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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열리라!
31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36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막 7:31-37)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막 7:31)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읽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서 지리를 조금만 알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두로’, ‘시돈’, ‘데가볼리’는 모두 이방인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두로(띠로)’와 ‘시돈’은 갈릴리 지방 북쪽에 위치한 페니키아(베니게) 지방에 있던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페니키아는 로마령 시리아의 일부로 ‘외국’이었습니다. 또 ‘데가볼리’는 ‘열 개의 도시’(데카-폴리스)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요단강 동쪽, 그리고 갈릴리 호수 남동쪽에 위치한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의 국경을 북쪽으로 넘어 두로와 시돈까지 갔다가 시계 방향으로 동남쪽으로 이방인 지역을 따라 쭉 내려왔다가 마침내 갈릴리 바다(호수)의 동편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방인 지역을 여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즉 지금까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선교했었는데, 여기서는 외국 땅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도 선교한 것입니다. 앞서 7장 19절에서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선포하시며 ‘금기식품법’을 폐기하신 예수님은 이제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며 자연스럽게 제의적으로 불결한 이방인들과 접촉하면서 “모든 사람은 다 깨끗하다”는 메시지를 당신 몸과 삶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가 시작된 이유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및 율법학자들과 소위 ‘장로들의 전통’에 관해 논쟁하시고 잠시 쉬시고자 국경을 넘어 ‘두로’에서 몸을 숨기셨을 때,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한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 바로 앞인 7장 24-30절에 실려 있는데, 그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고 말하시며 평소 같지 않게 매정하게 거절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여인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8절)라고 대답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고 꼼짝 못하게 하여 마침내 딸의 치유를 받아냈습니다. 한 이름 없는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꺾고, 마침내 변화까지 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본문말씀이 이어집니다. 즉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는 바로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귀머거리요 벙어리는 누구인가?
이어지는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이 귀 먹고 말 더듬는 한 불쌍한 사람을 치유해 준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달리 말하면 귀머거리요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내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도 없고, 반대로 상대방의 뜻을 전달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이해의 부재를 가져옵니다. 이는 소통을 영어로 ‘mutual understanding’(상호 이해)라고 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세계에만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 사람 인(人)자를 보면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살아야 비로소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통이 불가능해 자기 세계에만 갇혀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혼자서 살아야 한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 인(人)자가 뜻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귀머거리요 벙어리를 이렇게 이해할 때 오늘 복음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단지 귀 먹고 말 더듬는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만을 가리키는 걸까요? 1차적으로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거기에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는 사회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때 거기서 있었던 먼 옛날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양식은 죽어 가는 나의 영을 살립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good news, 복음(福音)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먼 옛날 유대 땅에서 일어났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왜 듣지 않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자주 만납니다. 여기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사람이 다른 종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우리말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외국어로 말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 사람 다 우리말로 말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교우 간에, 친구 간에, 또 여야 간에, 진보 보수 간에 우리는 종종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해합니다. 왜 말이 통하지 않을까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벙어리가 왜 벙어리인줄 아십니까? 벙어리의 90%는 귀머거리라고 합니다. 즉,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들으면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 상호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대화(對話)는 dialogue입니다. monologue, 즉 혼자만의 독백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은 들어야 하고, 말하고 들은 후에는 이제 역할을 바꿔 이제까지 들었던 사람이 말하고 말했던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주거니 받거니’가 안 됩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화를 한다면서 몇 분 이야기 하다가 바로 고함치고 화내는 싸움으로 치닫곤 합니다. ‘대화’를 ‘대 놓고 화내는 것’ 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먼저 ‘잘’ 듣는 것입니다. 아이가 말을 배울 때 먼저 귀가 트이고 나서 말문이 트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도 먼저 귀가 뚫려야 말문이 트이지 않습니까! 또 아까 말했듯이 벙어리는 원래부터 벙어리가 아니라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듣되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것, 즉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귀 쫑긋 세우고 남이 무슨 말을 하나, 왜 그런 말을 하나 잘 생각하면서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 없이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TV나 라디오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채널이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채널이나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과 이야기할 때도 상대방에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KBS에 채널을 맞추고 MBC를 시청할 수 없듯이, 내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고 남의 말을 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렇듯 주파수를 내 채널에 맞추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듣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좋고 옳은 이야기를 해도 나는 그것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내 귀는 상대방이 아닌 내 주파수에만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를 들어도 자기 식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니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들으니 잘못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자기 주파수에만 채널을 고정할까요?