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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으로 부터 망한 카르타고의 교훈
☞ 카르타고의 생성과 번영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북쪽(지금의 튀니지) 해안에 페니키아 인들이 세운 도시국가이다. 페니키아가 멸망한 뒤 기원전 800년경에 독립국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막대한 부와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덕에 에스파냐에서 시칠리아 일부 지역까지를 지배하면서 상업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카르타고 사람들은 군사 문제를 주로 용병에게 맡겼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을 ‘포에니(페니키아인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 신생 로마의 발전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에게 문명이 쇠퇴하고 폴리스들이 등장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 서남쪽 티베르강 (이탈리아 중부에 흐르는 강. 현재 테베레 강) 지역에서는 로마라는 도시국가가 건설되어 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트로이의 용사 출신인 아이네아스의 자손인 로물루스(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건국 신화의 주인공)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로마는 주변에서 가장 강력했던 에트루리아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라티움(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는 지역) 지역의 유일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 남쪽 삼니움 족과 여러 차례 전쟁(기원전 326~기원전 290년)을 치른 끝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던 그리스의 식민 도시국들을 통합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누볐던 해상 무역 시장을 이어받아 서지중해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지중해 최고의 부를 누리던 카르타고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전쟁 개요
기원전 246년부터 146년까지 약 100년간 지중해의 북쪽에 있는 로마와 남쪽에 있는 카르타고는 각자 국력을 쏟아가며 상대를 궤멸시키려고 싸웠다.
그것이 저 유명한 1차, 2차, 3차 포에니 (Punic) 전쟁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241년)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1년)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기원전 146년)
☞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241년)
시라쿠사의 용병 대장은 해고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마메르티니들을 이끌고 메시나를 점령한 후 주변을 공격하였다.
기원전 265년에 이르러 시라쿠사의 히에론 2세의 반격을 받게 되자,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카르타고 군이 시라쿠사 군을 물리치자, 마메르티니들은 그들을 도와준 카르타고 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번에는 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 식민 도시들에 대한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기원전 264년에 전쟁에 개입하였다.
전쟁 초기 로마는 해군이 강한 카르타고에 밀렸지만, 차츰 해군력을 키우고 배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무기를 만들었다.
그 뒤 로마는 메시나를 공격해 카르타고 군을 몰아냈고, 시라쿠사도 점령했다.
그 기세를 몰아 로마 장군 레굴루스는 기원전 256년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카르타고 용병 대장 크산티포스가 이끄는 기병대와 코끼리를 중심으로 한, 군대의 공격에 무너졌다.
그러나 강해진 로마의 해군은 계속 승리하였고, 마침내 아이가테스 해전(기원전 241년)에서 카르타고 사령관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싸워 카르타고를 항복시켰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내어 줬을 뿐 아니라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만 했다.
그 뒤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해외 속주(프로빈키아.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설치된 이탈리아 반도 이외의 로마 영토)가 되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해군력을 키워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었다.
☞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1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로마는 코르시카섬과 사르데냐섬을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았다.
그리고 카르타고에게 더 많은 전쟁배상금을 내라고 강요했다. 이때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아들 한니발, 사위 하스드루발은 이베리아 반도(유럽의 남서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반도)에 ‘신카르타고’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 도시 사군툼(이베리아 반도 동해안에 있던 사군토의 옛 이름)을 차지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철수를 요구했지만,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를 향해 다시 선전 포고를 했다.
로마가 이미 바다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4만에 이르는 군사(코끼리 포함)를 이끌고 육로로 피레네 산(에스파냐와 프랑스 경계)과 론강(스위스에서 시작해 프랑스를 거쳐 지중해로 흐르는 큰 강)을 지나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계속되는 행군과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해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잃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보병 2만 명, 기병 6천 명 정도만 남았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 사는 갈리아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기묘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 덕에 군대는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 군을 격파하고 승리하였다.
한니발은 기원전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에 전투(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으로 유명한 전투)에서 로마 군을 이중 포위하여 크게 승리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 동맹을 게릴라 전술(배후나 측면을 소규모의 군사가 기습 공격함으로써 적을 교란시키는 방법)과 외교 활동으로 교묘히 저지하였다. 기원전 211년 로마가 카푸아시를 되찾을 때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군의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로마 군은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반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 로마 군의 스키피오(자마 전투 승리 후 아프리카누스란 칭호를 얻었음)는 기원전 206년 카르타고 군의 근거지로 건너가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평정했다.
