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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강 온전함의 시작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26.07.11(토)
안녕하세요. 저는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입니다.
이번에 나침반 바이블을 통해서 여러분과 이렇게 만나게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8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 야고보서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이 그 첫 시간인데요.
오늘 첫 시간으로 서론을 좀 저희들이 살펴볼 겁니다.
근데 강의를 시작하면서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세 가지 포인트를 좀 먼저 좀 나눌게요
첫 번째는 구원은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이다.
두 번째는 율법과 은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순서의 문제이다.
세 번째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심으신 거룩한 씨다 그러면 이 3가지 포인트를 좀 마음속에 가지고 같이 한번 강의에 동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흔히 공동 서신 혹은 일반 서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서신들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첫 번째가 복음서이고요.
두 번째가 서신서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복음서는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고요. 서신서는 그 복음서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서는 크게 또 둘로 나뉘어지는데요.
바울 서신 그 다음에 일반 서신 공동 서신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바울 서신은요 이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이 구별되어 나오고 있는 이유 성경에서 왜 그들을 구별해서 나누고 그리고 왜 바울 서신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어 일반 서신이 나중에 나오는가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의 초점이 달라요. 바울서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일반 서신은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서 성경은 바울 서신으로 끝나지 않고요. 공동서신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죠.
구원이라고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구원받는 걸로 끝나지 않고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문제도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은 공동 서신 없는 바울 서신은 반쪽짜리 복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물론 실제적으로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공동 서신들은 바울 서신의 그늘에 가려서 사실은 그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야고보서는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은 채 오해를 받아왔고 그리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의심입니다.
야고보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과연 사도인가에 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요.
그래서 과연 그 사람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 야고보서가 정경이 되어야 되느냐 교회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이 문제가 제기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대한 의심이 거기에 있고요.
또 하나는 더 중요한 문제인데 교리적인 모순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리적인 모순 그러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 그러면 사실은 바울 서신의 근간을 이루는 복음이 이신 이신칭의죠
스위 저 스피케이션 바이 페이스라고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에 이런 이론과 갈등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심화된 것이 사실은 마틴 루터인데요.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던 그 당시를 보면 그 당시에 천주교회는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율법 즉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그 대표적인 경우가 면죄부였죠 면죄부 면죄부는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의 극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있죠.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그는 로마의 잘못된 율법주의적 구원관에 정면으로 항거하기 시작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너무 나가다 보니까 이신득의만을 주장하다 보니까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첨하했던거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1522년에 처음으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 성경의 독일어 초판에서 그런 야구보서를 제외합니다.
이러한 어떤 마틴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요. 그 후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대할 때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거죠. 율법적인 책이다. 근데 왜 이런 일이 있을까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오해에서 기인하는 겁니다.
오해해서 이것은 사도 바울 서신과 그리고 이 야고보서를 읽고 있었던 그 당시의 수신자들의 상황이 달랐죠 그 차이를 보지 못한 겁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서신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가라고 하는 구원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 반면어 야고보서는요 의롭게 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구원 이후에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면 야구보서를 잃어버리면서 구원의 풍성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풍성함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 그러면 구원이죠. 근데 구원이 과연 뭘까요? 구원이란 과연 뭘까요?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구원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단계가 칭의의 단계입니다. 저스티케이션이라는 단계죠 이 단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해야 될 일이 별로 없어요.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어주심을 믿는 순간 우리의 죄가 사해지며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게 되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구원 구원의 확신 얘기할 때 바로 여기 이 단계죠 근데 구원이 이 단계에서만 끝나나요? 아니에요. 그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그다음 단계가 성화입니다. 셈브티피케이션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다면 그럼 그 다음에는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은혜에 합당한 삶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되는 거죠.
어떻게 이 성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나요?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은 성화의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끝나나요? 아니면 마지막 세 번째 단계가 있어요. 세 번째 단계는 영화의 단계입니다. 글로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구원의 완성이죠.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단계 그 단계가 바로 영화 단계입니다. 온전한 구원이죠.
여기서 온전함이라는 것은 야고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한데요.
이 온전함은 이 땅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단편적인 어떤 미완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나중에 온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전함 그 온전함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마치 씨앗과 같아요. 그러면 씨앗을 보세요. 씨앗이 사실은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런데 그 씨앗 안에는 이미 정해져 있는 유전자가 있죠.
정해진 목적 그 정해진 상태에 대한 그림과 계획과 뜻이 씨앗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씨앗이 시간이 가면서 점차 점차 나중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가지요 그 모습으로 완성해 갑니다.
꽃으로 열매로 그래서 씨앗의 온전함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까지 나가는 거죠. 이것이 구원의 풍성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 어느 순간 이루어진 한순간에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천국을 가기 위한 어떤 자격을 받는 것도 아니고요.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천국 입국 비자를 받아 놓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일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생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중생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그리고 영화로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 교회가 저와 여러분이 이 구원의 풍성함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냥 첫 번째 단계 중생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하면 한국 교회가 언제부터인지 신앙이 관념화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머리로만 믿어요. 생각으로만 해요. 그런데 삶에는 이어지지 않아요.
말뿐인 신앙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앙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보통 믿음 생활 신앙생활 그러면 교회에서 성경 공부하는 것 뭐 교회에서 뭐 하는 것 기도하는 것 거기까지만 생각하지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직장에서 우리 학교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는 우리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혹시 오늘 우리가 나누어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믿음의 여정이 풍부하고 깊은데 오늘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어디까지 왔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우리도 칭의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칭의의 단계에 머물러서 앞을 향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발 오늘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끝나지 않는 인생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아직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여요.
