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 마을 사람들이 세대 차를 막론하고 고루 마을회관을 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호박의 공로가 크다.
봄에 심는 묘목 중에는 호박 묘목이 흙으로 일찍 들어간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목을 이식하는 형태를 시집보낸다고 한다. 이른 봄비가 오면 호박 묘목이 신부가 되어 새로운 터를 찾아 떠난다. 적절한 자리를 살펴 꽃방석을 깔 듯 곱게 터를 만든다. 호박은 후덕하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 대신에 밑거름 두둑해야 한다. 일단 땅 맛만 붙으면 묘목은 강하게 버티는 힘이 세다. 더위가 시작되고 비가 자주 오면 열매도 성큼 맺는다. 호박은 자투리땅에 심어도 제 몫은 충분히 해냈다. 따뜻한 기운이 대지를 후끈 달구는 날 등불 같은 노란 꽃등 들고 배시시 나오는 이도 호박꽃이다.
농부도 자라는 농작물이 자식처럼 수시로 보고 싶다. 호박은 밭 가장자리에 덤으로 심는 농작물이다. 주 종목을 세심하게 더듬고 살피다가 후미진 자리에 호박꽃 마주하게 되면 반가운 마음 그지없다. 그 꽃 진자리에 아기 주먹만한 열매는 볼수록 새롭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말들 하지만 나는 호박꽃만큼 다복한 꽃이 없다고 믿는다. 예쁘다고 요란스레 반기지 않아도 그저 그러려니 서로의 마음 알아차린다. 그 꽃 진자리마다 후덕한 열매가 자라 사람들 간의 인정 베푼다. 밭주인은 해와 함께 일과가 마무리되면 신발에 흙을 털어낸 후 집으로 향하다 깜빡했다는 듯 일부러 다가와 방석만 한자리 차고 뻗는 호박 넌출에 눈길을 주고 간다.
호박이 오이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잘 크는 종이다. 호박은 두 손을 맞잡아 모은 만큼 자랐을 때 부드러운 맛이 더한다. 크면 큰 대로 농익을수록 그대로의 맛을 지니고 있다. 호박 나물은 갓 딴 호박을 얇게 썰어서 양념하여 볶으면 한 끼 밥 먹기 딱 좋은 찬거리다. 호박은 심어만 놓으면 큰 공력을 들리지 않아도 잘 자란다.
시댁 시절 뜨거운 김이 오른 호박 나물과 열무김치 밥상 위에 올리고 참기름병 시어머니 숟가락 곁에 두면 저녁 밥상 분위기가 흐르는 물처럼 순조로웠다. 나 역시 대단한 음식이나 장만한 듯 당당하게 숭늉을 올렸다. 그 무렵에는 매끼마다 무엇을 해 올려야 하나 고심이 많았다.
그런 탓인지 밭가에 호박이 열리기 시작하면 한근심 덜어졌다. 호박만 보면 따 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비가 와 일손을 놓게 되면 한숨 늘어지게 잔 후 호박 부침으로 고샅 인심 사로잡았다. 이제 늙은 호박처럼 골이 깊게 늙어가지만, 호박 심는 일은 거른 적이 없이 살아왔다. 호박만 열리면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호박 넌출은 밭두룩에 군인처럼 씩씩하게 길을 낸다. 여기저기 감춰 있던 호박 눈에 띄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찾아진다. 나도 이젠 피부도 처치고 뼈마디는 줄어들었어도 먹었던 입맛은 그대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을회관에서 가까운 밭에서 애호박 하나 따 호박 부침을 하면 사람들은 따로 전화하지 않아도 성큼성큼 마을회관 문을 밀고 들어온다. 한쪽에서는 누워 기다리고 주방 쪽에서 분주하게 지져 낸다. 따끈따끈한 호박 부침 마을 사람들 얼굴 맞대고 먹고 나면 적적했던 마음까지도 채워지는 기분이다. 호박 부침 한 쟁반 사람들 거뜬히 비우고 나면 가까운 사이도 호박꽃 같은 환한 웃음 저절로 핀다.
