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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 시학 - 기의에 앞서는 기표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12장을 보고 요약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왜곡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미래파 시학'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과 시인들의 시집을 직접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때는 2005년, 이전의 주류라고 할 수 있었던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감수성과 태도 그리고 시학을 지닌 '포스트 386세대'의 시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명칭은 '미래파', 이는 시인들의 자기 규정이 아닌, 몇몇의 비평가들의 검토에 의해서 호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초는 문학 비평가 권혁웅의 '미래파, 2005년 젊은 시인들'이라는 글에서부터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미래파 시인들의 특성을 나열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중언부언(重言復言), 풍요한 메시지, 리듬의 소멸, 다성성, 그로테스크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으로는 미래파 시를 제대로 경험했다고 할 수 없을 터이니 먼저 미래파 시인이라고 범주화 된 시인들의 시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장욱의 시입니다.
나는 자판기 곁에서
나는 버스 안에서
분수처럼 흩어졌다
흩어져서
아무 곳으로나 스며들었다(…..)
終局에는
나는 버스 안과
나는 자판기 곁과
나는 보도블록 위에서
결국 분수처럼
다음으로는 김언의 시입니다.
가능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너희 두 사람이 내 아버지
다. 가능하다. 죽은 사람과 말하는 돌에 대해서 쓸 생각이
었다. 가능하다. 내 말은 뼈를 부러뜨리고 나온다. 가능하
다. 오전 11시에서 1시 사이. 떨어지다가 정지한 사람을
본다. 가능하다. 누가 내 이름을 바꿔 부를 때도 되었다.
가능하다.
이전의 시들과 비교했을 때 생소하고 낯선 느낌입니다. 시인들이 동의할 지는 모르겠으나, 미래파로 분류된 시인에는 김근, 김민정, 김언, 김이듬, 박진성, 신해욱, 유형진, 장석원, 진수미, 이민하, 이성미, 최치언, 황병승 등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미래파 시는 전체적으로 기존 서정시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미래파의 시편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통합적이라기보다는 분열적이며, 은유보다는 환유,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이고, 아름답기보다는 잔혹하거나 모호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탈 서정의 경향'이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래파에 대한 비평에 있어서의 의견의 대립도 눈여겨볼 만 합니다. 적극적인 입장과 비판적인 입장의 비평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평가들은 미래파 현상에 대해 '새로운 서정', '환상적 서정', '뉴웨이브'등의 용어를 정립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평가들의 주장은, '첫째, 미래파의 시 세계는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난해하며 비현실적이다. 둘째, 미래파에 대한 과장되고 과도한 조명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경향에 소홀해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이, 두 진영의 낙차가 큽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전의 이념적인 논쟁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의견이 대립하는 두 진영 모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등장했다는 것에는 공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전개 순서를 먼저 살펴보면, 처음으로는 미래파 시의 의미구조를 검토하고, 기존 서정시와의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오타쿠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미래파 시인의 주체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대의 철학에서 대두되는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의 한 사례로서의 미래파 시학에 대해 살피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미래파의 등장을 문화적인 징후로 파악하고 그것이 뿌리내리게 된 배경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 이 글의 최종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파와 서정시는 많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 서정시인 오규원의 시 일부를 보겠습니다.
잎이 나무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이러한 기존 서정시인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은 자아에서 벗어나서 시인과 세계를 동일시하고 어떠한 사회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매개체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관습적인 언어와 상징에 기대고 있습니다.
미래파는 이 서정성을 구조조정해서 '만화적 서정'으로 재구축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기존의 완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던 서정적인 자아가 미래파에서는 부재하고 분열된 다수의 존재로 변화됩니다. 또한 기존의 서정적 주체가 '사유'에 주안점을 뒀다면, 미래파적 주체는 해방, 해체, 활성화 등에 몰두합니다. 이렇게 '나'의 단일성은 파괴 되고, 오직 요소들만이 기체처럼 세계 안으로 퍼지게 됩니다. 이로써 미래파에서 시적 공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롭고 무책임한 역할 놀이의 공간이 되게 됩니다.
