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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 7-11절. 구약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신약의 직분
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1)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분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임을 인식하고, 사람의 칭찬이나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옛 언약의 직분이고, 새 언약이 오면 없어질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또, 모세의 직분은 돌판에 새긴 추천서와 같으나, 바울의 직분은 육의 심비에 새긴 추천서와 같이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또, 모세의 직분은 사람을 율법으로 정죄하고, 죽게 만드는 망나니와 같은 직분이지만, 바울의 직분은 죄를 용서해주고, 죽을 사람을 살려주는 좋은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직분은 그 일이 의문 즉 율법 문서로 기록된 것이지만, 바울의 직분은 그 일이 영으로 기록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므로, 모세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지 말고, 바울처럼 용서하고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써 살리는 성도와 직분자들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2. 오늘은 <구약의 직분(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신약의 직분(바울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 외에 바울이 가장 위대한 직분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들을 합니다.
물론 모세보다도 바울이 더욱 위대하다고 합니다.
성경 기록에 있어서도, 모세는 5권의 책을 기록했지만, 바울 사도는 13권의 책을 기록했습니다.
(2)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기 쉬웠습니다.
그처럼, 모세와 모세의 율법이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3) 이러한 때에, 바울 사도가 모세의 율법은 정죄의 기능만 하고,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모두 죄용서와 천국 구원을 얻는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바울의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예루살렘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바울을 이단시하고, 거짓 사도로 몰아붙이기까지 했습니다.
(4) 이와같이 바울에 대해서 거짓 사도요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까지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율법과 시행세칙인 성결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사도라는 추천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모함을 했습니다.
(5) 그러자, 바울 사도는 자신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을 필요가 없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사도로 임명을 받은 사람이고, 바울의 추천서는 고린도 교인들 자체이며, 바울의 새 언약의 직분은 모세의 옛 언약의 직분보다도 더욱 위대하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6) 이처럼 바울의 사도직이 모세의 직분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말은 모세를 최고의 스승으로 섬기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었을 것입니다.
(7)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 있게, 새 언약의 직분인 바울의 직분이 옛 언약의 직분인 모세의 직분보다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7절. 모세의 직분의 영광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영광이고, 바울의 직분의 영광은 예수님을 모신 영원하고 완전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8-9절. 모세의 직분은 율법으로써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직분이지만, 바울의 직분은 예수님을 소개함으로써, 사람이 죄에서 해방받고, 의인으로서 천국에 들어가게 만드는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10-11절. 모세의 직분이 어둠을 밝혀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만드는 촛불과 같은 영광이라면, 바울의 직분은 예수님을 소개함으로써 율법으로 밝혀진 죄악을 모두 씻어주는 태양과 같은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옛 언약의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언약인 모세의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옛 언약은, 이제 언약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모두 씻어주심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의 직분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몽학선생(초등교사)과 같은 기능을 할 뿐이고, 이제 새 언약이 완성된 이 시대에는 그 영광이 없어지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8) 다시 말해서, 4-11절은 구약직에 대한 신약직의 우월성을 말씀한 것인데, 앞부분인 4-6절은 그 핵심어가 ‘새 언약’이었고(6절), 뒷부분인 7-11절은 그 핵심어가 ‘영광’입니다(7, 8, 9, 10, 11절).
구약 직분인 모세의 직분과 신약 직분인 바울의 직분의 비교에 있어서, 그 핵심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은 쇠하여진다’는 것이고, ‘신약직분자인 바울의 얼굴에 반영된 영광은 점점 더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에 관한 이 대조는 구약의 임시성과 불충분성, 그리고 신약의 영원성과 유효성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 NIV-SB p.1766).
7절.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f the ministry of death, in letters engraved on stones, came with glory, so that the sons of Israel could not look intently at the face of Moses because of the glory of his face, fading as it was,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Εἰ δὲ ἡ διακονία τοῦ θανάτου ἐν γράμμασιν ἐντετυπωμένη λίθοις, ἐγενήθη ἐν δόξῃ,
if but the ministry of death, in letters having been engraved on stones, was been in glory
직역하면 ‘그러나 돌에 새겨진 율법 조문에 있는 죽음의 직분도 영광 가운데 있었다면’이란 뜻입니다.
