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재판은 역사상 가장 잘못된 재판으로 자주 거론되며, 민주주의(Democracy)를 폄훼하는 구실로 제시되곤 한다. 교과서나 위인전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으며, 철학의 여러 주제에 관해 소피스트(sophist)들과 논쟁하고 그들의 궤변을 논박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다.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구체적 행위가 무엇인지 모호할뿐 아니라 그것이 과연 사형에 처할만큼 중범죄가 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점을 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무지한 민중이 판결한 인민재판에서 그리스 최고의 현자(賢者)가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 방식만을 비판한다. 수 없이 반복되어온 이런 주장에는 과연 어느 만큼의 진실이 담겨있는 것일까?
아티카(Attica) 반도에 자라잡은 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에 보이오티아(Boeotia)에게서 오로피아(Oropia)를 빼앗았다. 기원전 508년부터 기원전 502년까지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국정을 개혁하여 민주주의(Democracy)를 확립했다. 전국을 10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여 이를 데모스(Demos)라고 칭했다. 10개 데모스는 시민 인구가 균등하게 편성되었고 다른 데모스로 거주지를 옮겨도 소속 데모스는 바뀌지 않았다.
최고 결정기구는 민회(民會)였다. 민회는 9일 또는 10일 간격으로 1년에 40회 개최되었고, 6천 명 이상이 참가해야 성립되었다.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18세 이상의 남자 시민으로 제한되었고, 30세 이상의 모든 남자 시민에게는 공직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민회는 각각의 데모스 (Demos) 단위로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 중에서 50명을 추첨으로 선발하여 500인 평의회를 구성하였다. 500인 평의회는 50인씩 10개 조로 나뉘어 1개 조가 1년의 10분지 1씩 복무했다. 50인회는 매일 회의를 열어 국가행정을 처리하고 중요 안건을 심의하여 민회에 상정하였다. 500인 평의회 의원의 임기는 1년이고 평생 1회로 제한되었다. 의장은 매일 교체되었고 민회가 열리는 날이면 민회의 의장을 겸했다.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직책을 스트라테고스(strategos)라 불렀는데 군사위원 또는 장군으로 번역한다. 10개 데모스(Demos)는 각각의 민회에서 군사위원 1인을 투표로 선출하고 총 10명의 군사위원 중에서 위원장을 전국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했다. 군사위원회는 현대 국가의 내각에 해당하며 위원장은 수상(首相)에 해당한다. 군사위원과 위원장의 임기는 1년이고 무제한 연임이 허용되었다. 그 밖의 모든 공직은 민회에서 추첨으로 선발하고 임기 1년에 평생 1회만 허용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아테네 출신 자유민이면 시민권을 부여하고 외국인일지라도 장기 거주했거나 특별한 기술이 있으면 시민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451년에 페리클레스의 제안으로 법을 개정하여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인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의 인구는 약 30만 ~ 35만 명으로 추산되며 18세 이상의 남자 시민은 4만 ~ 4만 5천 명으로 추산된다.
아테네를 비롯한 많은 폴리스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개척한 반면 내륙에 자리잡은 스파르타는 주변의 다른 부족을 정복하여 노예로 만들고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743년에 서쪽 메세니아(Messenia)를 침공하여 기원전 724년에 완전히 정복하고 노예로 삼았다.
스파르타는 왕국이었는데 왕의 전횡을 방지하고자 동시에 2명의 왕을 두었다. 왕위는 양대 가문에서 세습하였고 각각의 왕은 다른 왕의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가져 상호 견제하였다. 또 장관에 해당하는 5명의 에포로스(Ephoros)를 민회에서 선출하여 왕권을 견제하였다. 에포로스의 임기는 1년이고 1회만 허용되었다.
스파르타는 최초의 스파르타 부족 출신만을 시민으로 인정했고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에게는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민회에서 선출된 28인의 원로와 두 명의 왕으로 원로원을 구성하였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고 후보의 자격은 60세 이상의 귀족으로 제한되었다. 원로원은 국가의 주요 법률과 정책을 결정했고 전쟁과 평화, 조약 비준 등 중대 문제는 민회에 상정하였다.
평민 신분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는 주로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했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으나 투표권이 없고 군(軍)에 징집되면 보조 임무를 수행했다.
노예 신분인 헤일로타이(Heilotai)는 대다수가 농지를 경작했으며 가정을 꾸리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스파르타는 노예를 길들이기 위해 노예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도 주기적으로 매질하였고 매년 새로운 에포로스가 취임하면 군인들을 풀어 노예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습격해서 아무 노예나 살해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노예는 비(非) 그리스인이었고 스파르타의 노예는 동족인 그리스인이었다.