스키피오는 기원전 204년에 카르타고의 본토를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전투 준비를 했다. 그때 남부 이탈리아에서 로마 군과 대치 중이던 한니발은 본국의 명령을 받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로마 군의 스키피오는 기원전 202년에 ‘자마’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과 맞대결을 펼친 결과 또 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2차 전쟁에서도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 히스파니아(에스파냐)를 비롯한 지중해 섬들을 양도(어떤 물건이나 권리를 남에게 넘겨주는 것)하고, 전함 대부분을 넘겨주었으며, 50년간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코끼리를 전쟁에서 어떻게 사용했나?
동물원에서 보는 코끼리는 순하고 조련사들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그러나 전쟁에 쓰였던 코끼리는 매우 무섭고 잔인했다.
3m에 이르는 코끼리가 전쟁터를 달리면, 그 앞을 막을 수 없어 사람과 말들은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끼리는 전투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코끼리가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화가 나면,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공격했다.
코끼리 조련사들은 작은 침을 가지고 다니며, 아군을 공격할 때는 코끼리의 머리에 침을 꽂아 죽였다.
☞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기원전 146년)
▲ 난공불락의 카르타고의 해안가 성벽.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온 시민이 힘을 모아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또다시 로마의 신경을 건드렸고, 로마는 카르타고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로 했다.
그 무렵 카르타고 서쪽의 누미디아 국왕이 카르타고의 영토를 침략했다.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맺은 강화 조약의 내용에 따라, 로마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누미디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말았다.
이것을 빌미로 로마는 기원전 149년에 또 다른 스키피오(스키피오는 고대 로마의 성. 로마사에는 여러 명의 스키피오가 등장함)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카르타고 시민들도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활시위로 쓰도록 할 정도로 로마에 거세게 저항했다.
로마군은 3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들었다.
로마는 더 이상 카르타고가 일어설 수 없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카르타고의 수도를 완전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이때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로마의 노예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그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차례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일개 도시국가에서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과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근처 ‘자마’ 평원에서 대회전을 벌인 것은 2차 ‘퓨닉’ 전쟁이었다.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섬멸할 수 없었고, 카르타고는 로마를 궤멸시킬 수 없었다.
그때 카르타고 성벽은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견고하고 거대하고 완벽하게 지어져서 함락할 수 없었고, 지하에는 바둑판처럼 수로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카르타고 자체가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그래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포위한다고 해도 카르타고는 10년 먹을 물과 곡식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난공불락이었던 카르타고였다.
그러나 제3차 ‘퓨닉’전쟁에서 로마는 간단하게 카로타고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 무적의 카르타고가 어떻게 로마에게 망했나?
가장 무서운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다.
거대한 나무가 외풍에는 견디어도 붉은 개미 떼들이 갉아 먹기 시작하면 넘어진다.
카르타고 원로원 위원이었고 카르타고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출세했던 귀족 "아스틸락스"가 카르타고의 성벽 도면들과 지하 수로들의 도면들을 훔쳐가지고 로마로 도망가서 로마 원로원에 팔아넘겨 억만장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스틸락스는 카르타고를 공격하는 6만 명의 로마군과 함께 카르타고에 와서 성벽의 약한 부분들과 샛길들과 지하 수로들의 출입구들을 샅샅이 알려 주었다.
드디어 절대로 함락될 수 없는 카르타고 왕국이 철저히 폐허가 되고 카르타고 사람들은 도륙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로마보다 일찍 건국되었고, 당시의 정치, 문화, 군사, 예술,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 선두 주자였던 카르타고는 이렇게 한 자국민의 배신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지도에서 지워졌으며 가르타고 인들은 멸종했다.
당시에 살았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의 서쪽 문이 뚫리고 나서 6시간 후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너무 참혹해서 조금만 인용해본다.
"전쟁터에 시체들이 나뒹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카르타고에서 본 것은 지난 30년 동안 어느 전쟁터에서 본 것보다 더 처참하고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발가 벗겨진 여자가 피범벅이 된 채 시체로 메워진 우물 맨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입에는 도려낸 젖가슴이 쑤셔 넣어져 있었고, 두 다리 사이의 음부에는 병사의 잘린 팔뚝이 박혀 있었다.
