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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면
함석헌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사도행전, 1:6~8)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도행전, 2:41)
사람은 다 위대하여지기를 원한다. 정신적 불구자 아니면 이 생각은 누구나 어느 때나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지는 본래의 욕구다. 기독교도를 학살한 것으로 유명한 로마의 폭군 네로는 그 난정의 결과 내란이 일어 마지막에 도망하다가 죽게 되매 종자를 돌아보고 "누구 내게 죽는 것을 보여다고” 하였다 하며 거기 응하는 자가 없으매 종내 자문을 하며 하는 말이 “이러한 예술가가 죽고 만다고야 가석(可惜)하지 않느냐” 했다고 한다. 저는 자기를 위대한 시인으로 자인했고 웅대한 시를 짓기 위하여 로마 시에 불을 질렀다는 사람이다. 그러나 저만 아니라, 자기를 위대한 것으로 만들자는 것은 누구나 일생의 목표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으로 하면 부당한 듯이 보인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온갖 욕심을 버리기를 요구하고 어떻게 적고 낮은 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있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스스로 위대하여지자는 욕심은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는 진실한 청년이 왕 왕 번민을 하는 일이 있다. 그런 번민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하는 것보다 귀하다. 그러나 거기 형식적으로 얽매여서는 안된다. 성서는 결코 사람을 적게 만드는 책이 아니다. 도리어 크게 무한히 크게 만드는 책이다. 위대해지자는 요구는 먹기를 요구하는 본능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 악한 것은 아니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선용하느냐 어떻게 정화하느냐 하는 데 있다. 성서의 진리에 형식적으로 거리끼어 여러 청년이 무위중에 생명을 허비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실 가석(可惜)한 일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역사상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위대한 일을 한 실례를 본다. 이것을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하여서 배우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무엇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냐.
둘째, 어떻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느냐.
1.
사람들이 위대하여지기 위하여서 위선 하는 것은 위대한 소유자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즉 위대한 것을 소유함으로 제가 위대해지자는 것이다. 그 위대한 것이란 혹 부(富)도 될 수 있고 혹 귀(貴)도 될 수 있고 혹 학문도 될 수 있고 또 혹은 예술품도 될 수 있다. 사실 그런 실례는 없지 않다. 인격으로 하면 아무것도 아니되 어떤 호운(好運)으로 거대한 부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된 고로 일세에 이름이 들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도덕으로 하면 도무지 취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두뇌가 총명하여 넓은 지식을 가진즉 저를 선생으로 대접하고 명사로써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사람을 위대케 할 수 없다. 사람의 손으로써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사람보다 적은 것이다. 고로 사람을 위대케 만들 수 없다.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인간이라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참 위대란 것은 인간을 인간적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고로 위대한 것을 형용할 때는 초인간적이라고 한다. 베드로도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태복음, 19:27) 하는 때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때에도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러면서도 이 본문에서 보는 것 같은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 사람들이 하는 것은 위대한 사업을 성취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말하자면 완전 연소를 시켜서, 위대한 것이 되려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여기는 경탄할 만한 것이 있다. 혹은 국가를 건설하는 데 혹은 교육을 보급시키는 데 혹은 교단을 조직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것은 확실히 위대해지는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카에는 펜실베이니아라는 주가 있는데 이것은 당초에 월리암 펜이 개척하여 세운 나라였다. 고로 그 이름을 따라 펜실베이니아라고 한다. 남아프리카에는 로데샤라는 지방이 있는데 이것은 그곳을 정복 개척한 괴걸(怪傑) 세실 로즈의 이름에 의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주가 있고 남아연방이 있는 날까지 펜과 로즈의 이름은 깉을 것이다. 영어학자 사이토 히데사부로(齊藤秀三郞)씨는 일생에 가족과 담화함에 10분 이상을 비(費)하는 일이 없이 공부하였다는데 그 때문에 그는 일본 영어학계에 위대한 공적을 끼쳤다.