이 예로 대표적인 미래파 시인인 황병승의 시를 음미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의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나의 또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황병승은 다른 시에서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났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황병승에 대해 "그의 시에는 그가 없다. 다양한 역할만이 있다. 이것들은 캐릭터화 되어 있다. 캐릭터를 묶는 '중심'은 없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언급은 마치 어린이의 역할 놀이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다른 시인 이민하의 시도 감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둘러 군불을 지피고 그 위에 석쇠를 달궈 내가 날 통째로 얹는다 지글지글 내가 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해골들과 부위 모를 뼈다귀들이 앞다투어 모여든다 석쇠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이 선지로 돌돌 말아 빚은 완자처럼 지져져 더욱 쫀쫀해진 내가 날 엿가위로 한 입 두입 잘라 굽는다 따각따각 아귀 터지게 턱 벌리는 해골들에게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바싹 태워 먹여준다 오일 바른 상아 같이 매끈매끈한 뼈다귀들의 몸에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파스처럼 붙여준다 불가에 모여 앉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있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 일곱의, 열넷의, 스물의, 스물일곱의 제각각의 내가 날 쳐다보며 나야 나야 손을 흔든다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들을 다 트림하고 나로 자란 그대들이 방방마다 걸린 액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찰칵찰칵 기념촬영을 한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귀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
이 시에서도 역시 자아는 해체되고 있습니다. 또한 교훈도 찾기 힘들며 감각의 무정부 상태, 그것의 흐름만이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서정성을 '만화적 서정'이라고도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정시의 일점 원근법적인 특징은 이제 최소한의 원근법으로 축소 됩니다. 이에 따라 깊이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미래파의 서정을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비하의 차원이 아니라 기존의 깊이에 대한 신앙과 그 토대에 대한 비웃음으로, 그것들에 대한 인식을 탈-신비화 하고, 그것들이 사라진 환멸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힘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21세기의 한국 시단은 이러한 '만화적 서정'이 주도하게 되면서 서정성은 축소되게 됩니다. 이러한 풍경의 핵심 인물인 '미래파 시인'의 이미지는 '환멸의 폐허에 흩어진 기호들을 주워 무해하고 유아적인 놀이에 몰두하는' 정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으로는 미래파와 오타쿠, 이 둘은 연관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먼저 오타쿠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타쿠는 사회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특정한 서브 컬쳐에 몰두하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합니다. 문화적 기호의 공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신인류라고 할 수 있는 오타쿠가 사회적인 부산물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하고 그 관계에 대한 사유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래파 시에는 '오타쿠'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이 둘이 공유하는 특징들은, 자폐성, 유아성, 기호를 통한 문화적 유희의 능력, 하위문화/대중문화에 대한 열정, 문화적 기호의 하이브리드적 성격 등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현실 감각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변화된 미디어 환경을 가장 많이 체험하며 성장한 세대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는 멀티테스팅 세대, 모니터킨트, 호모 비르투엔스 등의 화려한 용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세계의 총체성이란 관념적인 무엇일 뿐입니다. 즉 그들의 현실 감각은 편파적이고 파편적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인지, 그들은 문화적인 파편에 대해 거의 물신숭배적인 열정을 지닌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뭐, 차이가 있다면 오타쿠들은 소비 상품에 매몰된 측면이 있지만 미래파 시인은 각종 문화적 기호를 찌꺼기들은 연결해서 사회, 정치, 문화적 현실과의 끈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역사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는데, 소위 포스트모던 사회인 지금은 거대서사가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하는 탈-역사적 시대입니다. 이런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세계에서의 주체는 각자 원하는 영역에서 이 부재를 대리보충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전의 주체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타자의 인정을 욕망한다는 라캉식의 표현과는 다르게 그들은 자기 만족, 독립적인 삶, 긍정적으로 보자면 '의식의 혁명'을 이루어 낸(낼) 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더 이상 혁명가나 선동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오타쿠입니다. 그들은 프라모델을 제작하는 진지하지만 사소한 열정으로 시를 씁니다. 여전히 이 시들이 정치, 사회적 효과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그들에게 시를 쓰게하는 원동력은 결코 아닙니다. '진정성'이라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그들은 애초에 불신, 가벼움, 투명성, 유아성, 쿨함, 귀여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다시 한 번 미래파 시인들의 주위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래파 현상에서는 비평의 역할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이 경향에 포함되는 시들은 '미래파 사건'의 질료일 뿐이었고 그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인지되고 호명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에너지를 지닌 담론적 실체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비평가들이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 "서정시를 전복하려는 의지로 미래파 탄생"
잠시 다음의 설명을 위해 서정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서정시의 3대 요소는 일상, 내면, 자연입니다. 특히 90년대에 유행한 신서정에서는 '일상'의 공간을 '내면'을 통해 탐구하고 '자연'이라는 도원을 열망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미적 가상이다, 매너리즘이다, 타성에 젖었다, 상징계의 권능에 포박 당했다 등등의 비판으로 서정시에 대해 반발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 서정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로 미래파가 탄생했고 주요 테마들은 재구성되었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이전의 '사회와 가까웠던 자아'는 사회에 무관심한, 상상계에 머문 '주체'가 되었고, 이 부분에서 역설적으로 사회와 멀어질수록 책임이 덜어지면서 '자유'라는 것이 증가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주체의 시선에 갇혀 살던 존재가 동일시 될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로 귀환하게 된 것입니다.
