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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道德律, an ethical code)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戒律, commandments) 같이 합리적(合理的, rationality)인 것은 없습니다.(None of the moral laws that we humans should keep are as reasonable as the one set by Buddha.)
계율(戒律, religious precepts) 은 우리 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宇宙의 秩序, the order of the universe)입니 다.(Discipline is the order of the universe that must be kept in our social life.)
유교(儒敎, Confucianism)의 인의예 지신(仁義禮智信, benevolence)이나,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와 이슬 람교(Islam敎)의 십계명(十誡命, the Ten Commandments), 그러한 세계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佛敎, Buddhism)의 계율(戒律, religious precepts)에 들어 있습니다. (The prophecy of the people of Confucianism, the Ten Commandments of Christianity and Islam, The excellent moral laws of such world religions are all included in Buddhist disciplines.)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自然的, spontaneously)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周圍, surrounding)도 편해집니다. (If we keep the rules properly, we will naturally feel comfortable and comfortable around us.)
우리가 참선(參禪, practices of Zen meditation) 염불(念佛, a Buddhist invocation)을 해서 깊은 명상(瞑想, meditate)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 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 뿐이지 마음이 정화(淨化, cleanup)가 안됩니다.(Even if we try to enter the deep meditation by preaching, we cannot enter the meditation without preconditioning the commandment.)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淨化, purification)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 안되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정화는 올 수가 없지요. 참다운 지혜(智慧/知慧, wise)는 반야[般若, prajna:모든 사물의 본래 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佛法, the law of Buddhism)의 진실 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知性, brain power)의 작용. 또는 최고 의 진리를 인식 하는 지혜. 산스 크리트어 ‘Prajñā’의 음역어이다.] 의 지혜입니다.(Meditation is about purifying the mind, but if the discipline is not underpinned, the purification of the mind by meditation cannot come. True wisdom is the wisdom of Banya.)
세속적(世俗的, earthly)인 분별지혜(分別智慧, discerning wisdom), 차별적(差別的, discriminate)인 지혜, 이런 것은 우리 인간 의식의 범위 내에서 분별하는 것이지,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cy)인 모든 존재 본질의 지혜는 못 됩니다. (The worldly wisdom of discernment, the wisdom of discrimination, is to discern within the bounds of our human consciousness. Not the wisdom of all transcendent beings.)
따라서 좀 재주(ability)가 있고, 학문적인 수련(修練, practice) 이 깊어서 분별적인 지혜는 어느 정도 익힌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든 가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tal)인 문제를 통틀 어서 제일의 것은 부처님께서 설 하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①입니다.(So even if you're a little talented and have a lot of academic training and you're able to learn some sensible wisdom, The most important thing, based on the phenomenal or transcendent problems that have left the so-called discrimination, is the Vanyabaramil that the Buddha established.)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른바 무위법(無爲法, the law of law)②입니다. 또는 무루법[無漏法, lawless lawless lawless lawless lawless law:번뇌를 완전히 떠난 법. 곧 무위법(無爲法)과 성도(聖道)를 이른다.] 이라고도 합니다.(Buddha's teachings are so-called lawlessness. Or it's also called Muru Law.)
무위법은 인연사이의 모양이 아닌 그 모양을 지양(止揚, refrained)한 생명자체(生命自體, life itself)의 가르침입니다. (The law of infidelity is not the shape between relationships, but the teaching of life itself that avoids the shape.)
이러한 것을 다른 종교의 교조(宗敎의 敎祖, the dogma of religion)가 전혀 모른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부처님처 럼 명확히 구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Although the doctrines of other religions did not know this at all, they did not clearly distinguish it like Buddha.)
가령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물질이라든가 여러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봉사활 동(奉仕活動, volunteer work)을 한다 고 합시다.(Let's say we're doing volunteer work, seeing things like matter to anyone and everything.)
하지만 유위법(有爲法, the art of making falsehood:인연으 로 생겨서 생멸하고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현상.)의 범위내에서 는 나라는 관념과 너라는 관념을 떠날 수가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 다는 그러한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But within the scope of the law, you can't leave the idea of the country and the idea of you, I see a lot of stuff. I can't leave such an award for watching less.)
해탈(解脫, nirvana)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인간의 본래적인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未洽, poor)합니다.(The ultimate Buddhist doctrine of liberation, at the same time, is quite insufficient for the original reason of our human beings.)
상(想, Ideal)을 떠나는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 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The act of leaving a statue, this is a guarantee of true freedom by the thought or deed.)
아무리 많은 재물(財物, wealth) 을 보시(布施, almsgiving)③한 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이 됩니다.(No matter how much wealth you see, you must do it regardless of the prize to make it a wholesale business.)
우리 불자들은 도업과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해서 쌓는 선업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We Buddhists need to know the concept of pottery and good work in the furniture.)
