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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지구 전투 당시 중공군의 군수품이 말라버린 것은 3가지 이유가 있음.
중공군은 금성지구 전투 당시 전선에 총 35일치 물자를, 각 전선 부대에는 5~10일치 물량의 각종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있었음. 그러나 이는 7월 13일 공세 시작 직후 이 물자 대부분이 소모 내지 상실되었음.
이유는 중공군 17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2군단의 요새 진지 라인을 넘어서다가 막대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후속할 부대들이 조기에 투입되어 굉장히 무리하게 전선을 돌파함.
물론 한국군도 요새 방어를 하면서 14,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적잖은 피해를 입었는데 문제는 한국군의 경우 1,100여 대의 각종 트럭을 동원해서 2군단의 모든 보급 소요를 충당하고 있었음.
가장 중요한 탄약부터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간식류까지 모두 차량으로 보급함. 2군단 병참부대는 비명을 질러댔는데, 18만의 한국군을 먹여살리는데 최소 2,200여 대의 트럭이 필요했고, 실제로 무지막지한 물량이 소모되었기 때문임.
그럼에도 병참부대가 이를 박박갈면서 절반 수준의 트럭과 미군의 병참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그날그날 다르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2군단 예하 모든 사단들이 매우 고르게 보급을 받아 안정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음.
게다가 한국군은 금성천 북안을 포기하면서 나름 보급선이 안정되었다는 점도 한 몫함. 반면 중공군은 24만의 병력 중 72,000명을 상실한 채 금성천 남안으로 밀고 내려왔는데 이곳에서 사실상 공세가 완전히 종말을 맞이함.
이미 수도사단 방면에서 2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돈좌당했고 6사단 앞에서만 12,000명이 날아갔기 때문임. 당장 병력도 녹아내리는데 후방의 보급 라인이 제대로 이어질 수도 없었음.
한국군의 전술폭격과 100여 문에 달하는 각종 곡사포의 화력은 전후방을 가릴 것 없이 중공군의 보급선을 말려버렸고, 여기에 미 공군과 포병대의 증원도 이어지면서 7월 15일 즈음이 되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름.
중공군이 7월 17일에 모든 군수물자가 거의 고갈되었다는 보고가 나올 법도 한 것이 바로 한국군의 전략에 완전히 말려든 것에 가까움. 한국군은 백마고지 전투 이후부터 대중공군 전략의 일환으로 공간은 내주되, 적의 인명과 물자 손실을 최대한 안겨주는 것을 택함.
즉 적의 제1파에 요새 진지든 포격이든 항공 공습이든, 아니면 정예보병대든 가용한 전력을 투입해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고, 제2파에 투입될 사단들을 조기 투입을 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함으로서 물자 손실을 유도했다고 보면 됨.
중공군이 자랑하는 제파 전술을 아예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고, 이는 중공군 전선부대가 보유한 물자들을 조기에 소모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
게다가 금성천 일대를 보급부대가 건너오기도 굉장히 어려웠음. 하필 중공군이 공세 종말 시점에 올 즈음 장마가 와서 금성천 일대의 물이 크게 불어났다고 당시 전투 상보가 기록됨. 한국군이 구축한 참호진지에도 무릎까지 비가 찰 정도면 이미 심각한 폭우가 온 것.
이는 초기 방어하던 한국군에게 매우 큰 장애로 다가왔고, 보급로 유지에 많은 애로사항을 주게 된 문제였으나 반대로 중공군에게도 큰 문제를 일으킨 셈.
어찌어찌 건너려해도 포병대와 항공기들이 미친듯이 폭격을 감행했고,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항공기들이 B-26 및 B-29 중폭격기를 투입해서 집요하게 중공군의 물자집적소를 보이는대로 부수고 다녔음.
13~14일 2일 동안 극동공군이 금성지구전투에 뿌린 항공폭탄의 물량은 무려 40만 파운드에 달했고, 16일에도 100만 파운드를 뿌려대며 완전히 보급 역량을 상실시킴.
17일에는 일출~일몰 때까지 무려 1,445소티의 항공기가 나서서 한국군 제2군단을 직접 지원해줬고 한국 공군 역시 네이팜과 로켓탄으로 무장하고 직접 지원을 감행하여 30여 개소의 중간 물자 집적소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올리기도 했고.
추산이지만 금성지구전투 동안 연합군 공군이 뿌린 항공폭탄 물량은 거의 1,000톤에 가까움. 7월 13~17일까지 악천후가 상당했던 걸 감안하면 작정을 했다고 보면 됨.
결과적으로 금성천 도하 직후 중공군의 극심한 물자 부족 현상은 이미 누적될 대로 누적된 보급소 및 보급로에 대한 연합군의 대규모 타격이 가져온 결과였음. 거기에 중공군이 한국군의 전략에 완전히 넘어가버린 것도 문제였고. 좋은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음.
출처
한국전쟁사료 41, 육군본부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51-1953
한국전쟁연구(동원,노무운용,점령정책)
중앙일보사 - '민족의 증언'(1976)
Monthly Operations Command Report for June 1953 (Feeder for RCS CSGPO-28 (RI))
Capital ROK Division in Battle. "Kumsong Salient" July 13-16, 195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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