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갈기를 좋아했던 나의 유년(幼年) 이야기(개암 김동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내를 찾으니 주방에서 인기척을 낸다. 아내는 아침 밥쌀을 씻어 밥솥에 앉혀 놓고 본격적으로 마늘을 깔 요량인가 준비물이 많았다. 플라스틱 소쿠리를 2개나 가져다 놓고 얇은 비닐장갑을 끼고 방석에 앉아 어제 사 온 육 쪽 햇마늘 한 접을 넣은 배부른 그물망을 통째로 널브려놓고 나의 도움을 기대한 듯 주방 탁자 위에 아내와 같은 비닐장갑을 내어놓았다. 상황을 살펴보니 필시 나의 도움을 받기 위한 사전 준비로 여겨졌다.
우선 만만해 보이는 통마늘 한 개를 꺼내 반으로 쪼개보았다. 수분이 많은 햇마늘이긴 해도 알통이 굵고 외피가 질겨 맨손으로 까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내가 내놓은 과도의 칼날에 손끝을 대보니 날이 무디어서 갈아서 써야겠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아침 식전에는 마무리 짓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우선 가위로 마늘 대를 싹둑 잘라 소쿠리에 담아 놓고, 아침 식사 후 30여 년 북 창녕 D 면 소재지 장터거리에서 샀던 천연석 숫돌을 찾아 다용도실에다 비닐 장판을 깔고 임시 작업장을 차렸다.
예전부터 필자의 칼 가는 솜씨만은 제대로 알아주는 아내는 주방의 칼집에서 잠자던 녹슨 식칼까지 모조리 꺼내와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숫돌 옆에 던져두고 나갔다. 아내가 내어준 뜨거운 커피 한잔을 천천히 마신 후 세면장으로 들어가 음악을 들으면서 칼을 갈다 보니 문득 걱정 없이 천방지축으로 산골 소년 행각을 떨치며 놀던 어린 시절이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올랐다.
필자의 생가는 큰 마을과는 떨어진 언덕배기 외진 산골 마을의 맨 꼭대기에서 5대째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스무 가호(家戶) 남짓한 작은 마을이라 함께 놀 마땅한 또래 친구가 없어 취학하기 전부터 사시사철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하였다. 여름철에는 마을 주위의 산야와 논밭을 맴돌며 매미채를 만들어 놀고, 겨울철에는 팽이나 새총을 만들어 놀다가 심심하면 활을 만들어 대밭을 향해 함부로 쏘거나 연을 날리며 혼자서 놀았다. 봄가을 농번기에는 쟁기를 매고 논밭으로 나서는 할아버지를 따라가 다랑논 사이로 흐르는 냇고랑(개울)에서 가재를 잡거나 논밭 언덕배기에 지천으로 깔린 산딸기와 보리똥(보리수 열매)을 따 먹으며 놀았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필자는 하필이면 위험하여 그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말렸던 낫 갈기를 좋아하였다. 철없는 산골 소년의 호기심으로 시작한 낫 갈기는 지게질보다 더 어려웠다. 처음에는 어깨 힘이 좋았던 막내 삼촌같이 단숨에 쓱쓱 갈아 날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사랑채 처마 밑에 꽂혀 있던 많은 낫, 손도끼, 짜구(깍기 망치), 부엌칼은 나의 칼 갈기 실력을 연마하는 좋은 실습 도구가 되어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에 나의 낫 갈기 실력은 어른들 뺨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나의 낫 가는 실력이 날로 발전하자 남자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집을 방문하여 낫이나 칼을 갈아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시절에만 해도 집마다 숫돌이 하나씩 있었지만, 성질이 달라서 낫 갈기 봉사를 나갈 때에는 내 손에 익은 우리 집 숫돌과 참나무 토막을 파서 내가 만든 숫돌 거치대를 망태기에 지고 다녔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당신의 대를 이어갈 농사꾼의 싹수가 보였는지 남달리 사랑하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장난감 같은 지게와 바지게를 손재주가 남달리 좋았던 삼촌을 시켜 만들어 주었다. 특히 정월대보름 즈음에는 집 안에 있는 낫, 도끼, 손도끼, 작두날과 호미, 괭이, 쇠스랑, 톱, 쟁기보습 등을 모아 싸리 바지게에 담아지고 장터 대장간에 가서 닳은 날을 새로 벼려 오면서 특별히 작은 낫을 만들어 나에게 선물해 주시면서 흐뭇해하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는 할아버지는 지금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영면하고 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더니 지나고 보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먹을 것 없어 삼시세끼 고구마를 먹고 사는 가난한 이웃집도 참 많았다. 그러한 시절에 할아버지는 타고난 강골(强骨)과 부지런함으로 묵정밭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히고 다랑논을 일구어 대가족을 먹여 살리는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나는 할아버지의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초등교직을 택해 몇 년 전에 정년퇴직까지 했지만...
지금까지 해찰답던 나의 유년 시절 이야기. 필자의 자녀 같은 젊은 세대들이나 나와 같은 동연배일지라도 농·산촌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공감하기 힘들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그날 예전의 칼 가는 솜씨로 녹슨 식칼을 모두 갈아 놓고, 시키지 않은 일 한 접이 훨씬 넘는 생마늘까지도 깨끗하게 까서 납품을 마치고 수고로 칭찬도 한 바가지 받았다.
2023-02-07
첫댓글 귀한 추억을 소환하여 멋진 수필을 꾸미셨습니다.
선생님과 저의 유년시절의 생태계는 멀디 먼 곳이었는데도
같은 동네처럼 아니 같은 그림을 복사 한것처럼 똑같네요.
이 아침 얼굴에 미소를 그려 봅니다.
시인님의 추임새에 쑥쑥 자랍니다.