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文盲)과 천맹(天盲)
지금부터 약 삼십오 년 전쯤에, 일흔을 넘긴 할머니들의 문맹률은 대강 얼마나 됐을까? 경로당에 출입하는 보통 할머니를 대상으로 했을 때…….이 뜬금없는 물음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그런데 나는 안다. 내가 노인학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고, 매주 토요일 오후 만나는 백여 명 학생들을 상대해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경악했었다. 특히 할머니-그래 여학생이라 하자-들은 문자 해득자가 삼십 퍼센트 이쪽저쪽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으니 장하달 수밖에.
말쑥한 차림의 여학생이 있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다섯 번째 정류장에 내리면 노인 학교에 올 수 있는데, 학생은 아라비아 숫자에도 까막눈이다. 그런데 절대 결석을 않는다. 그 학생이 하는 말. 갈매기 있제? 33번, 갈매기 두 마리 아이가. 그것만 타면 된데이!
민요라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어느 여학생은 참으로 돋보이는 경우다. 민요 가수보다 가사 하나는 더 정확하다. 나는 내 제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여학생의 창(唱)도 거의 인간문화재 급이라 우긴다. 그렇지만 학생은 자기 말마따나 일자 무식꾼이다. ‘들어가면 너 때려죽인다.’라고 어느 방문 앞에 방을 써 붙여 놓아도 기어이 문을 연다는 데 더 말해 무엇 할까? 물론 자기 성(姓) 씨, 한 자(박)도 일을 줄 쓸 줄 모른다. 남자였다면 한량 중에 한량이고도 남을 여학생이었다.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낙동 민속 예술제에서, 품바 타령으로 대중 앞에 나서면 모두가 놀라 자빠질 정도? 그래 그 정도라 해 두자.
내 제자니까 이런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교재는 내가 만든 민요집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 말하자면 입으로는 노래(민요)를 부르고, 눈으로는 글자를 배우는…….기발하고도 희한한 이 마력에 학생들은 빠져들었다. 말이 수업이지, 그건 차라리 광대놀음이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세마치장단 치고, 고래고래 고함질러댔으니. 내가 몸담고 있었던 유네스코 부산협회의 대표 사례이기도 했다.
정부가 지어 준-전무후무하다- 노인 학교 공간에서였다. 마침내 매주 목요일 오후 아내마저 팔을 걷고 달려들었다. 아니 내가 시간을 낼 수 없는 요일이니, 아내가 한글 교실을 전담한 것이다. 아내는 노인 학생들을 존경하였다. 아내는 그들을 지성 아니 치성(致誠)으로 가르쳤다. 우표 없는 편지가 오가는 등 아름다운 역사를 연출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한 학급 학생 수보다 많은 마흔 명 알팎. 유명 인사 어머니도 열심히 연필 끝에 침을 묻혔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문을 자주 못 열게 되었다. 내 병간호에 매달리다 보니, 아내가 손을 놀을 수밖에. 누군가 대타로 나서야 했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의 학부모가 자원해서 그 일을 맡긴 했다. 그러다가 끝내 흐지부지되고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 꽤나 고생했다.
이윽고 피골이 상접하고 정신이 혼미할 상태로 겨우 정년퇴임의 문턱을 넘는다. 그리고 집 앞이 바로 저승 문일 정도의 상태에서 겨우겨우 남은 교리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영세!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두고두고 우려먹는 얘기지만, 주교좌 중앙 당 노인학교에 내 발로 기어가, ‘살아 계신 주’를 열창하는 것으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한다.
한데 내가 나가는 금* 본당에는 워낙 가난한 연로 교우들이 많아 문자 미해득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성경>을 거꾸로 잡을 정도의 그 자매들이 성당에 나오는 것만도 신기한 일이었다. 무릇 병엔 완치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좀 더 스스로 치유해 보자는 심산으로 시작한 게 한글반 운영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그런데 분명 와야 할 사람이 안 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척 하면 삼척이라고 누가 문자 미해득자인지 아는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실망했다.
그래도 일고여덟 명은 되었다. 여든이 가까운 형제, 정말 글자라고는 아는 게 없었는데, 기도서 한 권 갖고 와서 독습하듯이 하더니 몇 달 안 되어 웬만한 건 다 읽게 되더라. 뇌전증(간질) 환자인 테레사 자매는 기본이 되어 있어서, 곧 <성경>을 봉독할 정도는 되었고. 요셉피나 자매는 워낙 열심이어서, 대여섯 달 만에 제1독서도 했다. 연변에서 온 자매(교우와 사실혼)는 머리가 천재여서 단연 학습 속도가 빨랐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가르쳐도 ‘주님의 기도’를 외긴 하면서, 읽지는 못하는 자매와 형제가 있었다. 귀가 어두워 고함을 질러야 알아듣는 어느 자매는, 그냥 웃기만 하다가 돌아가는 게 예사였다. 그러다가 손을 놓게 된 것은 학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웃 개신교 교회 등에서도 몇몇 왔으니까 하는 말이다. 옛날 노인 학교 시절과는 사뭇 다른 정서 때문이었다고 하자.
돌이켜보면 후회된다. 성당에서의 한글반 운영이 말이다. 차라리 그때 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말고, 교회에서 주관하는 성경 교육반에 들어갔더라면? 어중간하게 공부했다 쳐도 지금처럼 천주교 교리나 성경을 잘 모르는, ‘천맹(天盲)’으로 남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죽어 저승에 간다면, 그 수많은 제자들 중 어느 누구는 만나겠지.(내가 천맹이라는 증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웃 사랑’에라도 앞장선다면 모르지만 그것마저 게으르니 두렵다. 자신이 없고. 내가 죽은들 어찌 주님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인가? 어쨌든 지금 70대 이상 할머니 문맹자는 어떨는지……. 내 주먹구구다. 이십 퍼센트는 되리라.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