그러나 선업만으로는 우리의 번뇌를 모조리 소멸시켜서 영생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However, good work alone cannot extinguish all our troubles and lead us to escape eternal life.)
욕계를 초월하고, 색계를 초월하 고, 또 무색계를 초월하고, 천상 도 다 초월해서 정말로 대 자유 인, 참다운 자기인 대아, 진아의 존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업을 쌓아야 합니다.(It transcends the world of desire, transcends the world of color, transcends the world of color, transcends the world of color, and transcends the heavens, In order to rise to the existence of Dae-ah and Jin-ah, who are true self, you have to build a pottery.)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Buddha's teaching is to achieve true liberation.)
그러나 해탈은 커녕, 아직 선업도 못 닦은 이가 많은 것을 볼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However, it is easy to think that it is impossible to see that there are many teeth that have not yet been able to cultivate Zen, let alone give up.)
그렇더라도 절대로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세속 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Even so, there is absolutely nothing to be pessimistic about. Even though we're living a worldly life,)
인간의 몸으로 욕계의 굴레 가운 데 있더라도 우리의 불성 자체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Even in the midst of the yoke of the bath system with the human body, our Buddha itself was not contaminated at all.)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대사 와 같은 도인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 마 음자리만 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 같습니다.(Therefore, compared to Taoists such as Buddha Sakyamuni and Dharma, there is no difference in our hearts. same.)
= 華谷·孝菴의 좋은글 중에서 =
<청화(華靑)스님 글 編輯>
★ 청화 대종사(華靑 大禪師) 스님 프로필
o 청화:승려 강호성
o 출생:1924년 2월 14일
o 사망:2003년 11월 12일(향년 79세)
o 학력:메이지 대학교 중퇴
o 경력:1985.~ 태안사(泰安寺) 주지 스님
o 1924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靑華 스 님은 1947년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에서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o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o 60여년간 대흥사, 진불암, 상원암, 남미륵암, 월출산 상견성암, 백장암, 벽송사, 백운산 사성암, 혜운사, 태안사 등의 토굴에서 묵언(默言)과 일종식(하 루에 한 끼니) 및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에 전념했다.
60세가 넘어 토굴생활을 끝낸 스님은 1985년부터 10여년간 폐찰이 되어가 던 태안사를 중창했다.
o 2003년 11월 12일 전남 곡성 성륜사(聖輪寺)에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입적에 앞서 “이 세상과 저 세상 을 오고가는 것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네.
차세타세간 거래불상관(此世他世間 去來不相關) 몽은대천계 보은한세간(蒙恩大千界 報恩恨細澗)” 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o 법호는 무주(無住)이며 세납 81세, 법납 56세.
* 주석(註釋, annotation)
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aparamita):산스크리트어 prajñā-pāramitā의 음사.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분별과 집착을 떠난 지혜의 완성.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과 같음.
[요약(要約, summary)]
반야경에서는, 원래 8정도의 일면이었던 반야를 최고의 바라밀이자 열반으로 가는 최상의 길로 설하고 있다. 반야의 내용은 현상계뿐만 아니라 초월의 영역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세계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대한 깨달음이다.
반야사상이 형성된 시기는 주로 BC 100년경~AD 150년경에 걸쳐 있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8천송반야경〉이다. 이 경전의 독립된 판본의 소형 경전들 중 널리 알려진 것이 〈금강경〉이다.
원래 반야사상운동은 철저하게 본질적 실체를 배격함으로써 깨달음을 체험하려는 추구에서조차 정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했다.
반야바라밀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반야보살을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 부르기도 한다.
[본문(本文, the text)]
반야경에서는, 원래 8정도의 일면이었 던 반야(prajñā:지혜)를 최고의 바라밀(pāramitā:보살이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자 열반으로 가는 최상의 길로 설하고 있다.
반야의 내용은 현상계뿐만 아니라 초월의 영역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세계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러한 반야사상이 형성된 시기는 주로 BC 100년경~AD 150년경에 걸쳐 있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경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8천송반야경( 八千頌般若經)〉이다.
이 경전은 179년 최초로 지루가참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한 이래 여러 이역이 나왔다.
그뒤 독립된 판본의 소형 경전들이 18종 가량 나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금강경(金剛經)〉 이다. 나중에 동인도의 중관학파 계통 사원에서는 〈반야경〉에 대한 체계적· 학술적인 주석서들이 저작되었는데, 이는 애초에 반야사상운동에서 배격했 던 규정적인 합리주의를 오히려 반야사 상운동에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원래 반야사상운동은 철저하게 본질적 실체를 배격함으로써 깨달음을 체험하 려는 추구에서조차 정신을 자유롭게 하 려고 했다. 그러나 부정만이 이 경전의 내용 전부는 아니다. 이 경전들에서도 선에 도움이 되도록 현학적인 아비달마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논모 형식 을 도입하고 있다. 이들 경전에서는 또 한 인격적으로 호소력있는 신화의 인물 을 등장시켜 그 철학적 엄격성을 보완하 고 있다.
