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나들이 / 양선례
이번 주말에는 친구들과 놀았다. 지난 4월에 선암사 겹벚꽃 필 때 보고 만났으니 정확히 6개월 만이다. 여고 졸업하면서 만든 이 모임이 이토록 오래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친구들은 고향 언저리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 온 내 공이라고 하지만, 다섯의 성격이 무던하여 개성 강한 나를 품어준 결과라는 걸 나도 잘 안다.
위기도 있었다. 결혼으로 사는 곳이 달라지고, 육아에 바쁘다 보니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얼굴 보는 날에도 밥만 먹고 헤어지기 바빴다. 이제는 아이들 다 자라서 1박이나 2박의 모임도 자주 한다. 이번에는 내가 근무하는 고흥의 속살을 보여 주려고, 고흥만 방조제 끝자락 썬밸리 리조트를 일찌감치 예약해 둔 터였다. 기대했던 풍부한 해산물이 듬뿍 든 짬뽕 맛은 못 보았으나, 리조트에 딸린 해수 사우나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남들처럼 노래방을 가거나, 방에서 화투를 치거나, 술 한 잔으로 서로의 속내를 뒤집어 보일 줄도 모르는 우리는 오로지 입만 가지고 논다. 맛난 것 먹고, 풍경 좋은 곳에서 쉬면서 수다 떨고 오는 게 전부다.
집에 있는 와인을 두 병이나 준비해 갔지만 넷이서(두 명은 1박을 못하고 하루만 놀고 갔다.)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리에 없는 사람을 돌아가면서 도마에 올려 칼질하거나 씹지도 않는다. 우리 이야기하기도 바쁘다. 예전에는 아이를 키우거나, 가르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어머니 간병이나 건강, 자녀의 결혼이 화제에 오른다. 한 친구가 내년 5월 연휴에 자녀의 첫 혼사 날짜가 잡혔다고 알렸다. 서울 사는 친구가 그 참에 2박 3일 모임을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36년간 교단에서 근무하다가 내년 2월에 명예퇴직을 할 예정이다. 사사건건 놀 궁리만 하는 우리가, 사실 너무 좋다.
글감으로 ‘가사 노동’을 받았으나 쓸거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작년에 낸 첫 수필집에는 직장 생활과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당연히 남편 이야기도 한자리 차지했다. 아내가 오랜 취미를 살려서 책까지 낸 걸 자랑하면서도 지나가는 말로 한 번씩 찔렀다. 잘한 건 쓰지 않고 단점만 나열했다느니, 순 자기 처지에서만 글을 썼다느니 등의 뒷소리를 들었다.
되도록 남편 흉은 그만 봐야지 다짐한 터였다. 세 아이의 독박 육아에다 내가 없는 동안 뭘 먹고, 어떤 일을 했는지가 머리에 그려질 정도로 어지러뜨리고 사는 남자와 30년 넘게 살다 보니 이 주제에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지만, 나는 꾹 입을 닫는다. ‘사람 고쳐서 못 쓴다’는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실감할 때가 있다. 엄마가 그리워서 눈물이 나다가도 오랜 투병으로 온 가족이 다 지치고, 가족 사이도 틀어져 버린 지인과 비교하면 그런 고생 안 하고 간 엄마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져서 깁스를 하고 3개월 이상을 움직이지 못하던 직장 동료는 시간이 지나도 낫는다는 희망이 없는 불치병 환자와 비교하니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남과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지만 어쩌면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이처럼 스스로 위안거리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내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친구들의 이야기가 가사 노동으로 흘렀다. 남편은 두 가지 요리밖에 못 한다. 라면 끓이기와 달걀 프라이 만들기가 그것이다. 그것도 요리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저녁을 혼자 먹어야 하는 날이면 그 두 가지가 단골 메뉴다. 워낙 회식이 잦은 데다, 음식 투정 안 하고 뭐든지 잘 먹기에 영양소가 부족할까 걱정하진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던 미영이가 자신의 남편은 그 두 가지 중에서 달걀 프라이조차 할 줄 모른다고 했다. 미영이는 주부, 남편은 말단 행원에서 최고위직 임원까지, 신화를 창조한 주인공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나영이의 남편은 냉장고에 넣어 둔 반찬의 위치가 바로 옆으로 조금만 바뀌어도 못 찾는다고 해서 웃었다. 이심전심으로. 남은 한 친구만 그나마 청소기라도 돌려 준단다. 이쯤 되니 우리 친구들은 바보들의 집단이 확실하다. 아님 보살들이거나. 아무렴 어떠랴. 나 혼자만 바보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도 1박 2일간 친구들과 놀고 와도 잔소리 안 하고, 있는 반찬에 미리 저녁 해결해 준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 비록 개수대엔 설거지 그릇이 넘치지만. 이 복 없으면 저 복이 대신하리라 믿으면서 기꺼이 싱크대 앞에 선다.
첫댓글 선생님. 읽는 내내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공감이 되어서요.
진짜진짜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아이고, 오늘 횡재 수 들었군요.
칭찬 고맙습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했네. 가사 노동하면 할 수 없이 남편을 욕해야하는데 그만 욹어먹어야할 것 같아서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래서 망설였는데, 쓰고 보니 비틀어서 쓴 남편 흉이네요.
하하.
선생님 좋은 친구들과 끈끈한 우정 아름답습니다.
네. 놀고 오면 피곤해야 할 터인데 에너지를 얻고 와선지 즐겁게 글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시절 남성(아빠) 따라하다간 큰일날 듯 싶어 수시로 아들 교육시키는 중입니다.
우리 모임의 풍경과 같아 절로 웃음이 납니다. 한때 명소 찾아가며 모였는데 이제 호캉스하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2박 3일이나 만났네요. 지금도 그럴 수 있다니 부럽네요.
남정네들 다 거기서 거기예요. 남자는 불만이 있어도 밖에서 아내 흉을 말하지
않는데 여자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그게 궁금해요.
바보들의 나들이 제목이 재미 있습니다.
바보들의 나들이 맞네요. 하하. '가사노동'으로 쓸거리가 떠오르지 않아서 여행 이야기로 끝내실 지 알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가사노동 이야기로 마무리하셨네요. 정말 이야기꾼이십니다.
바보면 어떻습니끼?
마음 맞은 친구들인데.
4월에 여고 동창 13명이 3박 3일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가 생각납니다.
고향 언저리에서 사는 친구들이 많아 부럽습니다.
그저 부럽부럽 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상상이 됩니다. 저는 아직 초등동창들과 모임을 하고 있는데 모이면 꿈같거든요. 여행도 가고, 시시때때로 단톡도 하면서 지냅니다.
선생님 늘 행복하게 사시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입만 가지고 논다.' 에서 빵 터졌습니다. 저도 언젠가 써먹어보렵니다. 마음 흐뭇한 여행기입니다.
사장님을 돌려서 나무라시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더 재밌네요.
선생님만의 노하우, 잘 배웠습니다. 정말 지혜로운신데요. 하하. 멋진 우정도 부럽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