전성기 스파르타의 인구는 40만명을 상회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시민의 비율은 6 % 정도였다. 시민계급의 모든 남자는 7세가 되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숙소에 들어가 20세까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30세가 될 때까지 현역 군인으로 복무했다. 30세부터 결혼이 허용되고 예비군에 편성되어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50세까지 군인으로 출전하였다. 여자도 체력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시민은 노예들의 반란에 대비하여 오로지 군인의 역할만 수행하였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스파르타는 귀금속 화폐를 전면 폐지하고 철편(鐵片)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철편은 너무 무거워서 화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기에 상업과 무역이 쇠퇴하였다. 모든 토지와 노예를 국가가 소유하고 시민은 균등하게 할당 받은 토지에서 노예가 생산한 수확물의 절반을 징수토록 함으로써 토지 소유의 집중을 방지했다. 주택의 규모를 획일화하여 빈부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마을 단위로 공동 급식소를 설치하여 공동으로 식사했다.
스파르타의 국가체제는 현대의 군국주의(軍國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가 혼합된 체제이다. 또한 하층계급에 대한 공포정치로 지배계급의 특권을 유지한 측면에서 현대의 파시즘과 유사하다.
스파르타는 엘리스, 아카디아, 코린트, 메가라 등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의 폴리스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고 맹주가 되었다.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으로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기원전 479년에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기원전 477년에 여러 폴리스들과 델로스(Delos) 동맹을 결성하고 맹주가 되었다. 기원전 461년부터 기원전 429년까지 군사위원장을 연임한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는 공전의 번영을 누렸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나 70세까지 살았다. 그의 생애의 전반기는 페리클레스의 집권기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만발한 시기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공직자와 배심원을 선출하는 선거와 추첨에 참여하는 것을 시민의 의무로 여겼으나 소크라테스는 성인이 된 후 단 한 번도 선거나 추첨에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신분의 귀천과 빈부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한 자격을 부여한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타락한 제도라고 비방하고 스파르타의 귀족정치를 찬양하는 대중활동을 전개했다.
소크라테스가 38세이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두 진영 사이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아테네에게 오로피아(Oropia)를 빼앗겼던 보이오티아(Boeotia)의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 편에 가담하였다. 양측은 BC 421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BC 415년에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비방하고 적국인 스파르타의 귀족정치를 찬양하는 선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상류층 가문의 많은 청년들이 소크라테스를 추종했고 소크라테스가 가장 총애한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테스는 아예 스파르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조국 아테네를 공격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 성(城)이 스파르타 군대에 포위되어 힘겹게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포함된 일군의 반역자들이 성문을 열어주어 아테네는 함락되고 말았다. 강화조약에서 아테네는 아테네의 성곽을 헐어야 했고 아테네와 외항(外港) 피레우스(Piraeus)를 연결하는 통로의 장벽을 헐어야 했으며, 해외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고, 해군 함선은 12척으로 제한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10개 데모스(Demos)에서 각각 세 사람씩 30명을 선발하여 아테네를 통치하게 했다. 이것이 30인 과두정(寡頭政)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스파르타 편에 가담했던 반역자들이 스파르타의 앞잡이가 되었다. 30인 과두체제는 8개월 동안 아테네를 통치하면서 대략 1,500명의 반대파를 살해했다. 이 숫자는 아테네 성곽 안에 살고 있던 시민의 1할에 달했다. 자다가 목 졸려 죽거나 한밤중에 끌려나와 즉결 처분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반역의 우두머리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사령관의 눈 밖에 나 국외로 도주한 뒤 살해당했고 크리티아스와 카르미테스가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스파르타의 동맹국이던 엘리스(Elis)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동맹에서 이탈하여 아테네 편에 가담하였다. 아테네를 굴복시킨 스파르타는 기원전 402년에 엘리스(Elis)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스파르타가 엘리스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하느라 아테네 주둔군을 축소하자 민주파가 봉기하여 피레우스(Piraeus)를 점령했다. 이 때의 전투에서 크리티아스와 카르미테스가 전사하여 과두파는 힘을 잃었다. 스파르타 군은 기원전 401년에 아테네에서 축출되었고 과두파는 스파르타 군을 따라 도주하거나 살해되었다.
국권을 회복한 민주정부는 당파간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과두파 집권기에 행해진 정치적 범죄에 대하여 사면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기원전 399년 5월, 70세인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죄목이 추상적인 이유는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으로 인해 그의 범죄행위를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실질적인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1. 소크라테스는 국가제도의 근본인 공직 선거제와 추첨제를 비방함으로써 청년들로 하여금 민주정치를 멸시하도록 선동했다.
2.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카르미테스를 비롯한 반역자들과 친하게 어울리면서 민주정치에 반대하도록 부추겼으므로 그 자들이 저지른 반역과 학살에 책임이 있다.
