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서·영동지방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민요, 정선(旌善) 아리랑은 일명 '아라리'라 부르고 있다.
정선 아리랑이 이 고장에 널리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인 조선조 초기라 전한다.
금부터 600여년전 고려(高麗)가 망함에 벼슬하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두문동(杜門 洞)에 은신했다.
그 중 일부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들은 고려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이냐 혹은 재기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송도에서 험악한 구름이 모여드는 시운(時運)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다. 가사는 이러한 시국이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들은 일생 동안 산나물을 뜯어 먹고 생활하면서 모시던 임금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고려 왕조의 회상과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등을 한시로 읊은 것이 지금에 정선 아리랑 가사로 인용된 것이 많다.
선비들은 자신의 한 맺인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불렀다. 이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뜻을
풀이하여 알려 주면서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다.
그 후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고달픈 민성(民聲)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율(후렴구)을 붙여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 (또는 경복궁 중수시)라고 한다.
한일 합방 후부터 일제 말엽까지에는 나라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이 담긴 노래는 탄압됨에 따라 애정과 남·여 관계의 정한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았다.
아우라지 처녀상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에 있디. 이곳은 구절리에서 흘러든 송천(松川)과 중봉산에서 발원하는 골지천(汨之川)이 합류하여 두 물길이 한 물길로 어우러진다. "어우러지다"를 정선 사투리로 "아우라지"라 한다. 남한강 1천리길 물길따라 목재를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 시발지점으로 각지에서 모여든 뗏꾼들의 아라리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다.
뗏목과 행상을 위하여 객지로 떠난 님을 애달프게 기다리는 마음을 적어 읊은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 가사이다.
아우라지가 있는 여랑면에 아우라지 처녀상, 남자상과 정자(여송정)를 건립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전하고 있다.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생강꽃)이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 군청>
▶특색
정선 아리랑은 그때그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상을 노래한 것이다.
그때그때의 지닌 감정을 속임 없이 전래의 가락에 맞추어 부름으로써 가사가 많다.
자연과 인생을 비유하여 노래한 것과 진리를 노래한 것이 많고
낙향 선비들에 의해 불려진 노래는 한시가 인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