체가 없음을 일러 빈 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국사께서 그대는 다만 마음에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하는 일에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은 자연스레 텅 비어 신령하고 고요하면서도 미묘하다고 하니, 이것이 '무심' 의 참뜻이다.
지눌 국사는 열 가지 무심(無心) 공부를 순서에 따라서 차례대로 닦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한 가지만을 택해서 공부를 성취하면 그릇된 마음이 사라지고 진심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자기 근기(根機)와 버릇에 맞추어 선택해서 익혀갈 것을 당부했다. 10 절목의 뜻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각찰(覺察) ― 깨달아 살핀다는 글자의 뜻과는 달리, 생각을 하지 않는 공부이다.
수도자가 처음에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다가 망념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이번에는 망념을 없앴다는 생각, 깨달았다는 생각이 남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없애는 공부를 각찰이라고 한다.
즉,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수도자의 경우 화두만을 생각하고,
망념이 일어날 때는 곧 각찰해서 화두로 돌아가게 하는 수행법이다.
마음을 살펴서 망심을 알아차리는 것이 각찰(覺察)이다.
이는 공부할 때에 평소 망념(생각)을 끊고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서,
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알아차리고 망념(생각)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망념(생각)을 알아차려 없애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망념(생각)을 알아차린 지혜인 각지(覺智)도 쓸 필요가 없게 된다.
망념(생각)과 각지(알아차림)가 다 함께 사라진 상태를 '무심'이라 한다.
➁ 휴헐(休歇) ― 쉬고 쉬는 공부방법이다. 망심도 쉬고 경계도 쉬는 휴헐(休歇)이다
. 이는 공부 할 때에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
마음(망상)이 일어나면 바로 쉬어 버리고,
인연(경계대상)을 만나더라도 바로 쉬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악은 물론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선에도 집착하지 않는 공부이다.
즉, 선⋅악 등 모든 이원화된 생각을 쉴 때 진심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바보같이, 말뚝처럼’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을 쉬는 공부를 강조했다.
③ 민심존경(泯心存境) ― 마음속의 망상을 없애고 경계를 두는 공부로서,
경계는 그대로 둔 채 망심(분별망상)을 없애는 공부이다.
이는 공부를 할 때에 온갖 망념을 함께 쉬는 자리에서,
바깥 경계(외경계)는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헛된 마음(망심)만 쉴 뿐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은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다.
마음속의 망심이 모두 사라지면 대상의 경계가 있다고 해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신라 원효(元曉) 대사는 이러한 공부를 여실수행(如實修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④ 민경존심(泯境存心) ― 망심은 그대로 둔 채 경계를 없애는 공부이다.
즉, 경계만 없애고 마음은 그대로 두는 것이다.
모든 대상 세계가 헛된 것이라고 보고 대상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진심만이 온전하게 남아서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이는 공부할 때 안팎의 모든 경계를 비워 공적하다고 관(觀)하고,
다만 마음 하나만 바로 세워 그대로 두는 것을 말한다.
⑤ 민심민경(泯心泯境) ―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는 공부이다.
마음과 대상을 함께 없애는 것이다. 먼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모든 것이 헛됨을 알아서 경계를 없애고, 다음에 주관적인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없앤다.
이는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경계가 ‘실체가 없는 텅 빈 고요’인 줄 알아채고,
다음에 안으로 그것을 아는 마음조차 없애는 것을 말한다.
이미 안팎의 마음과 대상이 다 함께 고요하면, 끝내는 헛된 마음(망심)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⑥ 존심존경(存心存境) ― 마음도 두고 대상도 두는 공부방법이다.
공부를 할 때 마음이 있을 자리에 가 있고, 경계가 경계의 본자리에
머물러서 각각이 있을 자리에 분명히 있으면, 마음과 경계가
서로 맞서게 되더라도 마음은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경계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지 않으며, 서로가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시비비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망년된 생각이 나지 않아서 진심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⑦ 내외전체(內外全體) ― 안과 밖이 모두 체(體)라고 보는 공부방법이다.
안과 밖이 하나로 전체가 되는 공부이다. 이는 공부 할 때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내 몸과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법이 모두 참마음의 바탕이므로,
텅 빈 듯 맑고 밝아서 털끝만큼도 다를 게 없음을 말한다.
즉, 공부를 할 때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내신외기(內身外器) 등
모든 것이 진심의 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는 공부이다.
⑧ 내외전용(內外全用) ― 안과 밖이 모두 진심의 작용이라고 보는 공부이다.
말하고, 밥 먹고, 옷 입는, 모든 행위는 진심에 근거해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몸을 떠나서 따로 진심의 작용이나 도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공부할 때 모든 안팎의 몸과 마음, 바깥세상의 모든 법 및 움직이고
쓰고 베푸는 모든 일들이 모두 참마음의 미묘한 작용임을 보고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인 내외전용으로 안팎으로 모두가 참마음의 작용임을 아는 것이다.
⑨ 즉체즉용(卽體卽用) ― 체가 곧 용이요, 용이 곧 체임을 깨닫는 공부이다.
공부를 할 때 고요한 진심의 체를 바탕으로 해서 밝게 보는 작용을 잃지 않는 것이다.