아테네의 사법제도에는 직업적인 검사나 판사가 없었다. 모든 시민에게는 공직자를 탄핵하거나 범죄 혐의자를 기소할 권리가 있었다. 매년 초 10개 데모스 (Demos) 별로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 중에서 600명의 배심원을 추첨으로 선발하고 총 6천명의 배심원을 대상으로 재판 당일 또다시 추첨하여 각각의 재판에 배심원을 배정했다.
배심원의 숫자는 사건에 따라 달랐다. 민사소송의 경우 1천 드라크마(Drachma) 이하의 사건은 201명, 이 금액을 초과하는 사건은 401명이었다. 1드라크마 화폐는 약 4.3 그램의 은(銀)으로 주조했으며 6오볼로스였다. 배심원에게는 하루치의 최소 생계비 3 오볼로스가 지급되었다. 형사 사건과 정치적 사건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최소 501명부터 1001명, 1501명, 2001명, 2501명까지였다. 배심원의 1차 투표로 유무죄를 가르고 여기서 유죄로 심판되면 원고와 피고가 각각 형량을 제안한 다음 2차 투표로 선고했다. 배심원들이 사실상 재판관이었고 비밀투표가 보장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배정된 배심원은 501명이었다. 아테네에는 직업적인 변호사 제도가 없어서 피고는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반역과 학살을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일생동안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비방하고, 적국인 스파르타의 귀족정치를 찬양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소크라테스의 선동으로 인해 그의 여러 제자들이 반역에 가담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1차 투표에서 유죄 281표, 무죄 220표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형량을 선고하는 2차 투표를 앞두고 고발자는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요구했다. 스스로 변론에 나선 소크라테스는 모든 시민이 평등한 아테네식 민주정치보다 신분제에 기반한 스파르타식 귀족정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에 유익한 제도를 제시한 자신은 국가유공자이므로 종신연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시민들의 고함소리로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종신연금 요구를 철회하고,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2차 투표에서 사형 341표, 사면 160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사형 361표, 사면 140표라는 기록도 있다. 1차 투표에서 소크라테스의 사면을 선택했던 배심원 중에서 60표 내지 80표가 그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사형선고로 돌아선 것이다. 바로 그날 아테네에서는 건국영웅 테세우스를 기념하는 축제가 시작되어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집행은 축제가 끝난 뒤로 연기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한 달 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선고 후 탈옥을 권하는 제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악법(惡法)도 법(法)이다." 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인 법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 朝雄)가 1937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법철학>에서 주장하기를, "소크라테스가 탈옥하지 않은 것은 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 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소크라테스가 "악법(惡法)도 법(法)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다카 도모오(尾高 朝雄)의 주장에는 소크라테스를 재판한 아테네의 법은 악법이며 정의로운 법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과연 억울하게 죽었는지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전시(戰時)에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조국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비방하고 적국 스파르타의 귀족정치를 찬양했다. 그의 선전활동은 30년에 걸친 전쟁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설령 그가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반역과 학살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공개적인 선전활동은 명백한 이적행위(利敵行爲)에 해당한다.
프랑스는 고대 아테네와 유사한 역사를 겪었다. 1940년 6월 프랑스는 독일에게 항복하고 꼬박 4년간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독일이 패망한 후 프랑스는 점령기간 중 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사람 약 9천 명을 재판도 없이 처형했고 그 후 재판을 거쳐 1500 명을 처형했으며 3만 8천 명을 감옥에 보냈다. 소크라테스 정도면 반역의 수괴에 해당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가장 문명화된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면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범죄가 무엇인지 논하지 않고, 그를 단죄한 재판 방식만을 문제 삼는다. 재판은 전문적인 법률가의 영역인데 무식한 민중이 판결하는 아테네의 재판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 법관에 의한 재판이 아테네식 재판보다 공정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테네는 직업적 법관제도의 심각한 결함 때문에 이를 폐지하고 배심원제로 바꾸었다. 개혁된 아테네의 재판에서는 배심원의 숫자가 무척 많아서 지연(地緣) , 혈연(血緣) , 학연(學緣) , 뇌물 , 압력 또는 몇 사람의 독단으로 판결을 좌우할 수 없다. 직업적인 검사와 판사와 변호사가 없으니 전관예우가 있을 수 없고,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나올 수 없다. 아테네의 재판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장담하건데 직업적 판사에게 전권을 부여한 재판보다는 공정했을 것이다.