신전 계단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머리가 깨진 어린아이들의 피로 인해 거리는 무척 미끄러웠다.
신전 입구에는 거세된 병사의 가슴 위에 목이 잘린 개가 얹혀 있었다.
여자.??? 나머지는 너무나 처참하여 생략한다.....
* 옛 카르타고, 현대의 튀니지 (Tunisia)
▲ 카르타고 멸망 후 로마의 속주로 전락되었다가,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어 크게 번영 하였다. 사진은 서 로마 시대의 유적
북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는 튀니지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의 남서쪽과 사르데냐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알제리와 남동쪽으로는 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튀니지는 아들라스 산맥을 따라 자리잡은 나라들 중 가장 작은 국가이다.
국토의 약 40퍼센트는 사하라 사막이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지역은 1,300km의 해안선과 그 인근의 비옥한 토지로 구성되어 있다.
튀니지 해안가의 비옥한 토지는 특히 고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들었는데, 먼저 유명한 페니키아인들이 설립한 카르타고가 이곳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프리카 속주로서 곡창 지대로 유명하였다.
이후 5세기에는 반달족, 6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 8세기부터 아랍족의 지배 후부터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1881년부터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1956년에 독립하였다.
경기도 인구보다 적고 서울특별시와 비슷한 수준의 인구가 튀니지에 살고 있다.
☞ 카르타고의 교훈
실제 우리 역사에서도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망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위만조선, 고구려, 백제 등이 모두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멸망했던 사례다.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 역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무뢰배)에게 시해된 일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일본 낭인과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조선인 우범선이다.
절대 망할 수 없던 카르타고가 망한 것은 카르타고 귀족의 배신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라~
오.!! 대한민국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누가 지금 대한민국을 배신하고 있는가~?
누가 지금 대한민국을 적국의 칼날 아래 밀어 넣고 있는가~?
누가 서해안 해도를 누가 지금 적에게 넘겨 주었는가~?
누가 탱크 방호벽을 임의로 철거하여 적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는가~?
누가 이렇게 대한민국을 약화시키고 무력화 시키고 있는가~?
누가 지금 대한민국의 약한 부분들을 적국에게 알려 주고 있는가~?
누가 경유를 북한에 넘겨주고 군량미로 전용되는 쌀을 넘겨주려 하는가~?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는 무리들이 서울의 중심을 활보해도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자고 하는 것인가~?
기억하라~!!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북한 때문이 아니라, 바로 대한민국 안의 배신자 때문이 될 것이다.
누가 배신자인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국민들이 배신자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라~!!
지금~ 모두가 단결해 손을 쓰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몰락을 막을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고 없으리라!!
● 월남전의 교훈을 기억하라!!!
미국 등 여러 나라가 개입한 이 전쟁은 엄청난 파괴와 인명 손실을 남기고 1973년 휴전협정으로 종전되었으나 전투는 계속되었고, 1975년 북베트남의 전면 공세 속에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무려 20년에 걸쳐 계속된 전쟁은 결국 남베트남과 미국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월남이 망한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됐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이슬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좌익이었던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1,000만여 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끌려가 서서히 죽어갔다.
109만여 명이 난민이 '보트피플(Boat People)'이 되었다.
'보트피플'은 베트남전쟁에서 월남이 패망하고 나서 공산화된 베트남 당국의 탄압을 피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쳐서 다른 나라로 가려고 바다를 떠돌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이웃 공산국가들도 베트남의 눈치를 보며 이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렇다고 자유 진영에서 환영받은 것도 아니다.
자칫, 한두 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난민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때문에 골칫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난민을 구조한 바가 있으나, 대다수의 난민은 실종되거나 해적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우리도 공산화된다면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독일이 통일되고 난 이후에 서독에 동독 간첩 3만여 명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총리 비서에서부터 국회의원을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에 동독 프락치들이 설치고 있었지만, 서독 정부와 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친구라고 믿고 지냈던 지인 중에도 간첩들이 득실거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월남은 또 어떠했는가? 대선에서 티우대통령과 대결했던 야당 대표 쮸딩유가 간첩이었다는 것이 월남패망 이후에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월맹을 공격하라고 전투기를 띄웠더니 간첩이었던 베트남 조종사는 월남 대통령궁을 맹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서독이나 베트남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종전선언을 부추기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프락치거나 프락치에 매수당했을 가능성을 절대로 배제할 수 없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한 사이, 대한민국은... 김정은이 노동당을 이끌고 와 접수만 하면 될 만큼 이미 구조적으로 공산화되어 있다.