그와 같이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는 것은 한 가지 위대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사람이 자기의 범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 로즈는 임종에 말이 “한 것은 적고, 할 것은 많고!”라고 했다고 한다. 대사업을 성취한 로즈로도 자기가 진실로 위대해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고로 그 탄식이다. 베드로도 예수의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그런 사람이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저가 원한 것은 그 회복운동에 일대 맹활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적은 이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사야, 예레미야 이래 이스라엘인이 주야 갈망하는 민족적 대이상이었다. 예레미야가 70년 후면 메시아가 오신다고 하여 기다렸더니 아니 오시어서 다니엘은 7주년씩 70년이라고 해석하여 490년을 기다렸더니 그래도 아니 오셨고 마카비가의 운동으로 되는가 했더니 그도 되지 않아서 예수의 오시던 때쯤은 사람들의 맘이 미칠 듯한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덤비는 군중이 예수를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가장 가까이 예수를 뫼시고 열심 있는 베드로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일이요 이제 떠나시는 마당에서 이때인가고 물었던 것이다. 그때 만일 예수가 그렇다 이때로다 하고 일언만 하셨더라면 베드로는 용약(勇躍)하여 나섰을 것이다. 사업의 베드로!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무엇일까. 마카비형제들과 같이 비장한 활동 후에 한 줄기 벽혈(碧血)을 뿌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위(偉) 아닌 것 아니요 대(大) 아닌 것 아니다. 그러나 오순절날에 보는 것 같은 그런 베드로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에 몸을 바쳐도 사람은 사람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오순절날에 갑자기 위대하여졌다. 그 위대는 어떤 위대인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사도행전, 2:37~41)
이런 것을 대체 역사상에서 볼 수 있었던가. 누가 겨우 12시간 내의 일장 연설을 가지고 3천 명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들의 생활을 일변시켜놓을 수 있을까. 스스로 대정치가라는 사람은 한 번 시험해 볼 것이다. 스스로 대사상가라는 사람은 한 번 시험해 볼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것을 흉내 낼 인간은 없다. 한 시간 내에 폭탄으로 전 세계를 점령하는 때는 올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3천 명의 마음을 정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의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한복음, 14:12) 하신 것은 이것이다.
그러면 그는 무엇으로 그렇게 되었나. 그 사실을 저 자신더러 말하라면 이것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2:32)
다른 것 아니요 예수의 증인이 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말한 것이 3천명 사람의 양심을 찌른 칼이요 그들을 회개시켜 신생에 나서게 한 원동력이다. 참으로 위대한 것은 진리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진리는 물건보다도 사람보다도 세계보다도 위대한 것이다. 고로 그것의 증인이 될 때 사람은 조그마한 인간의 범위를 초출(超出)하여 위대한 존재가 된다. 내가 정복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요 나를 정복하는 자가 참으로 위대한 자다. 나를 발휘하는 사업이 위대한 것이 아니요, 나로써 자기 발휘의 기구로 삼는 그것이 과연 위대한 것이다. 진리가 이것이다. 예수가 이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날로부터 이 진리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의 종이 되었다. 그때에 위대하여졌다. 사람으로서도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할만한 일을 실지로 행하였다. 진리는 모든 것이 의존의생(依存依生)하는 원동력, 원리, 원천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하는 자, 즉 몸으로써 그것을 증험하는 자는 위대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실례는 자연계에서도 볼 수 있다. 퀴리 부인은 라듐의 증거에 일생을 바쳐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뉴턴은 만유인력의 증인이 되어서 그 이름이 길이 깉게 되었다. 종교가에서보다도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는 과학자 중에 도리어 위대한 인물이 많이 있는 것은 그 원인이 그들이 겸손한 무아의 태도로 오직 자연 속에 있는 진리 그것의 증거에 충실한 데 있다.
자연계에서 그렇다면 도덕세계에는 더욱 그렇다. 천지를 꿰뚫는 공의(公義) 공도(公道)의 증인이 될 때 인격은 위대한 빛을 발한다. 포은(圃隱)의 위대는 그의 의의 증거 때문이요, 나이팅게일의 위대는 애(愛)의 증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적인 자물계(自物界) 혹은 도덕계의 한 가지 혹 두 가지의 증인이 되는 것보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더욱 큰일이다. 저는 한 부분이 아니요 단순한 원리만이 아니요 도(道) 그 자체, 진리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며, 산 완전자이기 때문이다. 위대를 바라는 자는 저에게 갈 것이다.
2.
그러나 그것을 하지 못한다. 위대한 것이 예수에 있고 그의 증인이 되자 하면서도 사람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 못하는 까닭은
첫째는 예수를 증거하는 것으로 소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사람의 소원은 얻는 데 있다. 그런데 일개 실패가, 일개 사형수인 예수를 변호하여서 소득이 아무것도 있을 것 없다.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위험이 있다. 당시의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게도 있다. 참 진정코 예수의 증인으로 나서면 그 순간에 이때까지 내게 속 했던 모든 것이 다 떨어져나가고 사방에서부터 위험이 몰려들어온다. 전도를 하면서 아직도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오히려 예수의 충성한 증인이 되지 않은 데 한해서다.