‘새겨진’(ἐντετυπωμένη)은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engraved) 이미 새겨져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영광 가운데 있었다면’에서 동사(ἐγενή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been) 과거에 확실히 영광 가운데 있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ὥστε μὴ δύνασθαι ἀτενίσαι τοὺς υἱοὺς Ἰσραὴλ εἰς τὸ πρόσωπον Μωϋσέως
so as not to be able to look intently the sons of Israel to the face of Moses
‘주목하지 못하였거든’에서 앞의 동사(δύνασθ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able) ‘--할 수 있다’(부정사 μ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뒤의 동사(ἀτενί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look intently) 확실히 주목하여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διὰ τὴν δόξαν τοῦ προσώπου αὐτοῦ, τὴν καταργουμένην,
because of the glory of the face of him, that being fading
‘없어질’(καταργουμένην)은 현재 분사 수동태로서(being fading) 현재 사그라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돌에 글자로 새겨진 율법 조문은 죽음을 가져다주지만, 그런 직분도 영광으로써 주어졌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얼굴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Now if the ministry that brought death, which was engraved in letters on stone, came with glory, so that the Israelites could not look steadily at the face of Moses because of its glory, transitory though it was)
New Living Translation: 돌에 새겨진 율법 조문으로 주어진 옛길은 비록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게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옛길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왜냐하면 모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지만, 그 광채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The old way, with laws etched in stone, led to death, though it began with such glory that the people of Israel could not bear to look at Moses' face. For his face shone with the glory of God, even though the brightness was already fading away.)
1. 오늘은 모세의 직분 보다 바울의 직분이 더욱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 외에 바울이 가장 위대한 직분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합니다.
즉 모세보다도 바울이 더욱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성경 기록만 보더라도 모세는 5권의 책을 기록했지만, 바울은 13권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기 쉬었습니다.
그처럼 모세와 모세의 율법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바울이 모세의 율법은 정죄의 기능만 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 즉 예수님을 믿으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나 죄 용서와 천국 구원을 받는다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도 바울의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예루살렘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바울을 이단시하고 거짓 사도로 몰아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에 대해서 거짓 사도요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까지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어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율법과 시행규칙인 성결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사도라는 추천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모함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을 필요가 없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사도로 임명받았고, 바울의 추천서는 고린도 교인들 자체이며, 바울의 새 언약 직분은 모세의 옛 언약의 직분보다 더욱 위대하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사도직이 모세의 직분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말은 모세를 최고의 스승으로 섬기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 있게 새 언약의 직분인 바울의 직분이 옛 언약의 직분인 모세의 직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처럼 모세의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옛 언약은 이제 언약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들 대신 죽으심으로써 옛 언약인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의 직분인 모세의 직분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초등교사(몽학선생)과 같은 기능을 할 뿐이고, 이제 새 언약이 완성된 이 시대에 옛 언약의 직분은 그 영광이 시들어버리는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2. 4-11절은 구약 직분에 대한 신약 직분의 우월성을 말씀한 것인데, 앞부분인 4-6절은 그 핵심 단어가 ‘새 언약’이고(6절), 뒷부분인 7-11절은 그 핵심 단어가 ‘영광’입니다(9, 10, 11절)
구약 직분인 모세의 직분과 신약 직분인 바울의 직분 비교에 있어서, 그 요지는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사그라진다는 것이고, 신약 직분자인 바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점점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이 대조는 구약의 임시성과 불충분성 그리고 신약의 영원성과 충분성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서 ‘직분’에 대한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3. 본 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수여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려고 내려오는 장면입니다( 출 34:29-35).
이때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해주는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욱 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율법 조문은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10-12절에는 설명이 가해져 있습니다.
즉 돌에 새긴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과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아담 이후 범죄로 부패해져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명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한 것은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5. 한편 7절에서 바울은 모세의 영광을 사라져가는 영광, 없어질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일부 유대교인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억지를 부렸지만(Targum Ongelos), 바울은 그 광채가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6.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이 결코 나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로마서 7장 12-14절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인간의 마음속에 물들어 있는 죄성과 악한 언행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율법의 정죄와 사망의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에 새겨진 율법은 그 죄악을 정화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law engraved on stone could not purge away that evil: NIV-SB).
7. ‘죽게 하는 직분’( ἡ διακονία τοῦ θανάτου: 죽음의 직분)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직분’(a ministry leading to death)이라는 뜻입니다(Linguistic Key p.460).
즉 모세의 직분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책감을 갖게 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영원한 정죄에 이르게 하므로 ‘죽음의 직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직분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죄용서와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생명의 직분’입니다.
