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작년에 진천 답사를 하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그냥 지나친 묘가 있었는데 이번 옥천,영동 답사를 하고 시간이 남아 올라오면서 찾은 묘가 진천송씨 시조인 송인 묘이다. 이곳은 최근에 신도시로 개발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다행히 묘역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주차장이 별도로 없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송인공원으로 진입하여 들어가면 송인의 사당인 상산재가 나오고 그 위쪽에 송인의 묘가 보인다. 송인 묘는 직사각형의 묘로 조금은 특이한 형태를 이룬다. 주변에는 원래 진천송씨 시조 신라대아찬 송순공 단이 있으며, 송인의 후손들 중 묘가 실전된 분들의 단도 조성되어 있다.
상산재는 들어갈 수 없어서 담너머로 돌아보았고 앞쪽에는 오래된 보호수도 존재한다. 휴일이라 공원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의미있는 묘역들을 신도시 개발로 무조건 옮기거나 없애는 것 대신에 이렇게 공원으로 조성하면 후세인들의 표상도 되고 효사상도 증진될 것으로 보인다.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신라 대아찬 휘(諱) 순공(瞬恭)의 후예(後裔)인 송인(宋仁)공은 고려(高麗) 인종(仁宗)때의 공신(功臣)이며 진천 송씨(鎭川 宋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송인은 고려 인종(仁宗) 4년(1126) 이자겸(李資謙)의 난(亂)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의 난군(亂軍)에 의해 좌복사(左僕射: 도석에 속한 정2품 벼슬) 홍관(洪灌)등과 더불어 살해되었다.
뒤에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삼중대광문하평장사(三重大匡門下平章事)에 이르렀으며 공적을 인정받아 상산백(常山伯)에 봉하여져 진천의 행정, 사법, 경제의 전권이 주어졌다. 묘소(墓所)는 덕산면 두촌리 두루지(옛날 山井面 斗如知)에 있고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하며 환여승람 석총(石塚)에 진천에서 오래된 분묘라고 기록되어 있고 현재 봉분 주위를 돌로 쌓았으며(護石), 묘갈(墓碣)과 장명등(長明燈)이 있다.<진천관광에서 인용>
진천 송인 묘소(鎭川 宋仁 墓所) 송인(宋仁)[?~1126]은 고려 전기의 문신으로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에서 태어났으며,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증되고 상산백에 봉해졌다. 묘소 위치는 진천읍에서 국도 21호선을 따라 금왕 방향으로 8㎞쯤 달리면 덕산읍 용몽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지방도 513호선을 따라 두촌리로 가면 매산에 송인의 묘소가 있다. 진천 송인 묘소는 1126년(인종 4)에 조성되었으며, 1958년 봉분을 확장하기 위하여 다른 석재를 사용하였다가 최근에 원상 복구하였다. 진천 송인 묘소 앞 왼쪽에는 2기의 묘비가 있는데, 비수가 있는 비는 1857년(철종 8)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진천 송인 묘소는 윗부분만 제외하고 봉분의 사면을 모두 장방형의 돌로 쌓았다. 봉분의 왼쪽으로는 비갈과 비석으로 된 2기의 묘비가 있다. 그중 비갈로 된 묘비는 높이 150㎝, 너비 53㎝, 두께 20.5㎝이며, 비석으로 된 묘비는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30㎝, 너비 54㎝, 두께 14.5㎝이다. 묘비 외에 상석 1기, 동자석 한 쌍, 장명등 1기가 갖추어져 있다. 송인의 묘비 2기에는 각기 명문이 새겨져 있다. 비갈로 된 묘비의 앞면에는 ‘고려인종조찬화의덕윤리공신삼중대광문하시중평장사진천백송공휘인지묘(高麗仁宗朝贊化懿德允理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鎭川伯宋公諱仁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으로 된 묘비의 앞면에는 ‘고려문하시중평장사송인지묘(高麗門下侍中平章事宋仁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숭정후사정사이월개립(崇禎後四丁巳二月改立)’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857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진천 송인 묘소는 봉분의 사면을 장방형의 돌로 쌓아올린 고려시대의 독특한 분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의 「석총(石塚)」에도 진천에서 오래된 분묘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진천송씨 대종회에서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91호 |
문화재명칭 |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산21-7번지 |
관리자(연락처) | 진천송씨대종회 |
▼ 석총(碩塚):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안내석
▼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가 있는 송인공원 안내도
진천 상산재(常山齋)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에 있는 진천송씨 선대의 위패를 모신 사당. 송인(宋仁)(?~1126)은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에서 태어났으며, 벼슬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난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추증되고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상산재는 진천송씨가 세거하는 계기가 된, 고려 중기 문신이자 진천송씨 중시조인 송인을 비롯한 선대의 위패를 모신 문중 사당이다. 매년 음력 10월 10일 제(祭)를 올리고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매산 394에 위치한다. 지방도 513호선에서 덕산읍 두촌리로 가는 국도 2호선으로 약 3㎞쯤 가면 송인 묘소 이정표 조형물이 있다. 이정표에서 우측 포장도로를 따라 약 200m쯤 가면 상산재가 위치하고 있다. 