즉, 마음을 고요히 했을 때 밝게 보는 작용이 나오고,
밝게 보는 가운데 역시 고요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그렇게 되게 하는 공부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그 본체와 일치해 고요할 뿐 아니라
안으로부터 신령한 광명이 비치도록 하는 공부를 말한다.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공부이다.
이것을 인간의 자성(自性)에 비유하면 자성은 그 자체에 비춤,
즉 지혜의 작용이 함장 돼 있어서 지혜의 작용이 스스로 나타남이다.
⑩ 투출체용(透出體用) ― 체와 용을 함께 표출시키는 공부로서,
안과 밖,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 등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하나의 큰 해탈문(解脫門)으로 만들어서
털끝만큼의 빈틈도 없이 온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참마음의 바탕과 작용이 하나의 생명작용의 본체임을 확실히 알고 쓰는 것이다.
이는 공부 할 때 안팎(내외)과 동서남북을 나누지 않고,
사방팔방이 다만 하나의 큰 해탈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망상으로 샐 틈 없어 조금의 번뇌도 없이 온몸이 참마음과 하나가 되니,
망심이 어느 곳에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지눌 국사는 이 열 가지 공부방법이 모두 무심(無心)공부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인위적으로 애씀이 없이 이루어지는 자연공부(自然功夫)ㆍ무공지공(無功之功)이 돼야 한다고 했다.
즉, 이 공부는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하는 공부이므로, 따로 애를 써야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나옹 혜근(懶翁慧根) 화상의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
고려 후기 선승인 나옹 혜근(懶翁慧根) 화상이 제시한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이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은 불교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 당시의 불교는 오랜 타성과
몽고 지배이후 라마불교의 영향에 의한 세속화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리인식에서 개혁이 시대적인 요청 덕목이었다.
이러한 시대 요청에 부응하는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불교사상 유래가 없는 최대 규모의
승과(僧科)로 공부선(功夫選)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는 요승 신도(辛旽)과의 거리를 두고
공민왕이 친정을 실시함을 선포하는 일종의 정치적 액션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무엇으로 승려들을 점검할 것인가?” 하고 질문하자,
나옹 화상은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을 차례로 질문해 점검하겠다고 답했다.
이때 나옹(懶翁) 화상이 공부선의 주맹(主盟-주관자)으로 임명되면서
나옹은 이후 실질적인 고려불교의 1인자 역할을 구축하게 된다.
이럴 때 나옹이 제시한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은 본래 공부선(功夫選)과 관련해
체계화된 일종의 시제(試題)로서 승려 자질의 판단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공부선장(功夫選場)에서는 시간문제가 있어서 사용되지 못했다.
막상 공부선장에서는 활용되지 못했으나 이후에 공민왕에게 문건으로 제출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나옹의 공부십절목은 나옹의 선사상이 가장 체계적으로
응축돼있는 독창적인 자료이기 때문에 그만한 의의가 있었다.
나옹은 공부십절목을 단순히 혼자 생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선문(禪門)의 과거부터의 여러 주장들, 정론(正論)들을 집취해 하나로 집대성했으며,
당시의 일반론에 근거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나옹의 공부십절목이 특히 주목 받은 것은,
중국 선불교의 구조와 노력을 넘어서는 선수행의 체계화가 시도됐기 때문이다.
즉, 나옹은 선문의 정론을 집대성해,
중국 선종을 넘어서는 고려 조계종의 주체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나옹이 공민왕의 의지를 받들어 당시의 선불교에 안주하지 않고 개혁을 통해
선의 정신을 새롭게 창도하려고 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나옹의 공부십절목에는 중국의 선불교를 넘어서려는 고려 선불교의 정신이 담겨있다.
나옹 화상의 공부십절목은 문제를 되풀이해서 묻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공부십절목은 당시 시간상의 이유로 공부선장(功夫選場)에서는 사용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나옹어록(懶翁語錄)>에는 문제만 제시돼 있을 뿐, 답은 없는 상태로 한국불교계에 유전하게 됐다.
―――나옹(懶翁) 화상의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
1.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보면 그 모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양과 소리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2. 이미 소리와 모양에서 벗어났으면 반드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그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3.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을 때는 어떠한가?
4. 공부가 익었으면 나아가 자취(鼻孔)를 없애야 한다. 자취를 없앤 때는 어떠한가?
5. 자취가 없어지면 담담하고 냉랭해 아무 맛도 없고 기력도 전혀 없다.
의식(意識)이 닿지 않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또 그때에는 허깨비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줄을 모른다. 이쯤 되면 그것은 어떤 경계인가?
6. 공부가 지극해지면 동정(動靜)에 뜸이 없고 자고 깸이 한결 같아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잃어지지 않는다.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포기하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그때에는 어떻게 해버려야 하는가?
7. 갑자기 120근이나 되는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아서 금방 꺾이고 금방 끊긴다. 그때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自性)인가?
8. 이미 자성(自性)을 깨쳤으면 자성(自性)의 본래 작용은 인영(因緣)에 따라 맞게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본래의 작용이 맞게 쓰이는 것인가?
9. 이미 자성(自性)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벗어나야 하는데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 질 때에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10. 이미 생사를 벗어났으면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사대(四大)가 각각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