8. ‘없어질 영광’( the glory was fading away/ passing away)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나갔으므로 소멸되어가는 영광이었으나, 바울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으므로 길이 있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7-11.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9. 성경적 사례
(1) 골로새 교회는 율법주의 이단이 침투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서 율법주의 이단(율법주의적 영지주의)은 고기를 먹는 것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절기 지키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 지키는 일을 가지고 교인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도 고기를 먹거나 포도주를 마시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갈까 봐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2)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즉 로마교회 교인들도 고기를 먹는 것이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교인들이 갈등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먹는 것이나 안식일 지키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4:3-4.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로마서 14:5-6.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리고 고기나 포도주를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로마서 14:20-23.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러면서 바울은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 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즉 주님을 믿지 않고 율법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고기를 먹는 것은 죄요, 주님을 믿지 않고 율법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포도주를 먹는 것도 죄요, 주님을 믿지 않고 율법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지 않고, 유대교인들처럼 율법주의 생활을 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10. 실제적인 사례
서울의 어떤 대학생이 율법주의 이단에 출석했습니다.
거기서는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서 이단 집단에 출석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서 마음대로 술 먹고 마음대로 향락을 즐겼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갈등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신앙생활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같은 대학 학생 중에 어떤 학생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평안과 자유를 누리면서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가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는 것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는 말씀대로 날마다 예수님 성령님을 모시고 생명과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령님의 인도 속에서 술 취하지도 않고, 방탕하지도 않으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으면서 늘 복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율법주의 생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죄악 된 방탕 생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날마다 기도하고 성령님을 모시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ow will the ministry of the Spirit fail to be even more with glory?
πῶς οὐχὶ μᾶλλον ἡ διακονία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ἔσται ἐν δόξῃ;
how not more the ministry of the Spirit will be in glory ?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 하겠느냐’에서 동사(ἔσται)는 미래형입니다(will be).
English Standard Version: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않겠느냐? (will not the ministry of the Spirit have even more glory?)
1. 율법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인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약의 직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치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서(고후 4:6),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빛입니다.
2. 오늘 말씀은 율법의 직분보다도 복음의 직분이 훨씬 더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바울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날은 이 말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바울 당시에 이 말을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기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여 새 언약의 직분자인 바울은 옛 언약의 직분자인 모세보다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 보다 새 언약이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이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인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이 모든 죄를 대속하셨음을 말해주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3. 유명한 전도자 <무디> 선생이 한번은 어떤 전도자 보고 “왜 당신은 날마다 율법만 전하고 다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전도자가 말하기를 “율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율법을 전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로 가득할 것입니다. 나를 무시하는 당신은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소”라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무디가 “그러면 당신이 율법을 전해서 율법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실은 한 사람도 구원받는 사람이 없어서 가장 고민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러자 무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으로 정죄했으면 복음을 전해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율법으로 보면 당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한 죄를 모두 다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소. 그러니 당신도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시오”라고 전도했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대로 살지 못한 것만 책망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기 바랍니다!
4. 바울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맡은 신약시대의 우리 모든 직분자들이 구약 모세의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럽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복음의 직분을 가졌음을 깨닫고, 복음 전도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영혼이 구원받기를 축원합니다!
9절.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f the ministry of condemnation has glory, much more does the ministry of righteousness abound in glory.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εἰ γὰρ ἡ διακονία τῆς κατακρίσεως δόξα,
if for the ministry of the condemnation glory
직역하면 ‘정죄의 직분이 영광이 있다면’이란 뜻이고, 동사는 없으나 한글 번역은 적절한 번역입니다.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πολλῷ μᾶλλον περισσεύει ἡ διακονία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δόξῃ.
much more abounds the ministry of the righteousness glory
직역하면 ‘의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넘치도다’는 뜻입니다.
‘넘치리라’(περισσεύει)는 현재형으로서(abounds) 언제나 넘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정죄를 가져다주는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면, 하물며 의를 가져다주는 직분은 얼마나 더욱 영광스럽겠는가! (If the ministry that brought condemnation was glorious, how much more glorious is the ministry that brings righteousness!)
1. 앞에서는 영의 직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의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의 직분은 사람을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었지만, 복음의 직분은 죄인에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가져다주고 영생을 주는 참 좋은 직분입니다.
2.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움으로써 율법의 절대적인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로마서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복음은 예수 믿는 인간의 죄를 사면해주고 인간을 의롭게 만들고 영생을 얻게 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전하여 사람을 정죄하는 직분이 영광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믿게 하여 죄 용서를 받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복음의 직분이야 말로 더욱 영광스럽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3.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δικαιοσύνης)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즉 본문이 말씀한 의는 윤리적인 무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결 관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음에 이른 인간이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가 회복되고 연결된 상태를 ‘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의’란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해서 의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교통하시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관계를 회복한 것은 온전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감사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4. 이러한 의의 직분 속에는 죄를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에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복음 전도로써 죄인들이 예수 믿고 속죄를 받게 하는 복음 전도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영 죽을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고 영생 천국에 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5.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영생 천국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꾸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고, 우리의 마음대로 행동하여 사람들에게 실수하고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내 맘대로 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가 탕자처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아무리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인정하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전도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시고, 복음 전도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인이 구원받게 하시고, 별과 같이 빛나는 전도의 상급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deed what had glory, in this case has no glory because of the glory that surpasses it.
