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트림을 하면 양파 냄새가 났고 히히힝 당나귀 울음소리가 솟구쳤다 우리가 점점 점이 돼 가는 거 맞지?
양파는 벗겨도 벗겨도 양파인데 우리는 우리를 벗겨도 우리를 모르고 누가 벗기는지도 모르고
양파 속에는 흰 당나귀가 산다 양파를 까도 까도 흰 당나귀가 산다
넥타이에 대한 변명 / 조 희
개 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산책을 했다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는데 어떤 줄에 이끌리어 여보세요? 섬으로 이사했어, 꼭 줄이 끊어진 너 같았다
작년 겨울 내가 낙엽처럼 구르던 날, 너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병원 복도 끝까지 구르며 누구 없어요? 소리쳐도 아무도 걸어 나오지 않던 복도에서는 어떤 줄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울었는데 그 줄이 나를 감싸는 듯했다 개 줄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름다운 섬이 되기 위해 파도 끝으로 달려가는 어떤 불빛 같기도 했다
너를 두고 중환자실을 걸어 나오며 내가 나를 밀고 나올 때 그것이 나만의 보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왠지 뜨거웠다 숨이 가빠서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넥타이뿐인데 무언가가 내 목을 조이고 있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줄에 이끌리어 목에 감기는 것을 뒤로 젖히면서 개 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산책을 하고 있다
지나다니는 말끔한 사람들은 모두 투명한 줄을 매고 있다 목과 몸통 사이를 잇는 긴 복도 같은
어떤 줄 하나가 사람들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줄을 잡은 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의 여자 / 조 희
저 두 눈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못 본 척 책장을 넘긴다
나는 그 옛날의 여자가 되기로 했다 하이힐을 신고 밥을 하고 나물도 무쳤다 여전히 그 눈빛을 못 본 척 책장을 넘겼다 가자미도 구웠다
전화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커튼을 열어젖혔다 빛이 길게 돌아왔다 그림자에 붙은 미역줄기는 뜯어내 버렸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책장 사이에서
저 두 눈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인돌 속으로 들어간다
파울라*가 있는 연못 풍경 / 조 희
잉어떼가 연못 둘레를 그려요 잔잔히 일어나는 파문, 연못 속 덤불로 내려가는 수초 사이에 파울라가 있어요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미소 짓는 그녀, 꿈밖으로 자란 머리칼을 곱게 빗어 뒤로 묶었어요 손에는 꽃을 들고서
그녀는 아프리카 나무인형처럼 연못의 둥근 무릎을 껴안았어요 연못은 모서리가 닳은 달을 낳았고 피가 도는 돌을 낳았고 빛나는 거울을 낳았고 우리가 우리를 모를 때
가라앉은 산을 배경으로 그녀가 수면으로 떠올랐어요 그녀의 이마에 구름이 앉았다 흘러가요 바람이 그녀의 숨결을 읽어요 눈, 코, 입, 불룩한 배 물의 맥박은 빠르게 물결치고
그녀 옆에 어린 나를 팔에 안고 젖을 먹이는 엄마도 나타났어요 우리는 모두 누드, 윤곽이 둥글고 굵은 원시인처럼 연못에 누워 있어요
파울라와 엄마에게는 커다란 유방과 불룩불룩한 엉덩이가 있어요 연못은 자궁처럼 깊고 물렁물렁해요 수초는 손바닥으로 물결을 뒤척이고 나는 연못에 파울라와 어린 나와 엄마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신발에 연못이 묻어 왔어요 자고 나면 물이 찰랑거렸죠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연못, 상상이 상상을 낳고 있어요 가끔 물속에서 내가 쏟아져요 눈꺼풀에 붙은 지느러미의 시간이 안과 밖으로 흐르고 나는 연못의 굵은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들어요
*파울라 모더존-베커(Paula Modersohn-Becker, 1876-1907),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심사평
조희 님의 시는 다른 작품도 인상적이었지만 넥타이에 대한 변명을 읽는 순간 눈을 감은 채 나를 비춘 겨울을 보는 듯한 심정으로 작품을 감상했다. 아마도 이 시를 읽는 다른 분들도 같은 느낌을 공유하지 않는지. 지나다니는 말끔한 사람들은 모두 투명한 줄을 대고 있다/목과 몸통 사이를 잇는 긴 복도 같은 // 어떤 줄 하나가 사람들을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줄을 잡은 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며 심사위원단은 망설임 없이 조희 님의 시를 당선작으로 꼽았다. 인간이 부품이 아니고 기계가 아니고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존재 이유를 시로써 투항해내는 조희 님의 걸음이 앞으로도 계속 씩씩하게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