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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 조직'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란의 핵심 종파인 시아 이슬람부터 이해해야 한다. 시아파는 국왕같은 세속권력은 '올바른 권력을 뺏어간 정당성 없는 권력'이라고 여긴다. 이런 시각은 역으로 세속권력에 저항하는 시아파 종교지도자들에게 높은 도덕적 권위를 부여한다. 통치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는 권력자에 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인 이맘은 오래 전에 12대 이맘 이후 새로이 세워지지 않았다. 대신 여러 명의 이슬람법학자인 무즈타히드가 최고 지도자 역활을 하고 있다. 무즈타히드 중에 가장 존경받는 계층이 '아야톨라(신의 신호)'이고 그중 최고 권위자를 '아야톨라우즈마(대아야톨라)'라 부른다. 이슬람의 법적 유권해석을 내리는 이들의 영향력은 국왕 조차 눈치를 볼 정도로 막강하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철권통치와 이란의 근대화'
근대 이란은 석유 때문에 끊임없이 외세의 개입과 수탈에 시달려 왔다. 이를 비판하던 모사데크 총리가 석유국유화를 추진했으나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다.
권위를 되찾은 무함마드 레자 샤는 미국 CIA 와 이스라엘 모사드의 도움으로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창설한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사바크의 인권유린은 당대 최악의 수준이다. 불법체포와 가공할 신체고문으로 이란 국민은 공포에 떤다. 그러나 무함마드 샤는 퇴행적인 정치만 한 건 아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권고에 따라
1963년 종교계의 반대를 무시하고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이라는 개혁프로그램을 발표한다. 토지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여성 참정권 허용, 문맹퇴치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조치는 이란 국민 대부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이란 사회가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17년만에 일인당 GNP가 10배나 상승한 2천달러에 이를 정도로 경제성장도 크게 이룬다. 의료개선에도 공을 들여 영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지고 젊은 층 인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젊은이들이 나중 팔라비 왕정을 몰아내고 이란 혁명을 이룬 중심세력이 된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건 빠른 근대화는 짙은 그늘을 만들어 낸다. 토지개혁을 통해 약 200만명의 소작농에게 토지가 분배되지만 혜택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빈민층으로 전락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생활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더욱 힘겨운 생활를 하게 된 많은 서민들은 백색혁명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팔라비 왕정은 사바크와 폭력배를 동원하여 시장 상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가를 낮추라는 협박과 처벌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물가 억제 대책은 그렇게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서민들의 불만은 쌓여만 간다.
그런 와중에도 경제 성장의 달콤한 열매를 만끽하는 이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테헤란에 사는 부자들은 약 5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과 함께 특권층처럼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산다. 이런 모습을 보는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당연하다. 오랫동안 이란의 자주권을 억압했던 외세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1970년대 후반 이란 국민들의 반외세 정서가 최고조에 달한다.
이런 반감은 독재정치에 대한 기존의 불만과 결합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진다.
1970년대 초반의 반정부 운동은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주도하였다. 시아파 종교지도자들 간에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주의는 아직 큰 세력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러나 젊은 신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에 나선다.
그 신학생들을 이끄는 대표 인물이 바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 1902-1989)이다.
'호메이니의 반정부 활동과 탄압'
1963년의 호메이니는 대중들이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그의 반정부 설교 현장에 사바크가 들이닥쳐 체포하는 과정에서 학생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긴다. 이를 계기로 반정부 운동가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호메이니도 체포되지만 종교 지도자라는 이유로 금방 석방된다.
석방 후 곧바로 아슈라 추모일에 더 강한 반정부 설교 활동을 하는 그는 다시 체포되고 아슈라의 저항 분위기와 함께 테헤란과 주요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연일 일어난다. 무함마드 레쟈 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해산한다. 이 과정에서 수백명이 희생된다. 호메이니는 다시 석방되나 그의 반정부 활동은 계속된다.