영광되었던 것이---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καὶ γὰρ οὐ δεδόξασται τὸ δεδοξασμένον ἐν τούτῳ τῷ μέρει
even for not it has been glorified that having been made glorious in this of the respect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 점에서 영광되었던 것이 영광되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란 뒤에 나오는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란 뜻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란 구약 모세의 영광을 가리키는데, 동사(δεδοξασμένον)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made glorious) 이미 영광스럽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영광될 것이 없으나’에서 동사(δεδόξασται)는 완료 수동태로서(it has been glorified) (구약 모세의 영광이 신약시대의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광이 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εἵνεκεν τῆς ὑπερβαλλούσης δόξης.
because of the surpassing glory
직역하면 ‘능가하는 영광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능가하는’(ὑπερβαλλούσης)은 현재분사로서( surpassing) 현재 더 능가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 정말 이 경우에는 한때 영광스러웠던 것이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영광 때문에 전혀 영광스럽지 못하게 되었다. (Indeed, in this case, what once had glory has come to have no glory at all, because of the glory that surpasses it)
New Living Translation: 사실 첫 번째 영광은 새로운 영광과 비교해볼 때 전혀 영광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In fact, that first glory was not glorious at all compared with the overwhelming glory of the new way)
1. 본 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버리는 것처럼, 촛불 아래서 밝다고 생각하다가 전깃불이 들어오면 촛불을 잊어버리듯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화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성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8:7-13.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3.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더 이상 율법주의자들의 지배 아래 있지 말고, 새 언약의 직분자인 바울의 지도 아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율법주의 지도자들의 추천서를 자랑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구약의 모세 직분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루살렘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의 추천서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대단한 확신과 자부심이었습니다.
즉 바울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만 있던 때라서 구약의 모세 직분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들과 야고보 장로 같은 직분을 최고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직분자이며, 심지어 베드로 같은 사도들 못지않는 위대한 직분자임을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이야 바울이 모세보다도 베드로보다도 더 위대한 사도임을 다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상황에서 바울이 이러한 직분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확신이었습니다.
4.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러한 자부심과 소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들에게 아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어떤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옛날에 암행어사가 겉으로는 비록 허름한 옷을 입은 거지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마패가 있어서 왕의 전권대사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직분을 잘 감당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큰 상급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f that which fades away was with glory, much more that which remains is in glory.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εἰ γὰρ τὸ καταργούμενον διὰ δόξης,
if for that fading away through glory
직역하면 ‘왜냐하면 없어져가는 것이 영광으로 말미암았다면 (길이 있는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없어질’(καταργούμενον)은 현재분사로서(fading away) 현재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πολλῷ μᾶλλον τὸ μένον ἐν δόξῃ.
much more that remaining in glory
‘길이 있을’(μένον)도 현재분사로서(remaining) 언제나 남겨져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왔다면, 하물며 영원한 것은 더욱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For if what was being brought to an end came with glory, much more will what is permanent have glory.)
New Living Translation: 대체 되어질 옛것이 영광스러웠다면, 하물며 영원히 지속될 새것은 더욱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So if the old way, which has been replaced, was glorious, how much more glorious is the new, which remains forever!)
1.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나간 시대에만 존재 의미를 가질 뿐 천국에서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4절에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과는 달리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더 이상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13장 31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버린 율법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복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2. 모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니 없어질 것입니다.
정죄를 받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나에게는 정죄의 직분인 모세의 직분은 필요가 없으니 없어질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추종하면서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서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사라질 것이고, 복음 전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바울의 직분은 영원할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할례를 주장하고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라고 하고,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미 이러한 모세의 직분이 사라져가는 것이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복음의 직분이 영원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바울 사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지만, 바울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이 더욱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율법주의자들은 추천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추천서가 없는 바울의 말 보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이 더욱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이고, 특히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주님께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많은 교회들을 설립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디도의 훌륭한 중재로 대부분의 교인들이 바울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으로 끝까지 바울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추천서 문제를 가지고, 결국 옛 언약과 새 언약 그리고 율법과 복음이라는 신학적인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바울이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에서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복음의 직분을 잘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새 언약의 직분, 복음 전도의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율법주의자들 속에서도 복음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 전도의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큰 영광과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