신자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을 열망하며 하느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거룩하기 위해 애쓰며 힘쓰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땅에 누구나 다 누구나 다 한번 눈을 감으면 이 세상을 우리가 떠나게 한번 눈을 감으면요 그 다음에 그다음에 우리가 눈을 떴을 때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품 안으로 주님의 품 안에서 우리가 눈을 뜨게 될 텐데 그때 여러분 뭘 하고 싶으세요. 저는요 예수님의 얼굴을 만져보고 그리고 다시 내 얼굴을 만져보고 내가 얼마나 우리 주님을 닮았는가 확인해 보고 싶어요.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우리는 이 성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1~2강 온전함의 시작
주님이 앞을 향해 나아가야죠 여기에 구원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풍성한 길이 있죠.
여러분 우리가 이 길을 가려고 하면요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분명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율법입니다. 율법 이 율법과 구원의 관계에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오해가 있어요.
두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적 생각입니다. 내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거는 비성경적인 거죠.
또 하나는 또 하나는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니까. 율법과 구원은 율법과 계명은 필요 없다는 생각 소위 율법 무용론입니다.
은혜는 충분히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에 만족해서 그 다음에 우리가 감당해야 될 율법들을 행하지 않고 그냥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만족해 버리는 그러다 보니까 그러면 율법이 없는 은혜는요 은혜를 변질시켜 버립니다.
소위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리죠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인 본헤퍼가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이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고 하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강조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예수님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는요 값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값이 없는 은혜라는 것은요 값이 싸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크고 너무 비싸고 너무 귀해서 우리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은혜 라는거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값 없는 은혜를 오늘 우리가 값싼 은혜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그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는 율법이 없는 은혜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은혜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과 은혜라고 하는 것 율법이라고 하는 것과 복음이라고 하는 것 그럼 이것은요 우리 신앙의 너무나 중요한 두 기둥입니다.
율법이냐 복음이냐 선택해야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이 둘 율법과 복음이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라 연결되죠.
그래서 이것은 선택의 개념이 아니라 순서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먼저 오느냐의 문제예요.
자 율법 다음에 복음이 오느냐 아니면 복음 다음에 율법이 오느냐 여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율법은 복음 뒤에 서야 됩니다. 율법이 복음 앞에 서게 되면 복음이 죽어요. 동시에 율법도 죽습니다. 바리세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죠. 율법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구원이 오면 복음이 오면 그럼 둘 다 죽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바뀌어서 복음이 율법 앞에 오게 되면 그러면 율법이 살아납니다. 율법은 강력한 힘이 되고 그리고 은혜도 더 깊어지게 되는 거죠.
율법이 믿음 앞에 있어도 구원의 문제가 생기지만 율법이 믿음 뒤에 서지 않고 그냥 무시되고 없어져 버리면 그 구원도 변질될 수밖에 게 없죠 그러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값 없이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다음에 자기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그것 역시 그것 역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 가지를 다 얘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 율법이 아닌 구원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요 그리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어찌 보건소에 나오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같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어 그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나오죠.
예수님 왜 그것을 저주하셨을까요?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쉽게 생각하면 열매가 없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지 모르지만 정확한 대답은 열매가 없어서가 아니라 잎이 무성해서입니다.
잎이 무성해서 그때는 잎이 무성할 시기가 아닙니다. 이륻 봄이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나무들은 사실은 이제 겨우 순이 막 돋아날 때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이 보시니까 한 무화과 나무만 잎이 무성한 거예요.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의 특성상 그 안에 이미 열매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셔서 열매를 구하신 겁니다.
근데 열매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하는 겁니다. 만약에 만약에 그 무화과 나무가 잎이 무성하지 않았더라면 저주받지 않았을 겁니다. 잎이 무성했기 때문에 저주받은 거예요.
오늘 이 무화과나무는요 그 당시에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복음의 내용은 없고 신앙의 열매들은 없고 율법의 열매들은 없는 채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외식으로 가득 찼던 그 당시의 유대교회에 대한 심판이었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심판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국교회 저와 여러분이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되지 않을까요?
만일에 오늘 누군가가 우리에게 와서 당신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증거를 보이라고 하면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그 증거를 보일 수 있을까요?
19세기 말에 최고의 성악가라고 하는 그 아델리나 패티라고 하는 성악가가 있어요.
이분이 어느 날 어느 조그만 마을에 공연을 갔다가 자기에게 보낸 그 소포를 받게 됩니다. 소포가 우체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체국에 그 소포를 찾으러 가죠 찾으러 갔더니 그 우체국장이 증명서를 달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마침 증명서가 없기에 내가 그 성악가인데 아델리나 페티인데 나에게 그것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얘기하니까 이 우체국장이 웃으면서 내가 아델리나 패티는 알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는 알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아델리나 패티라고 내가 알 수 있겠는가 증명해 보라는 겁니다.
당신이 아델레나 패티라는 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게 증명을 해봐라 그때 이 아델레나 패티가 주저없이 반주도 없이 그 자리에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 다음 결과는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짐작 가시죠. 만일에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찾아와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라 그럼 여러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어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앞으로 두 달 동안 여러분과 함께 이 야고보서를 읽어가려고 합니다. 함께 야구보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공부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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