1964년 이란 정부는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한다. 당장은 시위현장에서 보이지 않지만 훗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터키, 이라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자리잡고 현지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란의 반정부주의자로서 활동을 계속 한다.
'이란의 전통은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했다!'
1971년 무함마드 레쟈 샤는 세계각국의 정상들을 초청해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유적 현장에서 '이란 왕정 25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해외 정상들과 웃으며 샴페인을 퍼트리는 모습은 이란 전역으로 중계된다. 이슬람의 지배를 부정하고 이란의 정체성과 세속주의를 옹호하겠다는 표시이다. 이란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강조하고 이슬람의 반정부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 이 행사의 진짜 목적인 셈이다.
샤는 달력도 바꾼다. 헤지라를 원년으로 하는 이슬람 달력을 폐지하고 키루스 대왕의 탄생을 원년으로 하는 키루스력으로 바꾸게 한다. 오랫동안 이슬람 달력에 익숙해진 이란 국민들은 혼란과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란 혁명'
호메이니는 이라크에서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왕정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의 반정부 투쟁은 '독재 대 민주'가 아니라 '세속왕정 대 이슬람 신권정치'이다. 반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그의 강연 테이프는 이란으로 밀반입되어 대중에게 전파된다.
1977년 미국에서는 카터 행정부가 출범한다. 인권 외교를 내세운 카터 행정부는 이란 팔라비 왕정에게 인권 개선을 요구한다. 샤 왕정은 부분적으로 자유화조치를 발표한다.
오랫동안 엇눌려있던 사회적 요구들이 자유화 조치를 계기로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반정부 시위의 중심이던 국민전선의 핵심 요구 사항은 '헌법과 대의제 복원'이다. 어쩌면 샤 정부가 이런 요구들을 받아들여 헌법과 의회제를 다시 복원시키면 이슬람 혁명으로 번지는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나 샤 정부는 억압으로 막는다. 결국 사바크와 군부의 충성 이외 이란 대부분의 세력과 단체로 부터 고립되고 만다.
1978년 초 한 보수 언론에 호메이니가 외국인이며 과거 영국의 스파이였다는 기사가 실린다. 이에 항의하는 신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신학생이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자 분노의 여론이 끓어오른다.
다음 날 해외 망명 중인 호메이니가 시위를 벌인 학생들의 용기를 칭찬하고 더 많은 시위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소극적이던 원로 성직자들도 경찰의 발포를 강력하게 성토한다.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애도기간이 끝나자 전국적인 규모로 시위가 이어진다. 또다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생긴다. 시위는 점차 규모가 커지고 더욱 폭력적으로 번진다. 헌법의 복원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던 시위대의 구호가 변한다.
'샤에게 죽음을!!!'
지나친 폭력 사태를 우려하는 원로 성직자들의 만류로 시위는 잠시 잦아들다가, 라마단 기간을 맞이하여 다시 확대된다. 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대는 전국으로 번진다. 탱크와 기관총으로 진압하는 계엄군에게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맞선다. 희생자만 늘어나고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한 극도의 상황이다.
시위대의 주도 세력과 반정부 민족주의자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호메이니를 면담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여러 진영이 모인 시위대가 공통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았기에 비록 호메이니가 민족주의자가 아닌 이슬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반정부 진영의 구심점 역활을 맡기려 한 것이다.
테헤란에 칩거하는 샤는 사실 암 투병 중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국민들의 뜻을 이해합니다. 선거를 실시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칩니다' 라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
일년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너무 늦었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지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한다. 아슈라일인 12월 11일에는 백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테헤란 시내를 가득 메우고 이제 군부조차 샤를 따르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도 샤의 하야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보내온다. 샤는 고립무원이다.
시위대의 분노는 미국으로 향한다. 이란의 석유로 배를 불리고 레자 샤의 후견인 역활을 해온 미국이 이란 국민을 억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대사관과 미국 기업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고 많은 미국인들이 다급하게 이란을 떠난다.
샤는 반정부 인사인 박티아르를 총리로 임명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박티아르 내각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자 시위대들도 등을 돌린다.