풍경은 상처로 전환되었습니다. 또한 미적 자연으로 정돈 되었던 모습은 불가능하고 외상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시적인 것이 되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의 의미망을 넘어서려는 욕망, 의지,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의 무능함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의 맥락을 철학적으로 고찰해볼 수도 있는데요. 먼저 서정시에 대입 할 수 있는 '실재의 열정'이라는 바디우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실재의 열정'이란 지난 세기의 시대 정신인데, 지난 세기는 정치적으로 혁명의 시대, 예술적으로 아방가르드의 시대, 추상과 실험의 시대, 형식 파괴와 선언문의 시대였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실현'에 대한 믿음과 정열에 의해 추동됩니다. 이러한 참됨에 대한 믿음을 '실재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디우에게 지난 세기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붕괴까지인데, 이 사이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징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뽑을 수가 있겠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세기를 '폭력의 세기', 니얼 퍼거슨은 '증오의 세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세기의 사람들은 '실재의 열정'으로 어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믿음을 갖고 '폭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직접적인 폭력은 20세기 특유의 정치 활동의 원천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근데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이러한 '실재의 열정'에 대한 전면적인 의심과 냉소가 만연하게 된 것이,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현재의 냉소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문제는 '실재의 열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조'에 대한 열정이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지젝은 지목합니다.
이런 실재에 대한 의심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는 '실재의 열정'의 소멸은 새로운 문제로 화두가 됩니다. 지난 세기가 진정성의 시대였다면 현재는 냉소주의적 시대, 오늘날에 실재의 열정은 정치적으로는 근본주의 내지는 테러리즘, 예술에서는 아마추어의 순수한 열정 등의 시대 착오적 순진함 속에서만 부활합니다. 또한 이러한 실재의 열정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하나의 코드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재니스 조플린의 반물질주의적 노래 <메르세데스 벤츠>가 메르세데스사의 광고에 이용됐었던 사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문제가 충분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안 모색이 아닌 비관적인 정신 상태, 즉 실재의 열정의 소멸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 비혁명적입니다. 또한 상징적으로 이제는 선언문이라는 것이 그 기반 정신이 사라졌기에, 불가능하고 그것은 더 이상 의미를 갖을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은 선언의 제스처들이 이 시대를 맴돌고 있는 역설이 있는데. 이 텅 빈 선언문의 공전,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병승 작품을 잠시 감상하겠습니다.
나는 선언의 천재
사계절을 저지르며 거듭 태어난 포 스타(four star)
침묵과 비명의 일인자인 철문이여
얼음으로 만들어진 찬 변기여
나의 실패담이 그렇게 듣고 싶은가
(….)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차창의 불빛 환한 밤 기차
처럼
이렇게 나는 너무 빤하고 선언은 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선언의 천재
모든 것을 선언한 두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습니다
…… 결국 빛이 빛을 찾아 헤매는 슬픈 시간입니다.
미래파 현상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 미래파 시인들은 자신들이 '미래파'라 불리는 것에 반발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미래파 선언'은 그렇다면 시인들이 아닌, 평론가가 작성한 격입니다.
'포스트 진정성의 시 등등'의 수사로 말입니다.
미래파 시 자체의 태도는 실재에의 무관심이라면, '실재의 열정'을 다시 찾는 비평가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지젝은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실재의 열정이 더 이상 유효한 미학적, 정치적 전략이 되기 힘든 시대에 실재의 열정을 읽고 구성하고 활성화하려는 이러한 역설적인 열정'입니다.
이 열정은 환멸의 시대에 냉소와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사라졌다 생각되는 진정한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대안 모색이죠. 시대 착오적인 근대적인 가치와 허무적인 포스트 모던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종합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 정신의 시작입니다.
