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 / 정선례
작년 이맘때쯤 한방병원에서 3개월 치료 후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녀 집에서 놀다 왔다. 친구 신랑은 치료받느라 고생했다며 고급 식당에 데려가 자꾸 내 앞으로 접시를 갖다 놓으며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이틀 지내는 동안 농사를 짓고 오리 키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손맛 좋은 그녀는 냉장고를 뒤져 상추 겉절이, 무생채, 고구마순 나물에 생선을 구워 후다닥 한 상 차려 낸다. 우리는 함평돌머리수욕장과 용천사를 비롯하여 나주 금성산 둘레길, 능선을 걸으며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 젖히고 때론 목이 메기도 하며 이야기하느라 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치료 받으며 쌓인 바람 든 무같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고 덧난 상처가 아물어 회복되었다. 꿈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꿀과 오리고기, 눈에 좋다는 메리골드 차를 싸 주고도 아무것도 줄 게 없어 미안하다며 울먹이던 친구는 마치 언니처럼 “이제는 아프지 마라.”며 꼬옥 안아 준다.
40년 지기 오래 묵은 장맛 같은 단짝 친구 ㅅㅈ를 만난 것은 서울시에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복지회관에서였는데 그때는 철없던 10대였다. 나는 전자과 그 애는 미용과에서 기술을 배우며 합숙 생활을 했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나와 달리 무던한 성품을 지닌 그녀는 한결같아서 티격태격 한 번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나주와 강진, 수시로 찾아갈 정도로 가까이 살지 않아 자주 만나지 못해 늘 그리운 우리, 한동안 안부 전화 한 통 없어도 어제 만난 것처럼 허물없다. 남편이나 형제들에게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이웃들의 일상을 다 쏟아 내고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고 외로움도 가신다. 어떨 때는 욕도 해 주고 당장 찾아가서 혼낼 듯 자신보다 더 흥분하기도 한다.
유난히 감정 기복이 심한 내가 그나마 덜 외로웠던 건 친구와 함께해서일 거다. 그녀는 농사일에 계사 일까지 종일 작업복을 벗을 새 없이 일하며 알뜰한 생활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씨 솜씨 맵시까지 두루 갖췄는데도 쫄들리며 사는 모습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몇 해 전에 집이며 축사가 경매에 넘어가는 등 큰 어려움이 생겨도 나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한없이 미안하다. 크게 휘청거렸어도 무너지지 않고 축사며 집을 되찾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ㅅㅈ는 어릴 때부터 우리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좁은 상체와 굵은 허벅지, 잘록한 허리선이 두드러지는 팔등신 체형이다. 물결치듯 찰랑거리는 머릿결에 귀여운 얼굴의 웃는 모습이 영화배우 손예진을 닮았다. 뭘 입어도 맵시가 나서 주변에서 그 옷 어디서 사느냐고 물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가 자랑스러워 같이 놀러 다니며 함께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이런 그녀에게서 어제 전화가 왔다. “아야 완경 때문인지 자꾸 몸 여러 부위에 살이 불어서 고민이다”, “아야 그래서 나잇살이라는 말이 있는 거야. 너 아침저녁으로 훌라후프하고 수시로 복부 스트레칭해야 해." 한 바가지 잔소리를 쏟아붓고 전화를 끊은 후 ㅅㅈ야 드럼통이 되어 굴러가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아라." 혼잣말로 당부한다. 평소에는 단아한 성품으로 수수하기만 한 그녀도 노는 자리에서는 노래도 곧잘 하고 한껏 요염한 춤를 보여주며 숨은 끼를 발산해 분위기를 띄워 주위를 놀라게 한다. 건강하게 섹시한 그 애를 누구든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즐겨 보지 않는데도 케이비시(KBS)2 티브(TV) 시사 교양 프로그램 ‘영상 앨범 산’은 다시 보기 할 정도로 좋아하는 프로이다. 우리나라 각 지역의 명산은 물론이고 외국의 산까지 보여 주는데 방송인과 그 지역 문화 해설사가 출연해 직접 산을 오르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을 소개한다. 먹고 사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 남편들 빼고 더 나이 들어 다리가 아프기 전에 우리 둘 손잡고 어디로든 떠나자. 옹기 항아리의 장처럼 맛있게 익어 가고 싶다. 생각하니 마음이 벌써 그곳에 가 있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잘 쉬는것도 필요하다.
수업시간 외에 종일 붙어 다니던 풋풋했던 우리도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새롭게 다가오는 설렘보다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더 좋은 것 같다. 우리 남은 삶은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편안했으면 좋겠다. 위로가 필요한 우리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단풍 구경에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며 재미있게 살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막걸리에 애호박 해물파전 재료 싸 들고 친구 집에 가서 머물다 오고 싶다. “내 소중한 벗 ㅅㅈ야,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