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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을 위한 본성의 다스림
출애굽기 22:1~11
(출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일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출 21:29)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출 21: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부과하면 무릇 그 명령한 것을 생명의 대가로 낼 것이요
(출 21: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법규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출 21: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출 21: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출 21: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
(출 21:35)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
(출 21:36)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지니라
성격이 몹시 급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기다릴 줄 모르기에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이 들어오기 전에 건널목을 건너다 큰 사고를 당할 뻔하였고, 음식도 식혀 먹을 줄 몰라 혀를 데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 청년이 자기의 성급함을 하나님께 아뢰어 고침을 받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주여 제가 마음이 성급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사오니 저의 성격을 지금 당장 고쳐 주셔서 느긋한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의 특성이 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본성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음식을 먹을 때 빨리 먹는 습관이 있습니다. 음식이 앞에 놓이면 빨리 먹어치워야 된다는 급한 사명감이 생깁니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으면 어서 빨리 먹어 식탁을 말끔하게 하여야 된다는 역사적인 사명의식까지 생깁니다. 이런 제 습관을 제 아내가 무려 35년간을 지켜보면서 고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지금껏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 되어 제 아내도 저와 더불어 음식을 빨리 먹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부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목사님들 가운데서는 제가 당연히 1등을 합니다. 그리고 사모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살펴보면 제 아내 역시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1등을 합니다.
사람의 본성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는 것이 바른 처사일까요? 아니면 본성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을 때는 그 마음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담아 그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뜻을 행하기에 합당한 성품을 주셨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타락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대항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이란 탁락한 본능을 말합니다. 이런 타락한 본성을 다른 말로 말하면 육체의 소욕이라고 했습니다.(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본성을 잘 처리해야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에 속한 생명체로 성숙됨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집에서 기르는 소가 사람을 죽인 경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부지중에 실족하여 구덩이 빠지게 한 경우 그리고 소끼리 싸우다 한 쪽 소가 죽은 경우에 어떻게 배상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축에 대한 예를 들어 말씀을 나눈다면 오늘 이 시대는 농경사회가 아니기에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고전 9:9~10)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도 소에 대한 규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지혜로운 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는 유순한 동물이고 집에서 잘 길들여져서 농사일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동물입니다. 그런 소가 전혀 예기치 못하게 사람을 치받아 죽였습니다. 그럴 경우에 율법은 그 소를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에서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소만 죽일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본성은 평온할 때는 온순한 것 같으나 어느 날 돌발적인 상황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성향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그런 성향이 있음에도 이를 묵과(默過)하게 되어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자기도 죽음에 이르는 저주에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기질이 내 안에 인간 최대의 악을 저지르게 되는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 서울구치소에서 근무하였던 박효진 장로가 지은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에서 살인한 사람의 특징은 한결같이 제 정신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악한 영에 사로잡혀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예로 1993년 장위동에서 발생한 일가족 5명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 이호성씨를 들고 있습니다. 박장로가 이 청년을 처음 보았을 때 살인은커녕 단돈 100원도 빼앗을 수 없을 만큼 유순하고 착하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의 친 혈족을 무려 다섯이나 죽여서 정원에 암매장할 정도의 잔혹함을 보일 수 있었는지 너무 당혹하여 그 사연을 들어 본즉 살인을 저지르기 3일 전부터 돌연 이상한 물체가 나타나서 밤낮을 따라다니며 그를 비웃고 빙글빙글 그 주위를 떠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힌 지 3일째 되던 날 아버지에게 돈을 좀 얻으려가 갔다가 퇴짜를 맞고 2층에서 내려오는 바로 그 악령이 턱 가로막으며 첫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올라가서 죽여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이라 이를 따를 수 없다고 하자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짓눌려 신발장에 있는 큰 망치를 들고 자기의 친부모와 형 내외 그리고 조카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살인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이 땅에 온 마귀의 속살거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참혹한 죄악입니다. 내 안에 이런 마귀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귀는 지옥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지옥의 특징은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타오르는 정욕이 있고 미움과 다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앞세우는 교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수시로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날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사탄의 계략에 넘어갈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한 본성이 마귀가 달라붙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만약에 그런 속성이 있다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아 두 번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에 빠지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미리 죽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대단히 추상적인 말씀이기에 이를 실제로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때 자신도 함께 죽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을 인식하여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나의 죄로 인하여 죽으심을 인정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나는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을 고백할 때 내 안에 성령의 임재가 있고 나의 본성에 의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마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우는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는 은 삼십 세겔로 보상하고 그 소는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갸롯 유다에 의하여 은 30에 팔려 가셨습니다. 이것은 종 한사람의 몸값을 말합니다. 결국은 소에 받힘을 받은 남종과 여종은 자기의 몸값을 얻을 수 있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 됩니다. 소 임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 억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돈 잃고 소까지 죽여야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본성 안에 깃들여 있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습성이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천대를 받고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상처 난 부분을 달래주고 보상해 줘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에 갑질 논란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치킨사업을 하는 창업주는 자기의 여비서를 술을 마시게 한 후 호텔로 유인하다가 발각이 되어 큰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모습을 갖는 것이 정당한 모습일까요? 남자는 술을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옳습니까? 성경의 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기르는 가축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방치한 결과 상대방이 상해를 입었다면 여기에 따른 배상을 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경각심을 불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킨 창업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수치를 당한 여성에게 보상과 더불어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행하지 않고 자기를 정당화시키면 그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과 같은 본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나가서 더욱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우발적으로 발생한 작은 일에 대하여도 책임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병원에 갔다가 주차장에 세운 차를 운전하여 나오다가 옆에 세운 차의 범퍼를 긁힌 적이 있습니다. 저의 주위에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태연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양심에 그럴 수 없어 차에 제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남기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보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0만원의 수리비를 지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약간 후회도 있었고, 유별나게 양심적으로 해서 손해를 보았지 않았나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아셔야 될 것입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가 더 큰 사건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작은 것으로 심었는데 나중에 그것 보다 더 큰 열매로 다가와 더 많은 손실을 입게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설령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도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순순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 대하여 자주 변명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33~34절에서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하므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보상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가 차지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덩이는 우물이나 샘을 뜻하며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런 우물은 개인의 재산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깊이 판 웅덩이는 짐승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은 항상 그것을 두꺼운 판자나 평평한 돌로 덮어 미연에 사고를 방지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를 무심하게 여겨 소나 나귀가 빠지면 이에 대한 배상을 하여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피해를 입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심결에 내던진 말이 상대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내가 우선이 아닙니다. 상대가 우선이고 상대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가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35절에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연한 사고를 낸 가해자의 소를 팔아 그 값을 피해자와 똑같이 나누도록 한 것은 결과적으로 양측이 같은 입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같은 병자(病者)끼리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處地)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겨 동정(同情)하고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내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었으나 내 소는 살아있으니 되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자기의 소를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지를 헤아리는 마음이 내 안에 담겨 있는 본성대로 살지 않고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나의 모습을 잘 살펴보시오! 이기적인 본성으로 다를 사람을 짓밟고도 오르려고 하는 마음은 없는지, 나의 무심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없는지 돌이켜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심하게 흘러 보낸다면 내 안에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지 않는 악한 사람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악한 살인자가 유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도 충분하게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 마음에서 나오는 사소한 것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처리함을 받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것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큰 것이라도 그렇게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은 나를 다스리고 본성을 거슬려서 행하는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