1979년 1월 16일 무함마드 레자 샤는 이란을 떠난다.
팔라비 왕정은 무너지고 이란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다수 대중이 구 체제를 무너뜨리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 혁명이다.
그러나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것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구 체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혼란이 오기 마련인데 이를 수습하려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때까지 파리에 머물던 호메이니는 약 3백만 명의 환영 인파가 기다리는 테헤란으로 귀국한다. 이란 국민들이 샤 왕정의 총구 앞에서 목숨 걸고 시위를 할 동안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사태를 지켜보던 호메이니이지만 이란 군중은 그를 원한다.
대중의 희망으로 떠오른 그는 순식간에 엄청난 권력을 지닌 지도자로 떠오른다. 호메이니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일부는 그를 향하여 '이맘'이라고까지 외친다.
'구체제 청산과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
이란으로 귀국한 호메이니는 지난 수년 동안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숨진 희생자들의 무덤을 찾아 추모하는 일정으로 시작한 후 재빨리 혁명을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기존의 박티아르 내각과 별개로 민족주의자를 총리로 지명한다. 군부대를 포함하여 이란 전역에 혁명 위원회를 세우고 각 혁명위원회의 책임자는 이슬람법학자인 무즈타히드들이 임명된다. 혁명위원회들을 통솔하는 혁명평의회는 호메이니가 의장을 맡는다.
박티아르 총리는 해외로 피신한다. 혁명위원회는경찰서와 사바크를 공격하여 왕정과 사바크의 간부들을 처형한다.
서서히 이슬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혁명을 이끈 여러 세력들간의 권력투쟁이 시작되고 자유주의자들과 중도파들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다. 호메이니와 이슬람주의자들은 빠른 속도로 구체제의 숙청 작업과 함께 권력을 장악한다. 이란 북서부 지역의 쿠르드족이 독립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나 호메이니의 지시로 이란군이 무력 진압한다.
호메이니는 샤를 지지하던 기존의 이란군을 견제하는 또 다른 군사 조직인 '파스다란(Pasdaran, IRGC, 혁명수비대)'를 만든다. 혁명위원회를 통하여 대대적인 군부 숙청에 들어간다. 약 250명의 군 간부를 처형하고 정규군의 약 60%를 축소한다. 호메이니의 근시안적이고 순진한 발상으로 감행된 급격한 군부 청산은 이란의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되고, 이는 이듬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호메이니는 정치적 입지도 강화시킨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슬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슬람공화당을 창당하여 혁명헌법을 마련한다. 혁명헌법은 외형적으로 대통령 성거, 의회 선거, 지방자치제 선거를 치르는 민주공화정 형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12명의 성직자가 주도하는 혁명수호평의회의 통제를 받는다. 혁명수호평의회는 선거 전 후보자의 적격성을 심사하고 의회를 통과한 법률을 승인하는 권한을 가진다.
호메이니는 이란 최고지도자로서, 혁명수호평의회의 의원과 혁명수비대 대장 및 군사조직의 수장을 임명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을 승인하는 권한을 가진다. 사실상 헌법상 공화정 위에 이슬람주의의 새로운 샤가 군림하는 셈이다.
이란은 전혀 새로운 국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종교가 국가기관이 된 국가가 된다. 이는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나 반대로 종교가 세속화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호메이니는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샤 왕정의 비밀경찰인 사바크를 해체하고 처형하지만 1984년 사바크의 주요 조직을 재활용하여 이와 유사한 정보안보부(MOIS)를 신설한다. 언론자유도 철저히 통제하고 여성들은 차도르를 착용하도록 하고 대학도 폐쇄한다. 폐쇄된 대학은 이슬람 원리에 따라 개조 작업을 거친 후 다시 문을 열게 한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전 이슬람권에 큰 충격을 준다. 특히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고무적인 자극을 주어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영감을 준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모스크 점거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이슬람주의 전사들이 자원하여 참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각지의 이슬람주의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박정욱)
다음은 이란.이라크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