반야바라밀을 여성으로 의인화해 반야 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이 반야보살을 때때로 모든 부처의 어머니, 즉 '불모'라 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 구법승 법현은 400년경 인도에서 자신이 보았다는 반야보살상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발견된 상들은 모두 800년이나 그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반야보살상은 보통 노란색이나 흰색으 로 칠해져 있으며, 머리 하나에 2개나 그 이상의 팔이 있고, 손은 전법륜인 (dharmacakra-mudrā:설법하는 자세)을 취하거나 연꽃과 성스러운 경전을 들고 있다.
또한 염주를 걸치거나, 무지를 잘라내는 검 또는 공(空)의 본질을 상징하는 금강저, 지혜 즉 반야를 이루는 필수 조건으로서 물질적 소유의 포기를 상징하는 발우 등을 들고 있는 반야보살상도 흔하다.
반야보살상은 동남아시아 전역, 티베트, 네팔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탄트라 불교에서 반야보살은 원초의 부처인 본초불의 여성 배우자로 묘사된다.
② 무위법(無爲法, the law of law):
온갖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주관에 명료하게 드러나는 현상. 분별이 끊어진 뒤에 명명백백하게 주관에 드러나는 현상.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주관에 드러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의식의 지향 작용이 소멸된 상태에서 직관으로 파악된 현상.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탐욕〔탐(貪)〕과 노여움〔진(瞋)〕과 어리석음 〔치(癡)〕의 삼독(三毒)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
③ 보시(布施, almsgiving):자비심으 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풂. 오행(五行)의 하나이기도 하다.
[요약(要約, summary)]
육바라밀·십바라밀·사섭법 등의 제1의 덕목으로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이타정신의 극치이다.
보시를 행할 때는 베푸는 자도 받는 자도, 그리고 베푸는 것도 모두가 본질적으로 공한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시·법시·무외시의 삼종시를 널리 채택한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하고,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 아는 만큼의 불법을 설명하여 수련을 돕는 것이고,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어려움을 대신해 그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본문(本文, the text)]
육바라밀(六波羅密)·십바라밀(十波羅密)·사섭법(四攝法) 등의 제1의 덕목으 로서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이타정신(利他精神)의 극치이다. 보시를 행할 때는 베푸는 자(施者)도 받는 자(受者)도, 그리고 베푸는 것(施物)도 모두가 본질 적으로 공(空)한 것이므로 이에 집착하 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삼륜체공(三輪體空) 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한다. 보시는 이종시(二種施)·삼종시(三種施)·사종시(四種施)·팔종시(八種施)로 나누어진다.
이종시는 재시(財施)·법시를 말하고, 삼종시는 재시·법시·무외시(無外施)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종시를 널리 채택한다.
재시는 능력에 따라 재물을 보시하여 재물을 구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하고,
법시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아는 만큼의 올바른 불법을 설명해주어 그 사람의 수련을 돕는 것이고,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공포에 빠졌을 때 자신이 어려움을 대신하여 그 사람이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음식시(飮食施)와 가난한 이에게 재물을 주는 진보시(珍寶施), 그리고 올바른 법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신명시(身命施)를 삼종시라고 도 한다.
팔종시에는 수지시(隨至施)·포외시(怖畏施)·보은시(報恩施)·구보시(求報施)·습선시(習先施)·희천시(希天施)·요명시(要命施)·위장엄심등시(爲莊嚴心等施) 등이 있다.
수지시는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고, 포외시는 재물이 없어 지는 것을 걱정하여 차라리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남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보은시는 먼저 보시를 받은 것을 보답하 기 위하여 그에게 다시 보시하는 것이며, 구보시는 후에 보시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습선시는 조상에게 배워서 하는 보시이며, 희천시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하는 보시이다.
한편 요명시는 좋은 소문이 나기를 바라 서 하는 보시를 말하며, 위장엄심등시 는 마음을 크게 하여 아끼는 마음을 없애고, 정(定)을 얻어 열반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하는 보시이다. <끝>
첫댓글 歲月이 흘러 멋진 모습 感銘 받았으며 寶石같이 빛나며 高貴하고 所重하고 幸福하시고 神秘한 秘境은 언제나 변함없이 없고 사랑하는 마음은 自然의 風景과 잘 어우러 지시고 올려주신 맑고 밝은 希望과 勇氣가 용솟음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香氣로운 맛과 훌륭한 作品은 새로운 소식을 돋보이게 하고 職分에 최선을 다하며 또한 주어진 일에 調和가 잘 어울리는 모습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