이 흐름을 한국의 경우에서 살펴보면, IMF 위기가 우리 역사에서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IMF 때문에 각종 분야에서 불신이 만연하게 됩니다. 이러한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실재에 대한 열정의 열정'을 소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사건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래파 비평이 바로 이런 열정의 한 실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래파 현상은 특이성을 갖고 있는데, 그 특이성은 시 자체와 비평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됩니다. 오타쿠라는 시인의 이미지와 비평가의 지식인적 접근, 만화적인 시와는 다른 중후하고 고전적인 접근 등 이 간극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 간극에 대해 더 생각을 해보자면, IMF 이후에 냉소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게 된 대중 속에서 정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들은 궁지에 몰릴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라는 것은 지식인들의 마지막 카드와 같습니다. 이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더하고 끝내겠습니다. 이 시대는 또한 온갖 종언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종언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사라졌다기보단, 넘쳐 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책의 종말이란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인한 책의 폭발 때문에 예전에 있던 책의 희소 가치에 대한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지식인의 종언, 예술의 종언도 같은 맥락으로 그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 현실적인 예로 성형 기술의 발달로 미인은 많아졌지만 희소성의 하락으로 인한 미인의 가치는 반대로 떨어지는 상황, 즉 미인의 종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러한 종언의 시대에 대한 감각은 보드리야르의 저서를 살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미래파의 등장은 '시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시는 다른 담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고 개인적이고 자폐적으로 밖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시의 필요성은 이제 시학에 의해 보장되고 증명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그 사회적 존재양식이 변하였습니다. 우회로를,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한 것인데, 실재의 열정이 선택의 차원이 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인은 방향성(이념적)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에 힘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스칼라, 즉 방향을 갖지 않고 크기만 갖은 에너지, 양질의 에너지를 만드는데 몰두해서 비평가와의 협업을 진행하고 새로운 혁명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종합하자면 미래파는 이런 점에서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던 아서 단토에게 그것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듯이, 시의 종언은 새로운 시작의 선언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좋은 비평이란 비평과 작품의 개별성을 전제하는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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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인 '작란', '포스트 미래파' 대표주자
인터넷 카페 통해 서로의 시 읽고 조언하고, 낭송회 등 문학 행사도
왼쪽부터 오은, 정한아, 서효인,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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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은, 정한아, 서효인, 유희경
인스턴트, 천몽, 불편의 공통점은?
얼핏 이메일 아이디나 인터넷 카페 별명을 연상시키지만, 어떤 모임의 이름들이다. 2000년대에도 '문학동인'이 있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최근 발간된 시집을 들춰보면 80년대 결성된 '시힘', '21세기 전망'등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시집이 출판시장에서 인기 있느냐와는 별개로, 최근 몇 년 사이 시 담론이나 시인들의 활동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이 활동의 중심에 시동인이 있다.
이 중 가장 젊은 시동인이 '작란'(作亂)이다. 1975년생 정한아 시인부터 1982년생 오은 시인까지 평균 나이 32.5세의 모임으로 작년에 결성됐다.
모임이 만들어졌을 당시 오은 시인을 제외하고는 시집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2002∼2008년에 등단한 이들은 시동인이 만들어진 지난해 서효인 시인이, 올해 유희경, 정한아 시인이 차례로 시집을 내면서 이제 멤버 전원이 제 이름의 시집을 갖게 됐다. 김민정, 김경주, 안현미 등이 속한 시동인 '불편'이 이른바 미래파 시인들을 대표했다면 '작란'의 멤버들은 포스트 미래파를 대변하고 있다.
지난 주 화요일 저녁 '작란'의 멤버들을 만났다. 정한아 시인의 첫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 출간을 맞춰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작란 멤버들과 함께 인터뷰를 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다"는 뜻에 따라 몇 주일 미뤄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이 동인의 '자칭 마스코트'인 오은 시인이 'since 20100120'이라고 적힌 작란 노트를 준다. "특별판으로 5만 권만" 만든 거란다. 노트 뒷면 작란의 뜻이 적혀 있다.
'①난리를 일으킴 ② '장난'의 잘못 ③21세기, 한국에서 가장 쿨한 동인.'
대다수 시동인이 친목모임으로 변한 것과 달리 '작란'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서로의 시를 읽고 조언해주고, 낭송회 등 문학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지난 봄에는 멤버들이 공동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화교육센터 '문지 사이'에서 시창작 강의를 10주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쿨한 동인
'작란은 어떻게 결성됐나?'부터 물어야겠다. 처음에 김소연 시인이 유희경, 오은 시인 두 사람에게 같이 동인을 해보라고 추천했다고 들었다.
오은) 맞다. 그리고 나서 유희경 시인이 '정한아 시인 멤버로 어때?'라고 물어서 나도 좋다고 했고, 얼떨결에 정한아 시인도 오케이 했다. 효인이 형도 그렇게 들어왔다.