호박 넌출 사이에 열린 호박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면 단단하게 살이 찬다. 연한 녹색에서 날이 더해 가면 단단한 녹색으로 커간다. 생고등어에 가을 호박을 깔고 지지면 호박 맛과 어울려진 고등어 맛은 천상의 궁합이다. 생고등어의 비릿한 맛도 빠져나가고 오롯이 달큼한 한 맛이다.
요즘 농촌에는 마을회관 이주로 공동체 생활이 익숙해졌다. 마을 어르신들은 일만 집에서 할 뿐 아침이면 전동차를 몰고 마을회관으로 출근한다. 어느 공공 기관의 주차장처럼 마을회관 공터에는 전동차가 차례대로 주차되어 있다. 마을회관이 친정집보다 더 편하다. 아무 때나 가도 되고 누구 눈치 살필 일없다. 혹여 가족이 있다고 할지라도 농한기에 늦은 아침 가볍게 챙겨 먹고 점심까지 집에서 해 먹는 일은 번거롭다. 식구도 단출한데 둘이나 혼자 먹기 위해 싸늘한 주방에서 움직거리는 일이 귀찮다. 그러니 점심 정도는 어디서 모여 먹는 일도 괜찮은 일이다.
평생 음식 만들어 먹던 손끝이라 눈 한번 깜짝하면 밥상 위에는 먹을 만한 음식들이 올라온다. 요즘 같은 사람이 귀한 시기에는 시장이 반찬이 아니고, 사람이 반찬이다. 혼자 먹는 밥보다 모여 먹는 밥이 훨씬 맛있다. 겨울에는 먹는 호박죽은 별미다. 아직도 호박 인심은 넉넉하다. 마을회관에 미리 보관된 호박이 서너 통이다. 남겨 둔 호박은 여름에서 가을볕까지 호박잎 하나 의지해 견딘 몸은 황금색이다. 울퉁불퉁 골도 깊다. 나만큼 인물 없는 여자를 가리켜 호박같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것도 모르는 소리다. 호박 같은 여자만 되어보라고 줄줄이 토를 달고 싶다. 겉과 속이 다른 여자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적은 없었는지.
호박의 한결같은 맛은 애호박 때는 부드러운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살려주고, 가을이면 생선 맛을 채워 허허로운 속을 다독거려 준다. 무명치마 저고리에 허리띠 질끈 매고 난전에 앉은 여인 같은 그녀. 무려 반년을 오롯이 한자리에 앉아 오뉴월 볕도 이겨내고, 굵은 장대비 같은 풍파도 흔들림 없이 받아낸 심지 굳은 몸이다. 그것뿐이겠는가 병충해도 거뜬히 넘어왔다. 그녀 들판에서 지내다 보니 고운 소리로 읊조리는 개구리, 풀벌레 소리도 헤아리는 음률을 아는 속정을 지녔다. 토실한 살집을 갈라보면 속은 하루를 온전히 채우고 타들어 가는 태양 빛이다. 하늘 아래 어느 열매가 양손으로 들기에도 벅찰 만큼 무게감이 있던가. 잘 익은 호박죽 얼마나 사람 간에 두터운 정을 이어주던가. 그 과거에 온갖 역경을 몸으로 이겨낸 어머니의 속 같아라. 하면 과한 표현일까.
잘 익은 호박 속은 단내가 흠뻑 난다. 자신을 지켜낸 그 호박도 결이 있다. 결대로 칼질해 딱딱한 껍질 깎아 붉은 팥알 한 사발 넣고 푹 곤다. 곤죽이 되게 푹 고아 호박의 형체가 풀려질 때까지 불에 끊인다. 밀가루를 큰 양푼에 넣고 물을 고루 뿌리듯 하고 밀가루를 바슬바슬 비벼낸다. 밀가루가 큰 덩어리져도 맛이 덜하니 검은 콩알 크기면 좋겠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질 때처럼 솥 안에 호박범벅이 끊으면 마을회관에 모인 식구들 한 그릇씩 떠 올린다. 호박 한 통이면 한 동네 식구들을 다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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