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총체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의 문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까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경험과 지식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내세우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남에게 같은 말을 들어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들으면 ‘충고’로 들리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들으면 ‘비난’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런 닫힌 마음을 성경은 완고한 마음, 굳은 마음 등등으로 묘사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라 이런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남이 말을 하면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듣기 때문입니다. 즉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를 주장합니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돌 심장)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살 심장)으로 바꿀 것을 주장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를 다른 말로 하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합니다. 이해가 가능합니다.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들어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에바다”, “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 수용하기
이제껏 제가 사회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개인’ 간의 소통 부재가 ‘사회’의 소통 부재로 이어지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물론 소통이 부재한 사회는 문제가 많은 병든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하기 위해, 불통이 아니라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회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영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대화할 수 없고,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하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들어야 합니다. 내 말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수용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독백’만 합니다. “하나님 나의 또는 우리의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청원만 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단지 내 소원을 하나님께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대화가 내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를 전달받는 것에도 그 목적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것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아니, 이것이 기도의 진짜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 수용할 수 있고, 수용하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신은 내게 있는 소유로, 그것이 돈이든 재물이든 재능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으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신을 변화시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이렇듯 미신은 자기는 변화됨이 없이, 자기가 가진 것으로 신의 마음을 바꿔 가기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미신은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욕망만 배가시킵니다. 반면에 절대자이신 신 앞에서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맞게 내 자신이 변화되려는 의지입니다. 그 결과로써 신앙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변화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과 미신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나의 변화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제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바뀌었으니 너도 바뀌라!
앞에서 대화는 독백이 아니라 양방향 소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양자 모두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자 모두’입니다.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관계에서 변화는 일방적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일어납니다. 곧 사람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변하신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변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사람도 하나님께 변할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는 요구는 변화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들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우리 인간은, 특히 신앙인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시로페니키아 여인으로 인해 예수님은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선(先) 유대인 구원, 후(後) 이방인 구원”이라는 당시의 신앙과 당신의 신념을 바꾸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라는 아브라함의 청에 따라 멸망을 유예할 의인의 숫자를 쉰 명에서 마흔다섯 명, 마흔다섯 명에서 마흔 명, 이어 서른 명, 스무 명, 열 명으로 자꾸 줄여주십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입장을 몇 번이고 수정하신 것입니다. 또 그 전에 노아 시대 홍수 심판 직후에도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창 8:21)고 하시며 심판 전의 당신 입장을 180도 수정하십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바뀐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렇듯 하나님도 당신 입장을 바꾸셨는데 우리가 바꾸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예전에 진보와 보수는 ‘입장’이 아니라 ‘태도’에 따라 갈라진다고 했습니다. inclusive한가 아니면 exclusive한가, 즉 포용적인가 배타적인가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진짜 기준입니다. 다시 말해, 열려있는 사람은 진보요, 닫혀있는 사람은 보수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수요, 남도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입니다. 보수는 나는 가만히 있고 남들만 하나님만 바꾸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고, 진보는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도 바꾸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육체적인 소통 장애, 사회적인 소통 장애, 영적인 소통 장애를 가진 우리에게 “에바다!”라고 명령하십니다. 닫힌 귀를 열고, 굳어진 마음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닫힌 사람이 아니라 열린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보수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진보적인 신앙인이 되라 하십니다. 특별히 갑의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닫힌 사람이 아닌가를 늘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당신 스스로를 개방하시며 우리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에바다”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