유희경) 처음에 정한아 시인은 박사 논문 쓰겠다고 거절하는 뉘앙스를 풍겨서 우리 셋만 만났는데, 셋이 있던 카페로 정한아 시인이 들어왔다. 원래 휴대폰 충전하러 들어왔던 건데, 어쨌든 4명이 모이게 됐고, 그날 같이 술 먹고 동인하게 됐다.
시동인 다 모이면 주로 뭐하나?
오은) 엠티 간다. 인터넷 비공개 카페를 만들어서 글 주고 받고, 의견도 나눈다.
유희경) 활동이 많지는 않은데, 어떤 계획을 세우면 꼭 실천한다. 이를테면 이렇게 노트를 만든다거나(웃음), 여행을 가자고 하면 한 번에 꼭 간다거나.
서효인) 동인 모이면 주로 논다고 생각하는데(웃음), 시 얘기도 한다. 그동안 읽었던 시집 나누기도 하고, 서로 쓴 시에 대해 조언해주기도 한다. 두리반에서 낭송회를 했고, 올 봄에 문지 사이에서 시 창작 강연을 하기도 했다. 시 동인지도 낼 생각이다.
정한아) 80년대는 시동인이 결성되면 꼭 동인지가 함께 발간됐는데, 요즘 동인들은 움직임이 많이 줄어들었다. 시대 조류와도 관련 있겠지만, 시동인 활동이 멤버들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하면, 가시적인 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동인지를 만들자고 했다.
'불편'이나 '천몽'의 경우 시동인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각자 개성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이지만 시동인의 이름만 듣고도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작란'은 스펙트럼이 꽤 넓은 것 같다. 4명의 공통점은 뭔가?
정한아) 극적인 형식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느냐는 각자 스타일이 다르지만. 이를테면 오은은 상황극 같은 설정의 시를 쓴다. 희경이의 시를 보면 베케트 희곡같은 느낌이 든다.
효인이는 부조리극을 쓰고 있고, 나는 모놀로그 같은 작품을 쓴다. 동인 모두 시의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형식적 전위만 취함으로써 극단에 서려는 언어지상주의자는 없는 것 같다.
서로 만나면 시합평도 해주나?
유희경) 시를 읽고 감상을 말해주지만, 구체적이진 않다.
서효인) 등단 전이나 직후에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서 시 한편 한편에 대해 평을 하지는 않는다. '네가 쓰는 시가 전반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이런 방향으로 써봐라' 조언하는 정도다.
동인 시에 영향을 받기도 하나?
오은) 물론이다. 정한아의 시는 에너지가 넘치는 시다. 첫 시집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도 초심을 버리지 말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효인이의 시적 실험을 보면서 나도 안주하지 말고 써야겠다, 생각했다.
서로의 시에 대해 소개해준다면
유희경) 내 첫 시집을 구성할 때 서효인의 시집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효인이 시집은 나한테 위안이 되는 시집이다. 어떤 형태든 자기 비극성을 갖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시인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시집을 좋아한다. 서효인의 시는 화자와 시인이 닮아 있다. 테크닉으로 보면 촌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시적 태도는 고귀하고 예쁜거다.
서효인) 이제까지 많은 시인들이 한국어에 천착했다 하지만, 시인의 사고, 순간의 상황, 역사, 자기 자신에 대해 천착했다.
오은의 시집은 본격적으로 우리말에 천착한 시집이다. 우리말이 시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한편으로 전위적이지만, 또 한편으로 재미있게 읽히기도 한다. 오은의 시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오은) 발랄함, 경쾌함, 에너지 같은 첫 시집이 갖춰야 할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한아의 첫 시집이 이런 미덕을 모두 갖춘 시집이다.
시집이 나오고 7,8번쯤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처음 읽을 때는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느껴지다가 두 번째는 근대의 표상이 보이는 식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움을 던져주는 시집이다.
정한아) 유희경의 시집은 우리 넷 중에서 가장 튀는 시집이다. 가장 서정적인데, 모던하다. 서늘한 느낌도 있다. 해설에 기형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유희경의 시가 기형도에게서 영향의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 이 계보가 끊어져 있었다. 기형도, 이창기처럼 서늘하면서도 시적인 향을 맡게 해준 80년대 시인들의 시는 이후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희경의 시는 이런 시인들의 시를 환기시킨다.
정한아. 1975년생. 성균관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국어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
유희경. 1981년생. 서울예대문예창작과와 한국종합예술학교 서사창작과 졸업.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서효인. 1981년생. 전남대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소년 파르티잔의 행동지침>(민음사)
오은. 1982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호텔타셀의 돼지들>(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