교육, 입법, 사법, 행정, 군사, 언론, 문화, 노동계, 특히 종교계 이상 모두가 주사파 간첩 손아귀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 6.25 전쟁을 기억하라!!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김일성이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총 137만 4,195명에 이른다.
우선 국군이 전쟁 중 13만 7899명이 전사했다. 전쟁 당시 한국 경찰은 3131명이 사망했다. 북한군 사망자 수는 52만 명에 달한다.
유엔군 사망자 수는 3만 7,902명에 달한다. 이중 3만 3,668명이 미군에서 발생했다. 중공 군에서는 14만 8,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남북한 군인과 외국 군인들의 피해도 컸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 놓였던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남한에서 민간인 24만 4,663명이, 북한에서는 28만 2,000명이 사망했다.
● 우리만 지키는 9.19 군사합의서 이행과 과도한 군부대 감축
9・19 군사 합의(군사 분야 합의서)는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정상회담을 통해 채택한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서이다.
‘쌍방은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순진하게 이 합의를 성실히 지켰다.
접경지 사격 훈련도 중단하고 북한 핵·미사일 동태를 감시할 정찰기 비행도 제한했다.
휴전선 대북 방송은 가장 효과적으로 북한을 괴롭히는 수단이었는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중단하고 확성기도 철거해버렸다.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대북 전단 금지법도 통과시켜 스스로 손발을 묶은 우리는 2022년 12월 북한 무인 항공기(드론) 5대가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상공을 휘젓고 다녀도, 우리는 종이 한 장 날려 보내지 못했다.
우리의 소프트 파워를 왜 포기해야 하는가?
그런가 하면, 내년까지 총병력을 50만 명으로 감축, 6·25전쟁 이후 가장 적은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지난 2018년부터 5년간 육군 병력만 11만 8,000명, 즉 약 12개 사단의 병력이 줄고 있다.
반면 군 복무 기간은 21개월에서 18개월로 줄어 야전 지휘관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청와대에 주사파가 포진한 문정권 하에서 해체시킨 사단급 만 2사단, 20사단, 26사단, 27사단, 28사단, 30사단 등 전통있는 사단들을 모두 해체시켜 유사시 북괴군이 남침할 경우, 적을 저지해야 할 주력 사단이 부족하여 전력공백이 심각하다.
예를 들어 유사시 백골 부대(3사단 1만여 명) 혼자서 중, 동부전선에 배치된 북한군 2개 군단(약 6만여 명)과 싸워야 한다. 즉 6 : 1의 구조다.
안보 상황이 이런데도 두 다리를 뻗고서 편히 잠들을 잘 수가 있는가.
북한은 9·19 남북 군사 합의를 비웃듯 도발을 반복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우리 세금 180억 원이 들어간 남북사무소를 2020년 6월 6일 폭파했다.
남북사무소는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남북회담을 하고 발표한 이른바 ‘판문점 선언’에 따라 5개월 만에 지은 건물이다.
그런데 이걸 김정은이 완공 2년도 채 안 돼 산산조각 내듯 폭파하고 그 장면을 촬영해서 공개했다.
그가 한국을 어떻게 여기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에게 돌아온 건 ‘삶은 소 대가리’ 같은 조롱과 북의 잇단 무력 도발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외부의 적인 중공, 러시아, 북괴 살인 교주 집단보다 더욱 악질들은 북괴 지령과 방침에 동조하는 세력들이다.
이 내부의 적들을 먼저 척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게 되고, 자유대한민국 근간이 흔들리고 체제가 사라질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아! 들으시라.!! 누가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고 있는지...(인간의 역사를 바꾼 전쟁 이야기 남경태 지음, 2023.5.28. 의령남씨 대종회 자유게시판 위 제목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