둘째 인간의 자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증인이 됨은 예수의 종이 됨이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삶이다. 사람의 귀한 것은 자유, 자주에 있는데 그것을 버림은 인간으로서 가치를 잃는 일이다. 사람이 위대해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가치를 높이고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통일한 때가 아니면 안된다 이렇게 생각한다. 덕행이 있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고로 사람이 그대로 있는 한은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없다. 마음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1장 8절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시면”이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이 되는 데 절대 필요조건이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으로 생활 목적을 삼을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영의 권능이 아니고는 이길 수 없는 세력이 사람의 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바의 공정(公廷)에까지 예수를 따라가서 증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베드로의 것이나, 그의 양심의 실행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요 딴 것이었다. 이것은 성령에 대적하는 악령이다. 이 악령은 사람을 속이는 큰 사기한(詐欺漢)이다. 아담에서부터 거짓말로 사람을 속여 그의 지배하에 두는 자다. 그는 사람에게 가장 반갑게 들리는 ‘자주’ ‘자존’이라는 것을 가지고 인류를 속인다. 저는 아담에게 하나님과 같이 위대해지는 것을 약속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속았으나, 그 결과는 도리어 하잘 수없이 타락한 것이다.
그는 사람더러 말하기를 위대는 부를 소유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로 부를 소유한 때에 어찌되었느냐 하면 인격은 모래 한 알보다(그 모래를 금강석이라 할는지 모른다) 적은 것이 되고 만다. 큰 세력을 잡으면 위대하여진다 약속하지마는, 사실로 세력을 잡는 사람에서 보면 사람의 값은 한 조각 종이보다 가벼운 것이 되고 만다. 저는 그러한 사기한이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 사람이 한번 자기를 저에게 내맡기면 그 후는 다시 거기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나올 수 없다. 저가 이날껏 분토를 들어 진주라 하며 내게 주었고 철소(鐵銷)를 가져 훈장이라 하며 내 목에 걸었고 그리고는 손뼉을 치며 피육적(皮肉的)인 웃음을 웃고 앉았는 줄을 깨닫게 되었다 하여도 거기서 벗어져 나올 힘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로 성령이 임하시어야 우리가 권능을 받는다는 것이다. 절대의 권능을 가지는 성령이 내 위에 군림하는 때 나는 새 사람이 된다. 예수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된다. 생명에 불타는 사람이 된다. 사랑의 샘물이 솟음쳐서 내 조그마한 인격의 윤곽을 넘치는 사람이 된다. 오순절의 베드로는 그것이다. 베드로는 이미 베드로가 아니요 성령의 기구다. 그런 고로 위대한 것이 되었다.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이면 다 성령을 받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사도들까지도 오순절을 지나기까지는 성령의 사람은 아니었다. 고로 예수는 그들을 자기의 권능 있는 증인으로 아시지 않았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교회나 성경연구회의 명부에 실어도 그것으로 성령의 사람은 아니다. 도덕적으로 노력하는 것조차도 아직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부족한 것으로 말씀한 것은 이것이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5)
도덕적으로 반성을 하고 결심을 하는 것이 무용한 일은 아니다.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새 사람은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약한 것이었던 것은 그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 자신이 다시 새로운 의혹(疑惑)에 빠져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3)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성령은 새롭게 하는 영이다. 사람을 변질시키는 영이다. 성령을 받는다 함은 거기 정복을 당하는 일이다. 옛날 내가 전혀 무력해지는 일이다. 죽는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 성령의 사람은 아니다. 오순절 날의 불은 사도들의 인격을 전혀 불살라버렸다. 그 이후의 그들의 생활은 전등의 와사선(瓦斯線)처럼 그 성령의 백열에 의하여 빛과 열을 발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상이 변한 것 아니라 인격의 통일 주체가, 영혼이 변질을 한 것이었다.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죄의 지체가 의의 지체로, 더러운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변질한 것이다. 이것이 위대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 성령은 또 우리가 회개함으로야 임한다는 것이다. 이 지금의 나를 죄로 부정하고 구원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에게 올려야 한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어찌할꼬” 하는 군중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하였다. 어느 순간이나 내가 회개하는 때가 성령이 임하는 때요, 성령이 임한 때에 예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때 나는 스스로 위대해진 것을 느낀다. 스스로 무한의 부의 소유자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이요, 끝없는 지혜를 가진 자요, 무궁한 생명 속에 있는 것을 느낀다.
성서조선 1940.1 132호
저작집30;18-289
전집20;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