직업적 법관에 의한 잘못된 재판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예수에 대한 재판이다. 예수는 야훼의 아들을 자칭하다가 체포되어 유대인의 법정 산헤드린(Sanhedrin)에 끌려 갔다. 산헤드린은 유대의 사법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의장인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고위 법률전문가로 구성되었다. 산헤드린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집행권이 없었기에 예수를 로마인 총독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다. 당시 로마제국은 많은 피지배 민족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사형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다.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는 자신이 야훼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이며 자신의 왕국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의 율법에 의하면 신성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지만 다신교 국가로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로마의 법률에서는 죄가 아니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이므로 석방하고자 했으나 산헤드린이 군중을 동원하여 예수의 사형을 요구하자 이에 굴복하여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직업적 법관에 의한 잘못된 판결은 예수 재판 이후에도 세계 각국에서 무수히 거듭되었다. 1894년부터 1906년까지 프랑스를 뒤흔든 드레퓨스(Dreyfus) 사건은 직업적 법관에 의한 잘못된 판결로 인해 벌어진 소동이었다.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1936년에서 1938년까지 실시한 재판에서 날조된 스파이 죄목으로 수 만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하였다.
현대의 많은 나라가 아테네식 재판제도를 도입하여 배심제(陪審制, Jury System) 또는 참심제(參審制, Schoffe System) 재판을 시행하고 있다. 선거인 명부에서 범죄 경력자를 제외하고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하여 사실심리와 유무죄를 평결하는 한편 직업적 법관은 재판 절차를 진행하고 유죄평결의 경우 형량을 결정하는 방식이 배심제(陪審制)이다. 미국,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스페인, 러시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및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과 남미 등 46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다. 배심원의 숫자와 임기 및 평결의 만장일치 방식과 다수결 방식 등 세부 사항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배심원단이 사실심리와 유무죄를 평결한 다음 유죄의 경우 배심원들과 직업적 법관이 1/n의 자격으로 대등한 권한을 가지고 형량을 합의하여 선고하는 방식이 참심제(參審制)이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일본, 중국 등에서 시행하고 있으며 배심제와 마찬가지로 세부 사항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배심제(陪審制)나 참심제(參審制) 재판은 1심 재판에만 적용하고 2심과 3심은 직업적 법관이 전담한다. 그러나 상급심에서 하급심의 판결을 뒤집기 위해서는 하급심의 사실 심리와 법리에 명백한 오류가 있음을 밝히도록 함으로써 상급심의 자의적 판결을 제한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8년부터 부분적으로 국민참여 재판을 도입했으나 직업적 법관의 판결에 기속력이 없는 무늬만 배심제이다. 현대 세계에서 유수의 선진국과 강국 중에 직업적 법관에게 재판의 전권을 부여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고 알려진 것은 플라톤(BC 427 ~ BC 347)이 남긴 기록에 근거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과두파의 일원이었고, 공포정치의 지도자 크리티아스와 카르미테스의 조카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1945년에 출판한 책 "열린 사회와 그 적(敵)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플라톤을 전체주의의 창시자로 규정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칼 포퍼(Karl Popper)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배반했다고 주장했으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으나 플라톤의 저서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BC 380년경 폴리테이아(Politeia)를 저술했는데 이는 "폴리스(Police)의 정부 형태"라는 뜻이다. 폴리스(Police)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이다.
Politeia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The Republic이라 했다. 오늘날에는 republic이 공화국(共和國)이라는 뜻이지만 옛날에는 country 또는 state 또는 government라는 의미도 있었다. country와 state는 국가를 의미하고, government는 정부 또는 통치체제를 의미한다.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에서 The Republic을 <국가론(國家論)>이라고 번역했는데 원저(原著)의 의미에 부합하는 번역은 <정부론(政府論)>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수 백 개였고 정부형태도 다양했다. 플라톤은 폴리스의 정부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좋은 정부의 순위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1위 : Aristocracy (Greek Aristokratia) : 귀족정부(貴族政府) - 세습적 신분제를 토대로 귀족계급이 권력을 독점하는 통치체제
2위 : Timocracy (Greek Timokratia) : 금권정부(金權政府) - 토지를 소유한 유산계급이 권력을 독점하는 통치체제
3위 : Oligarchy (Greek Oligarkhia) : 과두정부(寡頭政府) - 압도적인 재력과 군사력을 소유한 극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통치체제
4위 : Democracy (Greek Demokratia) : 민주정부(民主政府) -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투표와 추첨으로 공직자를 선출하며 주요 정책을 시민의 직접투표로 결정하는 통치체제.
5위 : Tyranny (Greek Tyrannos) : 참주정부(僭主政府) 또는 폭군정부(暴君政府) - 쿠테타와 같은 불법적 수단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1인 통치체제.
이 논고에서는 귀족정부(Aristocracy)와 민주정부(Democracy)만을 논하고자 한다. 아리스토(aristo)는 귀족이라는 뜻이고 크라시(cracy)는 정부(政府) 또는 통치체제라는 뜻이므로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를 귀족정부(貴族政府)로 번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