상산재는 정면 5칸, 옆면 2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반 칸의 앞퇴를 두었고, 편액을 달았다. 정면은 솟을대문을 세우고 현판[경앙문(景仰門)]을 달았으며, 주변에는 행랑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렀다. 상산재가 언제 최초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가집 형태의 목조집과 행랑채 등이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1991년 이를 모두 허물고 1993년 3월 재건축하여 지금의 형태에 이르고 있다. 상산재 뒤편에는 송인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가 위치하고 있으며, 좌측과 우측은 낮은 구릉이 이루어져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전면에는 논이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
▼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을 비롯 선대의 위패를 모신 문중 사당인 상산재
▼ 상산재(常山齋) 정문
송문주(宋文胄) 장군 송문주(宋文胄, 생몰년 미상)는 일찍이 고종(高宗) 18년(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성 전투에 박서(朴犀)의 휘하로 참전하여 몽골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었고, 몽골군의 전략전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귀주성 전투의 공적으로 낭장(郞將)이 된 그는 고종 23년(1236년) 몽골의 3차 침입으로 각 도의 산성을 방어하는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써 죽주(竹州)에 파견되어 죽주산성을 지켰다. 몽골군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서북면으로 내려와 8월에는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남경(南京)에 주둔하며 온수군(溫水郡)까지 공격하였고, 9월 임술(8일) 죽주를 공격하였다. 송문주는 죽주산성의 방호별감을 맡고 있었다. 몽골군은 우선 죽주산성의 고려군을 향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성안에서는 병사들을 출격시켜서 몽골군을 쫓아버렸고, 몽골군은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귀주에서 몽골군의 공성 전술을 체험했던 송문주는 몽골군의 공성 작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번번이 군사들에게 "오늘은 적이 어떤 기계를 설치할 것이니 우리는 어떤 기구로 맞서야 한다"며 몽골군에 대한 대응 전술을 지휘하였다. 송문주의 말대로 몽골군이 화포로 성문을 부수자 죽주산성의 방어군 역시 포(砲)를 사용하여 몽골군을 막아 물러나게 하였고, 이어 몽골군이 인유(人油), 관솔불, 쑥풀 등을 짚에 뿌리고 화공을 펼치자 때맞춰 죽주산성 안에서 병력이 한꺼번에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을 기습해 숱한 몽골군을 베었다. 결국 보름 만에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불태우고 물러갔고, 죽주산성은 무사하였다. 당시 죽주산성 내의 군사들은 몽골군의 공격 전법이 송문주의 말과 실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송문주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조정은 죽주산성에서의 승전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송문주를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삼았다. 한편 온수군을 공격하였던 몽골군은 9월 3일에 군의 향리인 현려(玄呂) 등에게 패하였고, 겨울 12월 대흥성(大興城)에서도 고려 방어군이 몽골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위키백과에서 인용>
|
▼ 송문주(宋文胄) 장군과 죽주산성 안내문
충절수(忠節樹) 우국(憂國)충혼(忠魂)을 홀로 기리며 조선 순조(純祖) 때부터 3백년을 꿋꿋이 지켜온 진천의 이 느티나무는 충절수(忠節樹)라 불린다. 나라사랑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의리를 지키는 것이 절조(節操)라는 의미로 이는 진천군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여기 진천백 송인(鎭川伯 宋仁/1126 순직)장군의 유택(幽宅) 우백호(右白虎) 끝자락에서 진천송씨 시조의 충절을 기리니 고려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인종(仁宗/1122-1146 재위) 임금을 몸을 바쳐 호위하다가 순절하였다. 단종(端宗)복위를 꾀하다가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과 한날한시에 3부자가 순절한 그 9대손 송석동(宋石仝/1456 순직)의 희생을 충절수가 상징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 그 13대손 숙헌공(夙軒公 휘 宋周賓/1551-1592)은 나라의 창고인 용산창(龍山倉)을 왜노(倭奴)에게 침탈당하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수호하다가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순국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여기 진천백 묘소 앞에 예장(禮葬)했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이장하였다. 충절수가 이토록 우국(憂國)충절(忠節)을 상징하니 여기를 지나는 이가 어찌 그 고결한 유풍(遺風)에 고취되지 않으리오.<충절수 안내판에서 인용>
|
▼ 상산재(常山齋) 앞에 있는 충절수(忠節樹)... 느티나무 보호수
▼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원경
▼ 진천(鎭川) 송인(宋仁) 묘소 안내문
▼ 송인(宋仁) 묘 전경
▼ 송인(宋仁) 묘 석물
▼ 송인(宋仁) 묘 앞에 있는 마총비
▼ 송인(宋仁) 묘 근경
▼ 송인(宋仁) 묘비...
▼ 송인(宋仁) 묘 측경
▼ 송인(宋仁) 묘 후경... 앞쪽에 상산재가 보인다.
▼ 진천송씨(鎭川宋氏) 시조(始祖) 송순공(宋舜恭) 단비
▼ 진천송씨(鎭川宋氏) 선조들의 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